[이택환]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이택환]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 이택환
  • 승인 2019.08.18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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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누가복음 12:49-56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1885-1952)는 양자역학을 창시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만약 당신이 양자역학을 공부하면서 머릿속이 혼란스럽지 않다면,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요. 양자역학에 의하면 하나의 전자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가능한 모든 장소에 존재한다고 합니다. 만약 달을 전자라고 가정할 경우, 우리가 달을 보지 않을 때는 달이 우주 어디에서나 존재하지만, 우리가 달을 보는 순간, 그 달은 정확히 제자리에 딱 돌아와 있다는 것입니다. 닐스 보어와 동시대를 살았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당시 양자역학을 거부하고 1920년대에 닐스 보어와 논쟁을 벌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달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과연 달이 그곳에 없다는 말인가? 그게 말이 되는가?” 물론 달과 같은 거시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미시적인 양자의 세계에서는 ‘그렇다!’는 것이 닐스보어의 대답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과학은 이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이 아닌, 닐스보어의 손을 들어줍니다. 이런 과학사의 뒷이야기만 들어봐도, 양자역학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고 혼란스러워 보입니다.

뜬금없이 양자역학 이야기를 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 또한, 그만큼 이해하기 어렵고 혼란스러운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한 번 닐스 보어를 패러디해 보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머릿속이 혼란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가령 마태복음에는 하루 종일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과, 해지기 전에 잠깐 와서 일 한 사람이 동일한 일당을 받는 예수님의 비유가 나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지요. 또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고 오겠다는 제자에게,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이건 윤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버트런드 러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사회평론, 2005년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말씀들이 복음서에 가득합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성경 안에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낯선 하나님의 세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낯선 성경의 세계를 접한 사람들은, 그가 제 아무리 세계적인 석학일지라도 혼란을 느끼고, 이해하기 어려운 게 당연합니다. 영국의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그가 기독교를 믿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들을 때마다 어리둥절한 희한한 얘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시장기를 느낀 예수께서 멀리 서 있는 이파리 무성한 무화과를 보시고, 먹을 것이 있을까 해서 그리로 가셨다. 무화과나무에 가서보니 아직 열매 맺을 때가 아닌지라, 잎사귀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때 예수께서 나무를 향해 ‘지금부터 영원히 아무도 네 열매를 먹지 못하리라!’ 저주를 하셨다. 다음날 아침 베드로가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주께서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를 보소서, 시들어버렸나이다’ 라고 하였다.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무화과가 열릴 철도 아닌데, 예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다니 말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지혜로 보나 도덕성으로 보나, 예수님은 역사에 남을 위대한 인물이 될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는 차라리 석가모니, 소크라테스가 훨씬 더 위대한 인물이라고 보았지요. 그처럼 괴상하고 비이성적인 예수님을 그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역시, 우리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49절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다고 하셨는데, 그 불은 성령의 불이 아닙니다. 긍정적인 의미의 불이 아닌, 부정적인 의미의 불이지요. 곧 예수님이 우리에게 환란과 고통을 주시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51절이 이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우리는 예수님은 평화의 왕, 화평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스스로 “아니다, 내가 온 것은 화평이 아닌 분쟁을 주기 위함이다”라고 하십니다. 그 결과 한 집에 다섯 명이 있다면, 둘 씩, 셋 씩 편을 나뉘어 싸우게 된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이 싸우고, 어머니와 딸이, 그리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분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오시면, 이전에 싸우던 가족도 평화로운 가족이 되어야지, 거꾸로 평화로운 가정에 분쟁이 일어난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이런 말씀을 읽고서도 혼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경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으면 곳곳에서 말이 되지 않고, 상식에 어긋나며, 비이성적, 비윤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예수님을 믿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마치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였던 것처럼, 사람들이 믿음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분석하고 깊이 생각한 끝에, 예수를 믿지 않기로 작정한 버트런드 러셀은 정직한 사람입니다. 칼 바르트는 이처럼 인간은 본래 자연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지요. 그의 명제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였습니다(전 5:2). 하나님은 인간과 접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르트는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영원이 인간의 순간과 만나게 되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불가능한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설교 시간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성령의 조명하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설교가 인간의 언어로 수행됨에도,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신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로마서 10:17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비록 난해하긴 해도,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그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부모를 포기하고, 자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오늘 말씀은 이미 구약성경 미가서 7장 6절에 언급된 말씀입니다.

“6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이 말씀은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말세 때의 모습입니다. 그 때가 되면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지고, 정직한 자들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두 손으로 부지런히 악을 행합니다(미 7:2-3). 이웃도 믿을 수 없고, 친구도 의지할 수 없습니다. 그 때가 바로 오늘 예수님이 인용하신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함으로,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 집안사람이 되는 때”입니다(미 7:5-7). 미가 선지자는 그 때에 하나님의 ‘형벌의 날’이 임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미가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과거 애굽에서 나온 것처럼(미 7:15), 자기 백성들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깊은 바다에 던지심으로, 그들을 깨끗이 용서하시고,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당신의 구원의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미 7:19-20). 이처럼 미가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때’, ‘형벌의 날’, ‘구원의 성취’와 같은 중요한 키워드를 통해, 우리는 오늘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핵심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신앙의 문제로 아버지가 아들과 싸워야 한다거나, 예수님 때문에 딸이 어머니와 갈라서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바로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그 ‘마지막 때’, 하나님의 형벌이 임할, 그 ‘하나님의 때’, 곧 카이로스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하신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님의 말세의 형벌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벌이 절정에 달하는 때는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되는 때가 아닙니다. 그 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당신이 받으실 세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하나님의 심판의 절정,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소위 그리스도의 세례가 이루어지기까지 예수님은 큰 어려움(답답함, 곤경)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제자들이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하는 예수님의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가서의 예언처럼 하나님께서 곧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과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깊은 바다에 던지심으로, 그들의 죄를 깨끗이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구원의 약속을 마침내 이루실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출애굽의 새로운 시대, 즉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부디 이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5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천지의 기상’은 하늘과 땅의 모양새(프로소폰, 얼굴)를 말합니다. ‘이 시대’(톤 카이론)는 카이로스, 곧 하나님의 때를 말합니다. 즉, 너희가 하늘과 땅의 모양새만 보아도 비가 올지 날이 갤지, 추울지, 더울지를 알아차리면서, 왜 하나님의 때는 분간(도키마조, 구별하다, 인식하다)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이 시대, 즉 하나님의 때를 제대로 분별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바로 거기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세상이 미처 알지 못하는, 또 세상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이 시대’ 곧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분별할 줄 아는 안목을 요구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마치 양자역학처럼 혼란스럽고 난해해 보이는 예수님의 수많은 역설들은(오늘 복음서 말씀 같은), 세상의 쾌락, 혹은 절망의 깊은 잠에 취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이 땅에 동터온 하나님 나라를 맞이할 수 없는 우리들을, 뒤흔들어 깨우시는 그분의 모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말씀을 만나거든, 버트란드 러셀처럼 성경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고, 기독교를 떠날 게 아니라, 즉시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 곧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분별해 내야 합니다. 그 때 우리가 요즘처럼 극도로 암울한 세상 속에서도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는 오늘 주님의 말씀에 우리 모두, 겸손히 귀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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