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만희] 불과 분열
[박만희] 불과 분열
  • 박만희
  • 승인 2019.08.18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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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희 전도사의 설교 - 누가복음 12장 49-56절

좋으신 하나님의 평화가 여기 계신 모든 분들과 흩어져 함께 걷고 있는 모든 분들의 삶에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함께 걷는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에게 가끔 소감을 묻습니다. 좋은 평가를 듣고 싶어서 드린 질문이 아니라, 제 딴에는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인사말인데,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질문 같습니다. 아주 솔직한 대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질문이니까요. 물론 그 중에는 솔직한 답변을 해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떠어떠한 점들은 아쉽더라고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더러 계신데, 기분이 나쁘거나 했던 적은 없습니다. 다만 생각이 좀 많아지죠. 제 스스로도 공감이 되는 비판일 때, 혹은 저의 노력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사안일 때, 혹은 끝없는 완벽함을 요구받는 것 같을 때 그렇습니다. 그땐 혼자 머리를 쥐어뜯죠. 그런데 가끔 비판이 아닌 대답인데도 멈칫,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가족 같아서 좋다’는 대답이 그렇습니다. 상투적일 수도 있고, 진심이 담긴 칭찬일 수도 있는 이 답변에 저는 순간 멈칫 거립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 ‘가족’처럼 편안하고 아름다운 단어도 드물 텐데 말입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렸다시피, 가족은 그야말로 울타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내부만 보면 지상에서 가장 끈끈한 ‘우리’이지만, 바깥으로는 가장 높고 단단한 담벼락을 쌓는 혈연 공동체가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좋고 맛있는 거 있으면 내 식구 먼저 챙길 때 특히 그렇지만, 폭력이 발생해도 경찰이 끼어들지 못하는(않는) 사적 영역이 가족입니다. 가정 안에서 발생한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집안일이니까요. 주로 누가 가해자가 되고, 누가 피해자가 되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겁니다. 때에 따라 가족은 국가나 법도 개입할 수 없는 불가침 영역이란 겁니다. 그런 점에서 가족은 높은 담벼락에 둘러 쌓여있습니다. 좀 불편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가족이란 말에서 친숙함과 편안함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강한 배타성을 느낍니다.

가족이라는 말에 멈칫하게 된 이유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가족이란 말에서 배타성을 느끼든 말든 모두가 가족 안에서 행복하면 될 텐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 말에서 느끼는 감정은 모두가 제각각입니다. 경험이 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이에게 가족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이겠지만, 어떤 이에게 가족은 떠올리기조차 싫은 고통과 아픔을 안겨준 공간일수도 있습니다. 확언하건데 드물지 않습니다. 조금만 눈을 들어 살펴보면 허다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족이란 말이 세상 모두에게 따뜻한 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제가 가족이란 말에 멈칫하게 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과거에 한 철학자는 가족이야 말로 군주제도의 모델이라고 말했습니다. 가부장제를 모델로 왕권국가나 군주제도가 세워졌다는 겁니다. 바꿔 말하면 가족이야말로 계급 사회의 표본이라는 겁니다. 지금만 봐서는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아주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닐 겁니다. 진실에 가까울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이때 우선 비판하는 건 가족 자체라기보다는 가부장제입니다. 작은 예로 전 지금도, 명절에 모인 한 가족이, 남성과 여성을 구분해서 따로 밥을 먹던 장면을 기억합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죠. 식탁은 사회를 가장 잘 드러내는 축소판입니다. 식탁에 차등을 두는 행위는 그야말로 계급사회를 뜻하죠. 호주제가 폐지되는 등 지금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고는 합니다만, 가부장제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삶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얘길 왜 하느냐고 따져 물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끼리 화목하게 잘 지내라고 기도를 해도 부족할 판에 말이죠.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는데, 저는 교회에 계신 모든 가족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 일에 서로 서로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걸 고민하는 것도 교회의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왜 자꾸 가족 이야길 하시는지 생각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깊게 들여다보기보다는,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조금이나마 해보려고 합니다. 늘 그렇지만 오늘 설교 목표는 결론을 끌어내는 게 아닙니다. 조금이나마 틈을 내고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게 목표입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가지 내용입니다. 49절부터 53절까지는 ‘예수님이 불을 지르러 왔다.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 54절부터 56절까지는 ‘날씨는 예상하면서 왜 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예수님이 무리를 꾸짖는 내용입니다. 저는 ‘불을 지르러 왔다’는 앞의 내용에 무게를 두고 본문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불을 지르기 위해,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왔다고 말씀합니다. 불과 분열 이 두 단어는 우리를 곤란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야말로 평화의 왕이고, 사랑 그 자체라고 우리는 들어왔으니까요. 그런 예수님에게 불과 분열은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전혀 다른 두 이미지를 한 예수님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여기 계신 분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고 싶으신가요. 예수님은 어디에 불을 지르려고 하신 걸까요. 왜 분열을 일으키려고 하셨을까요. 이것이 오늘의 질문입니다. 해결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혹자는 불을 교회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재빨리 바꾸려고 합니다. 불은 예수님이 주신 뜨거움, 곧 성령이라는 겁니다. 성령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불은 곧 우리에게 주신 뜨거운 심령이라고 누군가는 말합니다만, 이 견해는 쉽게 반박이 가능합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복음에서는 불 대신 칼을 그 자리에 집어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합니다. 두 본문이 같은 내용이라면 본문은 심령의 뜨거움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또 어떤 이는 본문을 마지막 때에 일어날 혼란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읽습니다. 불은 심판을 나타내는 이미지이고, 가족 간의 분열은 그야말로 말세를 뜻한다는 겁니다. 사실 본문을 마지막 때로 보는 거야 꽤나 전통적인 읽기입니다만, 문제는 심판을 앞세워 ‘하나 됨’을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불 심판을 받기 전에, 나라가 분열하고 가족이 찢어지기 전에 일치단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에게 분열은 무조건 나쁜 것이니까요. 그들에게 평화란 분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입니다. 혹시라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내용과 무관하게 악마가 됩니다. 교회라면 느닷없이 신천지가 등장하죠. 신천지라는 프레임만큼 손쉬운 대책은 없습니다. 그 프레임에 한 번 걸린 사람은 빠져나가기 어렵습니다. 결국엔 제 풀에 지쳐 교회를 떠나게 되죠. 제 주변에도 많습니다. 신천지라는 덫 이외에도 종북, 동성애,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자유주의 등 모두가 교회에서 즐겨 사용하는 프레임입니다. 이들 모두 교회가 걸러내고 척결해야 할 악입니다. 나열하자면 더 많을 겁니다. 그 모두를 걸러낸 평화로운 교회가 솔직히 저는 끔찍합니다. 그렇게 남은 순수한 교회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요.

 

저는 앞서 말한 모든 읽기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종말에 이런 일이 있을 테니 미연에 방지하라’고도, 아니면 ‘뜨거움을 줄 테니 받으라’고도 말씀하지 않았으니까요. 예수님은 본인을 불이라고, 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불은 타올라야 하고, 누군가는 찔려야 합니다. 누가 타야하고, 누가 찔려야 할까요. 사실 본문 뜻을 파악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제 식대로 말한다면 예수님은 문제를 일으키러 왔습니다. 그는 불과 칼로 왔습니다. 그는 사건으로 이 땅에 왔습니다. 그는 그 자체로 문제 덩어리입니다. 우리가 복음이라고 일컫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시비를 겁니다. 우리의 어떤 것들을 태워 소멸시키고, 우리를 찌릅니다. 그러기 싫으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좋습니다. 늘 하던 말이고 자주 듣던 말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52절과 5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52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불과 분열은 나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 향합니다. 이거 좀 이상합니다. 왜 가족일까요. 알기 쉬운 악과 불의가 지천에 널려있는데 말입니다. 아베가 그렇고 걸핏하면 못된 짓 하는 목사들이 그렇고 권력을 가진 자본가들이 도처에 깔려있습니다. 나와 내 가족은 아닙니다. 그건 건드리면 안 되는 겁니다. 불 지르고 칼 댈 데 널렸는데 왜 하필 가족이냐는 겁니다. 불, 칼, 분열 이런 말들 어차피 싫어하는 인간, 도시, 나라에 갖다 대면 좋을 텐데, 왜 하필 가족인걸까요. 한국과 일본이, 자본가와 노동자가, 자유 한국당과 민주당이 분열할거라고 말하면 처리하기 쉽고 이해하기 좋을 텐데 말입니다. 예수님을 앞세워 일제 불매를 하면 효과만점일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왜 가족을 향할까요. 복음서에는 가족에 대한 말씀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를테면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무시하고,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냐고 하신 말씀이 그렇습니다. 바깥에서 기다리는 가족들 입장에서는 황당한 말씀이죠. 예수님은 가족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시는 걸까요. 또 마가복음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독특한 구절이라 따로 준비를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절에서 30절인데요. 함께 읽겠습니다.

2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30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읽으시면서 혹시 이상한 점을 못 보셨나요. 두 가지가 이상합니다. 첫째로 29절에서는 집과 형제와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자녀와 논밭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히 듣던 대로 복음을 위해 다 버리라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30절은 버린 가족과 소유를 다시 받게 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백배로 말이죠. 다시 받을 거라면 왜 버리라고 한 걸까요.

우선 우리는 ‘백배로 돌려받을 가족’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건 새로운 공동체일겁니다. 그 새로운 공동체에 대해서 구체적인 고민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빨리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이상한 내용은 29절에서 버린 목록과 30절에서 돌려받을 목록이 다르다는 겁니다. 한 번 비교해보십시오. 눈치가 빠른 분은 아셨겠지만 돌려받는 목록에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마가가 실수로 빠트린 걸까요. 아닐 겁니다. 분명히 의도적인 서술입니다. 그들이 돌려받을 새로운 가족에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방식으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간단하게 새로운 가족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혈연이나 족보에 의존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니까요. 새로운 공동체가 기대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깥에서 기다리던 가족을 외면하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자라야 내 어머니고 내 형제라고 말씀하니까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정리해 보겠습니다. 방금 읽은 말씀은, 믿는 자라면 가족이고 뭐고 전부 버리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족에 관한 말씀이죠. 진부하지만 말 그대로 하자면, 새로운 가족 공동체에 대한 말씀입니다. ‘무조건 나 따라’ 이런 말씀도 아니고, ‘무조건 다 버려’ 이런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공동체를 보여주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혈연으로 대표되는 이전의 관습과 권위와 편견을 따르지 않는 공동체입니다. 복음서에서 가족을 버리라는 건, 늘 이전 관습과 권위를 따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지침이죠.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제 읽기가 크게 틀리지 않다면 본문은 계급과 권위로 이루어진 가족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에는 높낮이가 있습니다. 복음은 그거 불에 태워 소멸시키고 그거 찌른다는 겁니다. 삶에 가장 깊숙한 곳인 가족에 은폐되어 있는 권력과 관습에서 그리스도인들 떨어지라는 겁니다. 그리고 새로 만들라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일 테고 감히 말하자면 그게 교회일겁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구조란, 우리의 관계란 어떠해야 할까요. 교회의 예배는 무엇을 드러내야 할까요. 하나님 나라입니다. 부족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는 우리 안에서 권력과 관습이 사라진 평화를 빌어주는 행위이며, 또한 분열을 일으키는 행위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무턱대고 가족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족 해체주의자는 더더구나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그는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며, '보라 네 어머니다.'라고 말씀합니다. 또 어머니에게는 '보십시오. 아들입니다.' 라고 말씀하시죠.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두 사람이 혈연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족이 되게 합니다. 그는 부수는 자가 아니라 새롭게 안으시고 세우는 분입니다.

이것은 이상적이기만 할까요. 함께 살지 않는 한은 불가능한 걸까요. 가족은 끝까지 가족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결국 남 인걸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빵과 잔을 함께 나누는 이 식탁 앞에서 고민해야 할 몫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걸음이 느린 두 어린 생명과 어떻게 함께 걸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고, 좋은 신념으로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함께 식사하면 좋을지 더불어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는 가족과 함께 이곳에 참여하는 이들이 있지만, 또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거 잘 안되고 못할 땐, 가끔은 서로에게 불이 되고 칼이 되기도 하는 겁니다. 그렇게 부수고 새로 쌓는 겁니다. 갈등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걸 풀어가고 넘어가는 방식은 다를 수 있는 겁니다. 저는 끝까지 그거 고민할 겁니다. 함께 그거 같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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