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이택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 이택환
  • 승인 2019.08.05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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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누가복음 12:13~21

우리의 삶은 종종 ‘두려움’과 ‘염려’ 사이에 둘러싸인 샌드위치와 같습니다. 요즘 북한 김정은이 연일 미사일을 쏘아대고, 일본 아베가 경제보복을 감행하는 이 상황도 딱 그렇지요. 두려운 미래, 염려스런 현실! 그런데 마침 오늘 누가복음 12장 본문도 이와 유사합니다. 일단 본문 이전 단락인 누가복음 12장 1~12을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두려워하다’입니다. 헬라어로 ‘포베오’, 영어 ‘포비아’의 어원이지요. 7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그런가하면,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단락이 누가복음 12장 22~34인데, 여기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염려하다’입니다. 22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또 25~2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이처럼 오늘 본문은 앞에는 ‘두려움’이, 그리고 뒤에는 ‘염려’가 마치 샌드위치처럼 둘러싸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개의 이야기로 되어 있는데 모두 두려움과 염려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두려움과 염려의 핵심에 탐심이 있다고 보셨습니다.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1. 유산 상속

먼저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그날 수많은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아버지의 유산상속 문제를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선생님, 제 형에게 명하시어 아버지의 유산을 저와 나누도록 해 주십시오!” 율법에 의하면 간단합니다. 형과 동생이 2:1로 나누면 됩니다. 하지만 이 간단한 문제를 그들이 해결하지 못한 것을 보면, 필히 복잡한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자신의 몫을 이미 형에게 빼앗겼거나, 빼앗길 처지에 놓여있는 것 같습니다. 그로서는 심히 두렵고 염려스런 상황이지요.

21세기 한국에도 비슷한, 아니 더 심각한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몇 년 전 의정부에서 30대 남성이 집에 불을 지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벌어서 부모를 봉양한 것은 동생 자신인데, 그의 부모가 정작 부모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형에게, 단지 형이라는 이유로 부모의 전 재산인 아파트를 물려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이 온 가족이 모인 날,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처럼 형제간에 종종 큰 비극과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유산 상속문제, 예수님은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을까요?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예수님은 상속 문제로 형제간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을 거절하셨습니다. 당시 랍비들이 그렇게 했듯이, 예수님 또한 율법을 따라 가장 공정한 판결을 충분히 내리실 수 있으셨습니다. 이 사안의 핵심이 정의의 문제라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안을 정의보다 탐심의 문제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판결대신 모든 탐심을 물리칠 것을 그들에게 명하셨습니다(15절), 형제에게 탐심이 가득하면, 어떤 정의로운 판결이 내려진다 하더라도 그들이 승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탐심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15절에서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부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잘 알듯이 탐심은 우상숭배예요(골 3:5). 그리고 모든 현실 속의 우상숭배는 곧 부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믿는 맘몬숭배입니다. 그런데 그 맘몬이 우리를 통제하는 방법이 바로 두려움과 염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그 두려움과 염려의 샌드위치에 갇혀서, 맘몬의 좋은 먹이 감이 되곤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탐심이라는 맘몬숭배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촉구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반대의 길을 택합니다. 탐심이 어디에서 오는가? 부의 결핍에서 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저 소유가 넉넉지 못한 데서 나오는 부작용이 탐심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관점에서 앞의 의정부 화재사건을 보면, 만약 동생의 소유가 넉넉했더라면, 형이 부모님으로부터 아파트 한 채가 아니라, 두세 채를 받아도 절대로 집에 불 지를 리가 없다는 논리가 나올 법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시사인 (2013년 07월 09일)

물론 소유가 넉넉한 사람들은 직접 불을 지른다거나 주먹다짐 같은 것은 잘 하지 않겠지요. 대신 변호사를 불러 소송을 제기합니다. 유명한 예가 2012년,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차명 상속재산을 두고, 장남(이맹희)과 삼남(이건희) 사이에 벌인 소송 사건입니다. 1심, 2심 모두 삼남이 이겼는데(장남이 3심에서도 질 것 같아 포기) 당시 원고 측 1심 청구금액이 무려 4조 849억 원이나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소유가 넉넉한 재벌에게도 탐심이 있다는 것, 아니 오히려 그들의 탐심이 더 크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준 것이지요.

 

2. 어리석은 부자

이제 예수님은 두 번째 이야기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16-21). 한 부자가 있는데, 그의 밭에는 소출이 풍성합니다. 그 결과 곳간에 곡식이 얼마나 많은지, 쌓아둘 곳이 없습니다. 이렇게 소유가 넉넉하면, 굳이 탐심 따위를 부릴 필요가 없을 법한데, 그렇지 않아요. 탐심이 소유의 결핍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소유에 비례해서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유산이 있으니까 형제가 상속 다툼을 하는 것이지, 아무 것도 없으면 그런 다툼도 없습니다. 탐심이 많으면 두려움도 많고 염려도 많은 법이지요. 이 부자는 쌓아 둔 곡식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날마다 두려워하고, 쌓아 둘 곳 없는 곡식을 어떻게 안전하게 쌓아 둘 것인가, 매일 염려합니다.

이 비유에 주로 나오는 단어가 ‘풍성’, ‘부요’, ‘더 크게’, ‘많이’, ‘쌓아두다’ 등입니다. 모두 소유의 넉넉함과 관련된 단어들이지요.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속에는 동시에 두려움과 염려 역시 풍성하고, 부요하고, 더 크고, 더 많이, 쌓여있습니다. 이 부자는 자신의 두려움과 염려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곳간을 헐고. 새 곳간을 더 크게 지어서, 자신의 모든 곡식과 물건(아가도스. 좋은 것)들을 가득 쌓아 둘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계획을 성취해 내지요. 이제 그에게는 그의 즐거운 독백처럼, 그저 편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만 남은 것으로 보였습니다(18-19절).

90년대 베스트셀러였던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는 3-40대에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이 돈을 벌게 만든 후, 50대부터는 놀고먹고 세계일주하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사실 퇴직연금, 국민연금도 같은 개념입니다. 젊어서 열심히 돈을 벌어 연금을 내고, 늙어서는 일 하지 않아도 그 연금으로 편히 먹고 살자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오늘 이 부자를 특별히 악하다고 정죄할 게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영어로 fool, 바보입니다. 그의 생명이 자신이 소유한 많은 부에 달려있다고 그가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돈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논리지요.

한때는 그가 맞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조금만 넘쳐도 쌓아 둘 곳이 없는 기존의 작은 곳간을 헐고, 이제 아무리 쌓고 쌓아도 그 끝이 없는 더 크고 더 완벽한 곳간을 지었을 때, 그의 신학이 옳다는 것을 입증한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도로 찾는다”(아파이테오)는 것은, 주인이 맡긴 것을 다시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부자는 독백 중에 I와 my라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합니다. “내가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그 때는 모든 것이 다 그의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그의 생명조차 실은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찾아가신 하나님의 것이었지요. 따라서 살아서 그가 소유한 모든 것들도 다 그의 것이 아니라, 참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받아 잠시 동안 사용했던 점유물들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두려움과 염려는 탐심이 제공하는 데일리 서비스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우리의 불행이 소유의 넉넉지 않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슬금슬금 탐심을 합리화합니다. 그래서 우애마저 팔아먹고, 형제간에도 유산 싸움을 하고 소송을 벌이지요. 교회의 분쟁도 대부분 같은 이유 때문에 일어나고, 그 절정에 명성교회 세습이 있습니다. 두려움과 염려는 탐심이 제공하는 데일리 서비스지요. 오늘 말씀은 우리가 이런 탐심 시스템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촉구합니다. 부지중에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도로 찾으시기 전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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