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 누구의 벗입니까?
[장일] 누구의 벗입니까?
  • 장일
  • 승인 2019.08.02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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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 목사의 야고보서 강해 12 - 야고보서 4:1~5

서 론

야고보서 강해 열두 번째 시간입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우리 속담에도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죠? 무슨 뜻입니까? 가치나 생각이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린다는 뜻입니다. 지난 상반기 연예계를 뜨겁게 달군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정준영 단톡방’ 사건입니다. 당시 인기가수였던 정준영 씨가 지인들과 만든 카카오톡 단체방에 불법 촬영 영상을 유포한 것입니다. 확인된 피해자만 10명이 넘었습니다. 수사가 진행되자 단체방 맴버들의 정체가 하나둘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정준영 씨의 동료가수 곧 절친들이었습니다. 국민들이 분노했던 이유는 이것입니다. 그들의 카톡방에는 공인으로 지켜야 할 윤리의식이나 도덕성이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명백히 불법인 성관계 영상, 몰래카메라 등을 유포하면서도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속함만을 드러냈습니다. 결국 그들은 경찰조사를 통해 법적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공자는 “익자삼우(益者三友)요 손자삼우(損者三友)”라 했습니다. 유익한 벗이 세 종류요, 해로운 벗도 세 종류라는 의미입니다. 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 견문이 풍부한 사람을 사귀면 유익이 됩니다. 이와 반대로 겉치레만 하는 사람, 부드러운 척하며 아첨하는 사람,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사람은 어울릴수록 해가 됩니다. 결국 벗을 사귐에 있어 유익한 사람과 해로운 사람을 구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또한 좋은 벗은 자주 만나고, 나쁜 벗은 가능한 피하라는 교훈입니다. ‘누구의 벗이 될 것인가?’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동시에 야고보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우리가 벗으로 삼을 수 있는 대상은 이 두 가지뿐입니다. 여기서 누구를 벗으로 삼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과 영원이 결정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벗이 되게 만드는 실체를 분명히 깨닫기를 권면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벗으로 살고자 하는 기대와 소망을 발견하기를 축복합니다.

 

1. 싸우는 그리스도인

누구의 벗입니까? 첫 번째는, ‘싸우는 그리스도인’입니다.

1 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2a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지난 본문에서 야고보는 하늘의 지혜를 설명하며 평화를 강조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시 상반된 주제로 돌아옵니다. 야고보는 공동체 안에 있는 싸움과 분쟁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1절을 보세요. “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야고보가 말하는 싸움과 분쟁의 근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육신의 욕심’에 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이를 ‘정욕’으로 번역했습니다. 원어로 보면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의미합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더 큰 쾌락을 누리고자 탐하는 순간 무엇이 일어납니까? 싸움과 분쟁이 일어납니다.

왜 싸움과 분쟁이 일어날까요? 2절 상반절이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 혼자서 싸움하는 사람 보셨나요? 싸움은 반드시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일어납니다. 나의 욕심과 다른 사람의 욕심이 부딪히는 것이죠. 또한 인간의 욕심은 잔인하고 무섭습니다. 뭔가를 얻지 못했을 때 무슨 일까지 일어납니까? 가족 간에도 살인이 일어납니다. 지금도 뉴스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많이 접하고 있습니까? 물론 흩어진 교회 안에 실제로 살인이 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는 지금 욕심의 극단적 결과가 살인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싸우고 분쟁하는 교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 기사를 봤는데 올해 상반기 동안 발생한 교회 분쟁 가운데 핵심 문제가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재정문제입니다. 32 퍼센트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습니다. 참 부끄러운 현실은 이러한 분쟁의 중심에 목회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축구선수 한 사람이 받는 연봉이 150억입니다. 아니, 천억 가까이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에게 연봉 5억을 주는 것을 굉장히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일하는 게 얼만데 치사스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래서 복을 못 받는 거야”

서울성락교회 신년예배에서 나온 발언입니다. 물론 이 교회는 이단으로 정죄된 교회지만 이러한 행태는 정통교회 안에서도 큰 차이가 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재정횡령으로 구속된 한 순복음교회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교단과 신학교에서 30억 원을 횡령했습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가 도박중독자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주일날까지 도박장에서 살다시피 했으며 강원랜드에서 77억, 호텔카지노에서 93억을 썼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얼마나 참담한 일입니까? 이러한 막장드라마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현실에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강단에서 인간의 욕심과 욕망에 불을 지피는 메시지가 여전히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게 뭐에요? 자기부인은 하루에도 수십 번 내 안에 꿈틀대는 욕심과 욕망을 부인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나라 가치를 적극 따르는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인간의 욕심은 쾌락과 만족을 꿈꾸지만 결국 남는 것은 황폐함 뿐입니다. 우리의 발 딛는 모든 곳에 싸움과 분쟁이 아닌 하나님의 평화가 드러나기를 축복합니다.

 

2. 응답되지 않는 기도 누구의 벗입니까?

두 번째는, ‘응답되지 않는 기도’입니다.

2b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야고보는 기도에 대한 권면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주제가 그리 유쾌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응답되지 않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서점에 ‘응답받는 기도’를 한번 검색해보세요. 수많은 책들이 쏟아집니다. 이처럼 응답받는 기도는 늘 뜨거운 관심을 받습니다. 반면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누구 하나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일까요? 기도시간이 짧거나 간절히 기도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야고보는 그 이유를 의외로 단순하게 설명합니다. 첫째, 애초에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저는 기도했는데 도무지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속으로 이렇게 반문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성도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단지 그 방법이 우리의 생각과는 많이 다를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쾌락을 위해 곧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가 뭘까요? 다른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철저한 자기중심적 기도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유익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기도입니다. 

한 권사님이 오늘도 새벽에 나와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여 아버지 이번에 강남에 산 아파트 아시죠? 그 아파트가 오르면 제가 감사헌금으로 오백만원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이 기도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일까요? 아니면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일까요? ‘오백만원을 헌금하겠습니다’ 언뜻 보면 매우 신실한 기도처럼 들립니다. 참고로 오백만원이면 저희 교회 한 달 헌금수입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큰 액수의 헌금보다 어디에 목적이 있습니까? 강남 아파트에 있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아파트 값이 오르면 적게 잡아도 수억 원의 시세차익이 생깁니다. 거기에 비하면 오백만원은 뭐 수수료나 마찬가지죠.

잠언 28장 9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귀를 돌리고 율법을 듣지 않으면, 그의 기도마저도 역겹게 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말씀에 중심을 두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에 역겹다는 말입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중심이 하나님을 떠나있으면 우리는 반드시 자기중심적인 기도밖에는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목적 뿐 아니라 방법까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해야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결국 나의 정욕을 채우는 자기중심적 기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입니까?

 

3. 질투하시는 하나님

누구의 벗입니까? 마지막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4 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그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라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흩어진 교회를 향한 분명한 경고를 던집니다. “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첫 문장부터 분위기가 심각합니다. 그러나 흩어진 교회 안에 실제로 간음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가 지금 경고하는 것은 ‘영적 간음’입니다. 구약 선지서를 보면 호세아가 있습니다. 호세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으라 하십니다. 호세아는 순종했지만 고멜의 반복되는 외도와 배신으로 고통을 겪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매우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세상과 벗함은 하나님을 등지는 일이며,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될 것이다.” 세상을 따르는 것, 세상을 동경하는 것, 세상을 사랑하는 것. 결국 이 모든 일이 영적 간음에 해당됩니다. 또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됩니다. 5절에 “우리 안에 성령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 이 말씀 역시 호세아의 메시지를 떠오르게 합니다. 집 나간 아내를 향해 질투하고 분노하며 다시 찾아오기 위해 속이 타들어가는 남편의 마음입니다. 그렇기에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벗이 되는 일은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배반입니다.

강준만, 바벨탑 공화국, 인물과사상사, 2019년

‘바벨탑 공화국’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바벨탑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만 신앙서적은 아닙니다. 알다시피 바벨탑은 인간의 욕망을 상징합니다. 저자는 한국사회가 바벨탑의 욕망으로 가득하다고 진단합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일등부터 꼴찌까지 서열이 매겨집니다. 사람을 보는 다양한 관점은 없으며 오직 한 가지 능력으로 평가받습니다. 결국 그 능력을 얻기 위해 끝없이 위로 향하는 시스템에 길들여집니다.

책의 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한사코 모든 사람을 일렬종대로 세워 서열을 메기고 그 격차를 크게 벌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다. 삶의 만족과 보람은 나의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남과의 사회경제적 비교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표를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그걸로 끝이 아니다. 나보다 더 잘 나가는 사람은 끝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속 전시 상태로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이 시스템에 중독된 탓에 그것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여러분 구약의 역사를 한번 보세요.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왜 가나안에 정착하자마자 우상숭배에 빠졌을까요? 간단해요. 하나님을 배반할 만큼 우상이 매력적이었어요. 가나안의 문화는 찬란했고 그 중심에 바알숭배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바알이 무슨 신이에요? 풍요와 다산의 신입니다. 가나안에서 생존하려면 결코 바알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으로 살아야했습니다. 그러나 바알이 제공하는 권력과 재물 그리고 풍요 앞에 그들은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손이 아닌 바알의 손을 잡은 것이죠. 지금 편지를 받고 있는 흩어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을 세상과 벗이 되게 만든 주된 요인도 돈에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맘몬 즉 돈의 신이 여전히 세상을 다스리며 이미 교회 안에도 상당부분 침투했습니다. 분명 돈은 물질적인 풍요와 쾌락을 보장해줍니다. 그러나 행복한 삶까지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행복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진리를 날마다 마음에 새겨야합니다. 또한 말씀을 통해 특별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배워가야 합니다.

 

결 론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야고보서 강해 열두 번째 시간으로 ‘누구의 벗입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세상과 하나님, 우리가 벗으로 삼을 수 있는 대상은 이 두 가지뿐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정욕이 싸움과 분쟁을 일으킵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질투의 근원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재 우리는 누구의 손을 잡고 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 혹시 두 손 모두를 잡으려고 하십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이 멸망했던 원인은 혼합주의 즉 하나님과 세상을 모두 잡으려고 했던 모습에 있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벗입니까?’ 이제 우리가 대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이 질문을 한 주간 치열하게 묵상하시기를 권면합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저는 주님의 벗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끝으로 이 고백 위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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