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만희] 친구를 위해 친구의 문을 두드리는 친구
[박만희] 친구를 위해 친구의 문을 두드리는 친구
  • 박만희
  • 승인 2019.08.03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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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희 전도사의설교 - 누가복음 11장 1~13절
Andrea Mantegna  (1431–1506), The Agony in the Garden of Gethsemane(1458~1460)
Andrea Mantegna (1431–1506), The Agony in the Garden of Gethsemane(1458~1460)

좋으신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모든 삶에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함께.걷는.교회.]가 예배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바라는 일이 있습니다. 틈틈이 말씀 드리긴 했었는데요, 또 말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예배 안에 있는 순서 하나하나를 우리 모두가 꾹꾹 눌러 밟아가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설교와 성찬을 감싸고 있는 여러 순서들, 찬양과 교독, 기도와 봉독 그리고 보냄 등의 순서를 형식으로만 삼거나 죽은 시간으로 만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가끔은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낯선 방식의 예배를 드리는 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사람들이 편안해하는 전통적인 예배(?)도 있고, 그게 싫다면 찬양과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예배도 있으니까요. 저 역시도 그 두 가지 예배형식에 더 익숙합니다. 근데 둘 다 마다하고 듣도 보도 못한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괜한 모험을 한 건지도 모릅니다. 이제라도 바꿔야 할까요.

예배에 관해 이런 저런 고민을 하던 때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예배를 ‘좋았다’ 혹은 ‘별로였다’고 가름할 때, 그 기준이 뭔지를 생각해 본 겁니다. 당시 제 판단에 첫 번째 기준은 설교였습니다. 설교는 대부분 예배의 정중앙에 있고 가장 긴 시간을 차지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게 당연하고, 사람들에게도 예배의 핵심으로 여겨집니다. 반면 설교를 둘러싼 순서들은 상대적으로 찬밥 취급을 받죠. 성가대나 특송 정도가 조금 특별한 대우를 받지만 그 외의 순서는 쩌리 취급을 받습니다.

한편, 좋은 설교란 뭘까요. 여기서 제가 고민하는 ‘설교론’을 전부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조금 단순하게, 또 조금 비판적으로 보자면, 사람들에게 좋은 설교와 그렇지 못한 설교를 판가름하는 하는 기준은, ‘얼마나 은혜로운지’, 또 ‘얼마나 재미있는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은혜로운 설교가, 할 수 있다면 거기에 재미까지 더하는 게 저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재능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부럽습니다. 다만, 설교자의 실력에 따라 예배의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루한(?) 형식을 싹 다 지워버린 찬양예배도 사실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좋다’고 느끼는 대부분의 찬양은 다양한 악기와 연주 실력을 바탕으로 합니다. 근데 대부분의 중소형 교회는 그렇게 못합니다. 자원도 자본도 없으니까요. 유명한 찬양집회 갔을 때는 너무 은혜로웠는데, 우리는 안 되는 겁니다. 그게 자기 탓이 아닌데 모르는 거죠. 그들이 지나치게 잘하는 건데 말입니다. 보통의 중소형 교회는 찬양 인도자도 좀 부실하고, 악기 팀도 들쑥날쑥 합니다. 앉아있는 사람들도 집회에서 만큼 열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포기하지 않죠. 사람들 더 갈구고, 우리 마음도 더 못살게 굽니다. 그러다 탈이 나기도 하죠. 그게 다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도 온갖 거 다해보고 싶습니다. 탬버린, 캐스터네츠, 트라이앵글 등 한 사람에 하나씩 악기 들고 예배하는 것도 좋겠다 싶습니다. 만약 우리가 찬양 예배를 한다면 그렇게 해보고 싶습니다. 사람들 초청할 때, 소리 나는 거 아무거나 들고 오라고 하는 겁니다. 다만, 찬양 인도자의 실력에 따라, 찬양 팀이 얼마나 빵빵한지에 따라 예배가 좌우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도 괜찮다면 예배에도, 은혜에도 빈부격차가 생길 테니까요.

긴 얘기가 필요하지만 짧게 하겠습니다. 전 설교자나 찬양팀이 예배를 좌지우지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예배라는 세계에 참여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빈부차가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하지 않아도 이미 거기에 있는 세계 말입니다. 성찬에는 빈부가 없습니다. 말씀을 함께 읽는 일에는 실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함께 노래하고 같은 목소리로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한 믿음에 참여합니다. 물론 설교자는 최선을 다해 그 시간을 준비해야 한다고 저는 믿지만, 그 결과물이 예배를 들었다 놨다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가 예배의 핵심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씀과 성찬을 둘러싼 노래와 기도와 읽기는 부가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우리의 신앙행위이고 예배입니다.

예배 순서 하나하나를 꾸욱 지르밟아 예배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려다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섬세하게 나눠야 할 얘기를 너무 거칠게 다룬 느낌인데요. 보충이 필요하시거나, 다른 의견이 있으시다면 식사 후에 더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꾹꾹 눌러가며 예배하기를 바라는 순서에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함께 고백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주기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부디 이 시간이 우리가 함께 고백하는 그 기도를 조금은 더 두텁고 의미 있게 하는데 보탬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말씀을 나눕니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단 하나의 기도를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주기도’를 선택하겠습니다. 조금 과장한다면 ‘주기도 말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가 없다’고까지 말해서 괜한 문제를 일으켜보고 습니다.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은 식사 때마다 감사기도 대신 주기도를 고백한다고 합니다. 주기도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바탕이 되는 간구라고 믿기 때문일 겁니다. 저도 잠깐 따라서 해봤는데요. 얼마 못가 포기했습니다. 밥을 앞에 둔 채 하는 주기도는 생각보다 길었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를 본격적으로 말하기 전에, ‘기도’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겁니다. ‘기도라는 게 대체 뭔가?’에서부터 시작해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기도에도 옳고 그름이 있는지, 꼭 들어가야 할 요소는 없는지, [함께.걷는.]은 침묵기도와 주기도를 강조하는 것 같은데 기도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등 말입니다. 흔히들 기도를 그리스도인만의 특정한 종교행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종교는 없습니다. 불교나, 이슬람, 힌두교 등 모든 종교가 각자의 신에게 무언가를 간절히 빕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라도 때로는 알 수 없는 존재를 향해 무언가를 빌곤 합니다. 제 맘대로 정의하자면, 기도는 신에게 무언가를 비는 행위입니다. 세계 바깥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우리 삶에 개입해주기를 바라는 행동이죠.

기도는 우리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신에게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자체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기도 행위 자체만으로 우리를 괜찮은 그리스도인으로 분류해 낼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하는 대상이 다르지 않느냐’고요. ‘우리는 진짜 신에게, 모든 신들 위에 가장 뛰어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거 아니냐’고요. 만약 그렇다면 기도는 ‘파워게임’이 됩니다. 응답률이 좋은 종교가 진짜 신을 보유한 집단이 됩니다. 통계를 내면 될까요. 응답률이 몇 프로인지를 확인하고, 어떻게든 우리가 더 세다는 걸 증명해서 우리 밑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겁니다. 어리석은 생각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주변에 전쟁하던 나라들은 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각자가 믿는 신을 필두로 하고, 붙어 싸워서 진 놈이 이긴 놈 밑으로, 또 그 나라가 섬기는 신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게 그 당시의 전쟁이었죠.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신에게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그 행위 자체가, 예수를 따라가려는 제자들의 신앙을 보증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쩌자는 걸까요. 본문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하였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1절은 주기도문이 탄생한 배경입니다. 별 내용이 없는 것 같지만 생각보다 중요한 힌트를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1절을 따라 장면을 상상해 봅시다. 예수님은 어딘가에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자주 접하던 모습이죠. 제자들도 예수님이 기도하러 가신다는 걸 알았던 것 같습니다. 무슨 할 말이 있었던 걸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기도를 마치고 예수님이 오시자, 서로 눈치를 보던 제자 들 중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 말합니다. ‘요한이 제자들에게 한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말입니다.

그 말을 생각해보면 기도를 듣고 누구의 제자인지를 구분할 수 있었던 겁니다. 기도 다 하는 건데, 구분되는 내용이 있었던 겁니다. 어떤 식사 자리에서 누군가 기도를 하면 내용을 듣거나 모습을 보고 ‘아, 저들은 요한의 제자구나. 아, 저들은 바리새파 랍비들이구나. 사두개파 출신이구나.’ 하는 걸 알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신들에게도 ‘예수의 제자’라는 게 드러나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겁니다. 그거 들으면 ‘어, 저 사람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그런 기도를 알려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가르쳐 주신 것이 오늘 우리가 ‘주기도문’이라고 부르는 기도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너희는 이방 사람처럼 기도하지 말라’며, 가르쳐 주신 기도죠. 이제 사람들은 기도 내용을 듣고 아는 겁니다. ‘아, 저들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구나.’라고요.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는 그런 간구입니다. 저 인간들이 대체 뭘 믿는 건지 모르겠는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대체 하나님을 어떻게 믿으면 그런 것만 골라 구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 그런 기도도 아닙니다. 우리가 간절히 구하는 내용을 들으면, ‘저들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기도입니다. 내 욕망이 이 땅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 얻은, 구린 냄새가 진동하고 타인의 눈물과 피가 묻은 재물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나는 눈처럼 깨끗하지만 저들은 더럽다고 탓하며, 그러니 저들을 쓸어달라고 말하는 혐오로 가득한 기도가 아니라, 빚에 억눌린 사람의 삶을 구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독점하여 그 이름을 레드카펫처럼 깔고 자신의 명예를 높이려는 이들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따라 살려고 애쓰며 그의 이름이 높임받기를 원하는 이들의 기도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그 기도가, 그 바람과 간구가, 그 소망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 선언’한다는 겁니다. 이처럼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다시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배 때 하는 기도입니다.

사실, 본문에 나오는 주기도는 우리가 예배 때 하는 주기도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훨씬 짧죠. 우리가 하는 주기도는 마태복음에 있습니다. 두 기도의 길이가 왜 다른지, 주기도에 있는 문장 하나하나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오늘 전부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늘은 본문 후반부에 있는 내용이 앞에 있는 주기도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이 시간을 마치려고 합니다.

 

5절에서 예수님은 느닷없는 이야기 하나를 시작합니다. 13절까지를 다 읽어보면 분명히 기도에 관한 내용이기는 한데, 제가 이제까지 애써서 말한 내용이 전부 무색해지는 것 같습니다. 온통 간절함, 끈질김에 대한 얘기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5절부터 8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6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할 때에, 7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지금 읽은 이야기 뒤에는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설교자들이 ‘간절한 기도’를 말할 때, 가장 잘 소환하는 구절이죠. 또 바로 뒤에는 ‘아버지께서 나쁜 걸 줄 리가 없다’는 내용이 뒤따릅니다. 난감합니다. 대체 어쩌자는 걸까요. 좋은 거 끈덕지게 구하면 다 주실 거라는 내용으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은 이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냥 받아들일까요. 앞에 있는 주기도문과는 ‘기도’라는 주제 말고는 공통분모가 없는 것 같은데, 아니 전혀 상반된 내용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 ‘간절하고 끈질기게 문을 두드리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저는 예수님이 드신 비유에 힌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비유 하나를 들어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밤늦게 문을 두드리는 친구의 비유죠. 여기에는 여러 친구가 등장합니다. 여정 중에 굶주리고 지쳐서 쓰러져 가는 친구 1, 그를 위해 밤늦게 애타게 문을 두드리는 친구 2, 집에서 가족과 잠을 자던 친구 3. 느닷없지만 혹시 '여행’이라는 말을 보고 떠오르는 게 없으신지요.

지난 2주 동안, 아니 파송 받은 제자들까지 넣는다면 지난 3주 동안 우리는 여정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행 중에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우려고 애쓰는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난주엔 여정 중인 예수님을 대접하려는 마르다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여정 중에 굶주려 지친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 다른 친구의 문을 애타게 두드리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본문 역시 10장과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10장에서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누가 여정 중에 강도만난 자를 도우려고 발을 동동 굴러가며 애쓸 것이며, 누가 십자가를 향해 여정중인 그리스도를 대접할 것인가. 누가 죽음을 향해 길을 나선 예수의 말을 들을지에 대해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오늘 본문도 그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누가 여정에 지쳐버린 친구에게 빵 세 덩이를 주기 위해 간절한 심정으로 문을 두드릴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말입니다. 대체 누가, 왜, 어떤 심정으로 구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리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말입니다.

어쩌면 주기도는 애쓰는 사마리아인과 대접하려는 마르다의 간절함이 담긴 기도가 아닐까요. 친구를 위해, 친구의 문을 두드리는 간절함이 담긴 기도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이야기는 여전히 묘합니다. 도움을 구하는 대상이 ‘잠을 자는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무시는 하나님을 깨우는 간절한 기도’로 이 내용을 읽는 수도 있습니다. ‘응답하라 하나님’으로 읽는 일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읽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양쪽 친구 사이에 선 친구가 한 일은 철야기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문을 두드리는 일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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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가 두드려야 할 문은 서로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서로가 끈질기게 굴어야 할 대상인지도 모릅니다. 본문은 어쩌면, 여정 중에 지쳐 쓰러져가는 친구를 위해, 다른 친구의 문을 애타는 마음으로 두드리는 일이 기도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벗을 위해 애타고 간절한 마음으로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친구 때문이라도, 잠을 자는 친구에게 하나님의 영이 부어질 거라고 본문은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과 누군가의 문을 끝없이, 성실하게 두드리는 일이 하나님을 향한 간구이며, 동시에 주기도를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라고 본문은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그림에는 문이 하나 있습니다. 예쁜 문이죠. 그 문은 어쩌면 우리 자신의 것인지도 모릅니다. 때로 우리는 울며 애타는 심정으로 이 문을 두드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 문 안에 있기도 할 겁니다. 어쩌면 우리를 포함한 교회가 문 안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밤늦은 시간에 용기를 내어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에게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문 밖에 서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죠. “친구야. 지친 벗이 우리 집에 왔어. 세월호로, 옥바라지로, 굴뚝으로, 성소수자로, 혐오와 차별로 지칠 대로 지쳐버린 벗이 나에게 왔어. 그러니 문을 열고 떡 세 덩이만 내어주지 않을래? 그만큼의 자리만 내어주지 않을래?”라고 말입니다.

본문은 그 두드림을 교회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깜깜하고 어둡지만, 우리에게 빵이 부족하다면 친구를 찾아가보라고 말합니다. 애타는 심정으로, 다급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서 두드리라고 말합니다. 울어야 한다면 울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친구를 위해 친구의 문을 두드리는 친구가 되라는 겁니다. 문이 열리고 잠에서 일어난 친구의 얼굴이 보이기를, 눈을 비비며 떡 세 덩이를 내어주는 친구를 기대하라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기도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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