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이택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 이택환
  • 승인 2019.08.0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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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누가복음 11:1~4
Paolo VERONESE(1528~88), Christ in the Garden of Gethsemane(1583-84)

누가복음은 기도의 복음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도/간구”라는 말이 마태복음 17번, 마가복음 12번, 요한복음에는 아예 없는데, 누가복음에는 47번이나 나옵니다. 누가복음에는 특별히 예수님이 기도의 주님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후, 기도하셨다는 사실이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지요(눅 3:21). 또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치셨을 때, 사람들이 몰려오자, 예수님이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셨는데, 오직 누가복음에만 그 때 주님이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눅 5:16). 마찬가지로 누가복음만 예수님이 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 열두 제자를 선택하셨다는 말씀을 전합니다(눅 6:12).

오늘 본문에서도 마태복음과는 달리 예수님이 한 곳에서 기도하시를 마치시자, 한 제자가 예수님께 나아가 “주여,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시옵소서”라고 요청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입니다(누가복음 버전).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면에서 예수님을 닮아야 하지만, 기도 역시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바리새인처럼 외식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 또 이방인처럼 중언부언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바리새인인지, 이방인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인데, 다시 말해 기도는 그가 곧 누구인가, 그리고 그의 스승이 누구인가를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과연 주기도문은 어떤 기도일까요?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의 특징은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계 설정이 잘못되면, 기도 역시 잘못되기 쉽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신이 ‘갑’이고 인간이 ‘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이룬다는 점에서, 오히려 인간이 ‘갑’이고 신이 ‘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는 그런 갑/을 관계가 아닙니다. 가장 흡사한 관계가 있다면, 아버지와 자녀 관계지요. 사실 구약성경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보고 있지만, 하나님을 개인적인 아버지로 표현한 것은 예수님이 사실상 처음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아빠로 부르신 예수님의 첫 기도는 뜻밖에도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관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드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미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래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우리가 새삼 거룩하게 해 드릴 것이 없어요. 오히려 날마다 하나님의 거룩을 외치는 사람이, 제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의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여기에 ‘신적 수동태’라고 부르는 특별한 문법이 생략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다음에 “아버지에 의해”(by you)가 생략되었다는 것이지요. 그 주체가 하나님이시기에 이를 신적 수동태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는 주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 당신이십니다. 한편 1세기 유대인의 사고에 의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라는 말에는 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이를 위해 우리가 구약 에스겔 36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에스겔  36:23-28)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온 세상에 흩어진 당신의 백성들을 모아 정결하게 하시며, 그들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규례를 따르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신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그렇게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기도문 처음부터 우리에게 간구하라고 하신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의 도래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의 바른 의미지요. 따라서 그 뒤에 “나라가 임하오시며”,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다는 기도가 이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우리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 이상입니다. 지구상에는 이미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용할 양식이 남아돈다고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굶주립니다. 세상이 정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래 정의는 분배의 정의입니다. 각자에게 돌아갈 몫이 정당하게 돌아가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지요. 특별히 일용할 양식(에피우시온)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양식을 의미하는데, 거기에는 개인차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00년을 먹고도 남을 양식을 쌓아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절대빈곤이 해결되어도, 상대빈곤으로 인해 여전히 그 골이 깊습니다. 우리나라도 1960-70년대 국민소득이 1000달러도 안 되던 시절보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나 되는 오늘날이 더 힘들다고들 하지요. 소위 ‘헬 조선’은 과거 보릿고개 시절이 아닌, 2019년을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국민소득이 지금보다 더 올라가 10만 달러 쯤 되면 과연 ‘파라다이스 조선’이 될까요? 분배의 정의가 이뤄지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헬 오브 헬 조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James Tissot, 주의 기도(Le Pater Noster)
James Tissot(1836~1902), 주의 기도(Le Pater Noster, 1886~1894)

주기도문은 이 모든 것이 불의, 즉 죄와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다(4절).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기도할 것을 명하십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는 방법은 죄를 찾아내서 쳐 부수 것이 아니라,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데 있습니다. 용서만이 죄를 없앨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성경이 말하는 용서(아피에미)는 종종 빚을 탕감(discharging debt)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구약에는 그런 개념이 희년사상에 잘 나타나 있지요. 우리가 잘 알듯이 해방과 자유의 해인 희년에는 죄 용서와 함께 모든 부채가 탕감됩니다(신 15:1-2). 희년의 성취로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신 예수님 또한 용서를 가르치실 때, 1만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 받은 이야기를 말씀하셨습니다(마 18:21-35). 그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다시 말해 용서가 빚의 탕감과 관련된 하나님 나라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 임금에게 1만 달란트(약 수 조원에 해당) 빚진 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겐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자신과 아내, 자녀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파는 것뿐입니다. 그래봐야 사막에 물 한 바가지 붓는 격이지요. 이를 불쌍히 여긴 임금이 결국 그의 빚을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그가 그길로 곧장 가서 백 데나리온(약 1천만 원) 빚진 동료가 자신의 빚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멱살을 잡고 호통을 치고는 그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금해버립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임금이 분노하여, 그 종을 다시 잡아들이고, 그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게 했다는 이야기지요. 큰 용서를 받은 자라면 마땅히 작은 용서를 베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가 빚의 탕감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빚을 문자적으로 탕감해 주고, 또 탕감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럴 경우 도덕적 해이가 만연할 것입니다. 그보다 용서에는 경제적으로 깊이 파인 우리 사회의 골을 메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같은 프로 스포츠 선수임에도 누구는 1000억 원의 연봉을 받고 누구는 1000만 원의 연봉을 받는 일이 당연시 됩니다. 연예인들도 비슷하고, 사실 일반 회사 임직원 사이에서도 유사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그런 현상이 더욱 켜져 갑니다. 능력에 따른 차이를 고려해도 정도가 지나칩니다.

하나님 나라를 간구하는 소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사회라면, 이런 극심한 양극화가 결코 정상이라 할 수 없지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산과 골짜기가 생겼다고 해도, 사회경제적 격차를 메우기 위해 그들이 노력할 것입니다. 국가 차원에서는 적절한 세금정책이 필요하겠고, 개인차원에서는 자발적 기부와 다양한 나눔 등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에 보다 가까운 사회는 소위 지니계수가 낮은 사회, 즉 빈부 격차가 적은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를 가로막는 맘몬의 유혹이 있습니다. 부자들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 역시 더 많이 갖고 덜 나누고자 하는 맘몬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런 맘몬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명하셨습니다. 주기도문이 지극히 개인적인 기도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사회경제적 요소가 깊이 들어가 있어요. 우리가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다고 해도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한, 우리는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들보다 백배, 천배, 만 배의 몫을 챙길 수 없습니다. 사실상 일용할 양식 외에는 원래 처음부터 우리 것이 아니지요.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유리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납니다. 좋은 부모로부터 우수한 두뇌와 건강을 물려받습니다. 남달리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기회를 얻은 이들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탕감 받은 ‘1만 달란트’의 빚입니다. 그것이 원래 자기 것이라면 죽을 때도 가지고 가야하는데, 다 두고 가잖아요. 그럼에도 그들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의 멱살을 잡고, 호통 치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보내는 게 현실입니다. 그 전에 그가 왜 그 빚을 갚지 못하는지, 그의 딱한 처지가 무엇인지 알아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아요. 부끄러운 일이지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모임을 폐하는 절차로 주기도문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단지 폐회 기도문이 아니지요. 우리의 일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기도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 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 가운데 임한 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살아갈 수 있기를 다짐하는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용서받은 자가 용서하는 나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용서가 단지 개인의 죄와 관련된 종교적 행위만이 아니라, 부채로 신음하는 이웃의 한숨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사회경제적 행위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오늘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명령을 따라, 우리가 올바르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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