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해방과 자유의 목적, 그들은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곽건용] 해방과 자유의 목적, 그들은 뭘 해야 할지 몰랐다
  • 곽건용
  • 승인 2019.07.2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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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의 설교 - 출애굽기/탈출기 5:1~3, 22~23

자유가 확장된 역사-무엇으로부터의 자유

인간의 역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는가의 역사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타당한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누리던 자유가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리는 쪽으로 발전했고, 또 극히 제한된 범위의 자유만을 누리다가 더 크고 넓은 범위의 자유를 누리는 쪽으로 발전해왔다는 겁니다. 그 동안 인류는 천재지변 같은 자연의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운명이니 팔자니 하는 식으로 누군가가 내 운명을 결정한다는 소박하고 원시적인 믿음에서부터 신의 예정이나 섭리니 간섭이니 하는 신화적인 힘으로부터의 자유, 기아와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신분적 제약으로부터의 자유, 계급적 지배로부터의 자유. 제국주의적 침략과 압제로부터의 자유, 가부장제와 남녀차별 등 다양한 사회적 억압과 불평등으로부터의 자유, 전쟁과 그 위협으로부터의 자유, 이데올로기의 횡포로부터의 자유, 환경오염으로부터의 자유, 국가의 통제로부터의 자유, 물질지상주의로부터의 자유, 이성 최우선주의와 과학주의로부터의 자유 등, 일일이 거론하자면 하루 종일 들어도 모자랄 다양한 굴레로부터 자유를 이뤄왔습니다.

제가 ‘신의 예정이니 간섭이니 섭리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니까 깜짝 놀라면서 ‘하느님을 믿는 목사란 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나? 결국 저 자가 오랫동안 숨겨온 마각을 드러내는구나.’라고 생각할 분이 여러분들 중에는 없겠지요? 하느님의 예정, 간섭, 섭리를 믿는 신앙은 좋은 신앙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그런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 하느님의 예정, 간섭, 섭리 등을 기대하지도 하느님께 강요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좋은 신앙이라고 할 수 있고 반대로 그런 것들을 과도하게 기대하거나 마치 빚쟁이라도 된 듯이 하느님에게 강요한다면 그것은 결코 좋은 신앙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방과 자유를 생각하고 추구할 때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우리가 무엇인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려는 것이 우리를 속박한 바로 그것을 지배하려는 욕구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인류는 오랫동안 자연재해와 같은 자연의 폭력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지금은 과학의 발달로 인해 많은 자연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고 따라서 지금은 거꾸로 자연을 지배하게 됐습니다. 지배와 피지배자가 교체된 겁니다.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심각한 환경문제는 오랫동안 자연의 지배를 받아왔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얻게 되면서 온 문제입니다. 이런 일은 자연과의 관계만 벌어지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서 고생하다가 졸부가 된 사람이 마치 돈이 원수라도 되는 듯 그걸 지배하려 드는 것이나, 학대당한 사람이 윗자리로 올라갔을 때 아랫사람을 더 학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방과 자유가 과거에 자기를 속박했던 것을,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제도든 막론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걸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자리만 바뀌었을 뿐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Exodus: Gods and Kings (2014)

노예들의 비참한 삶

저는 지난 주일에 기독교라는 종교의 조상격인 구약성서의 야훼종교는 히브리인들이 야훼라는 신의 부름을 받아 그들을 해방시키러 이집트로 내려갔던 모세의 인도로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됐다고 얘기했습니다. 곧 기원전 12세기경 당시 최고의 문명을 뽐내던 이집트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 그 기원이라는 겁니다. 많은 종교들이 언데 어디서 누구에 의해 시작됐는지 기원이 불분명합니다. 그래서 대개는 신들의 세계에서 벌어진 이러저러한 사건에서 비롯됐다고 신화적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는 달리 구약성서의 야훼종교는 이집트에서의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시작됐다고 명명백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대개의 종교가 절대자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데 반해서 야훼종교는 당시 권력자들이 믿던 절대적인 존재에게 절대복종하기는커녕 그들의 신들을 거부하고 그들이 확립해놓은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가치관과 신념, 종교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믿고 출발했던 겁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히브리 노예들은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로 나왔습니다. 지긋지긋한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난 겁니다. 흔히 우리는 ‘직장의 노예’니 ‘돈의 노예’ 등으로 노예라는 말을 그 말이 갖고 있는 의미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의미로 사용하는데 실제 노예의 삶은 엄청나게 비참했습니다. 불과 수백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여러 기록과 영상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백 년도 안 된 과거 2차 대전 때 나치가 유태인들을 수용소에서 어떻게 취급했던지 거기서 살아나온 사람들에 의해 알려졌습니다. 수용소에는 화장실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까닭은 화장실 만드는 비용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숙소에서 대소변을 처리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를 개돼지로 여기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랬다는 겁니다. 지금부터 3천 년도 더 오래된 과거에 이집트에서의 히브리 노예들의 생활은 이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히브리인들은 그런 상태에서 해방됐습니다. 말 그대로 짐승 같은 생활에서 해방된 겁니다. 고대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이집트의 노예생활이 대단하게 비참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주장의 근거는 이집트인들이 남겨놓은 역사기록입니다. 그것들을 보면 이집트인들은 노예들을 매우 인간적으로 대했다면서 그것은 심지어 현대의 기준으로 봐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겁니다. 로마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델을 만들어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기록들을 누가 남겼느냐 하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노예들이 남긴 기록일까요, 아니면 그들을 노예로 부렸던 사람들의 것일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후자입니다. 그들이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해서 일어난 일을 기록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아시리아나 바빌론 왕들이 남긴 왕조실록의 전쟁기록을 보면, 이들은 전쟁에 나가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모두다 이겼다고 적었습니다. 이 점은 이집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때가 되면 다 망했습니다. 전쟁 때마다 이겼는데 왜 망했을까요? 그들은 패한 전쟁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겁니다. 기껏해야 비겼다고 주장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고대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 점에서는 사실 성서의 기록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얘기는 오늘 얘기하는 주제와 많이 벗어나므로 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해방된 히브리인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이들이 이집트 땅을 떠나서 홍해 바다를 건너니 그들 앞에는 삭막한 광야가 펼쳐졌습니다. 이집트와 약속의 땅 가나안 사이에는 삭막한 빈들이 있는데 그들은 거기 내던져진 겁니다. 그런데 이 ‘광야’를 실재하기도 했지만 은유적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자유를 말할 때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와 ‘무엇을 위한 자유’ 두 가지를 얘기하지 않습니까. 이들은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됨으로써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는 가지게 됐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자유’는 아직 갖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이 갖게 된 자유가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 이제 자유로워졌으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노예였다가 자유인이 된 집단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지구 어느 곳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존재를 알았을 턱이 없으니 그들은 역사상 노예였다가 집단적으로 자유를 얻었던 최고의 집단이었던 겁니다.

노예로 살다가 해방된 사람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자유인은 자기를 소유하고 지배했던 주인일 겁니다. 그는 주인이 자유인이고 주인처럼 사는 것이 자유인의 삶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섭리인지 그들은 과거에 자기들을 소유하고 지배했던 주인처럼 살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는 ‘자유인’의 모델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모델을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노예의 삶으로부터의 자유는 가졌지만 ‘무엇을 위한 자유’는 이제부터 만들어내야 할 과제였다는 얘기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직선거리로는 불과 며칠이면 갈 수 있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가기 위해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이 지내야 했습니다. 저는 이 기간이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곧 전례가 없는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를 배우기 위해서 직선거리로 걸아가면 며칠이면 갈 수 있는 곳에서 40년 동안 방황했던 겁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 답을 찾았을까요? 저는 그것을 엿볼 수 있는 실마리를 오늘 본문에서 봅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을 풀어달라고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얘기할 때 “광야로 사흘 길을 가서 야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사흘 길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에게 계명을 받은 시내 산까지의 여정일 겁니다. 그렇다면 야훼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거기 가서 짐승을 잡든지 곡식을 볶든지 해서 매일같이 제사만 드리겠다는 얘기일까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에는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에 대한 이들의 고민과 답의 열쇠가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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