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함께 자라 가는 몸 된 교회 
[김동환] 함께 자라 가는 몸 된 교회 
  • 김동환
  • 승인 2019.07.22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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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목사의 설교 - 고린도전서 12:12~26

1. 아가서를 기억하며

지난주에 아가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설교 후에 숭실대학교 이용주 교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좀 기억이 나시나요? 까맣지만 아름다운 아가서의 여인, 스스로 사랑을 찾아 나서는 그녀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그리고 연애적 사랑을 어떤 자세로 찾아 나서야 할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가서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몸’에 관한 건강한 신앙적 이해가 무엇인지도 살짝 나누었어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의 몸과 마음, 모든 걸 사랑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예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정신과 육체, 몸과 마음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고, 몸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려는 태도가 교회 안에 있는 게 문제인 것 같아요.

오늘은 이 ‘몸’의 유비가 신약에서 쓰인 본문을 가지고, 교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안 그래도 ‘몸의 건강’이 요즘 저희 교회의 중요한 기도제목인 것 같아요. 안전 운전하시고, 안전 걷기 하세요! 제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 중에 하나가 저학년 안전인데요, 그래서 2학년 아이들은 학교에서 저를 만나면 안전 샘이라고 불러요. 교과서 내용이 식중독 예방, 자전거 안전히 타기, 학교폭력 예방 등등의 내용입니다. 여러분들은 안전을 가르치는 목사와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로서 특히나 건강하셔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2. 고린도라는 도시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신약 정경에는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 두 개가 정경으로 들어와 있는데요, 이 두 편지를 보면 고린도전서 전후로 또 다른 편지들이 있음을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바울이 많이 대화를 나눈 교회라는 말이고요, 가장 애정 하는 교회, 가장 몸 된 교회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이 선교여행 중에 개척한 교회 중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교회가 고린도 교회예요. 주후 50년쯤부터 1년 반 정도 머물렀는데요, 이 곳 저곳을 돌며 교회를 새롭게 새우는 일을 했던 바울이 예외적으로 한 곳에 오래 머물렀던 교회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반도의 중요한 무역 도시였어요. 그래서 아주 잘 사는 도시였고요, 아폴로디테의 신전이 있어서 성창이 많았다고 해요, 그래서 도덕적으로 문란한 도시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인 같이 산다’는 말은 문란하게 산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동시에 고린도에는 아테네에 버금가는 철학 학교도 있었어요. 그래서 지식적인 자신감도 있었나 봅니다. 그리스 철학, 수사학이 가장 발전한 동네였으니까요. 고린도인 같이 ‘산다’는 표현은 부도덕한 성문화를 의미한다면, 고린도인 같이 ‘말한다’ 고 한다면 뛰어난 철학적 지식과 수사학으로 말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라고 하네요.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종교문화가 발달했고, 철학이 발달하면서, 또 부도덕한 성문화가 있던 도시. 세상의 많은 것들이 모이는 무역의 도시. 바울은 그런 고린도라는 지역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이곳에 더 많은 열정을 쏟아부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특색 있는 공간이었던 만큼, 사람들의 고집도 강했겠지요? 이 곳 저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도시였을 테고, 무역으로 잘 사는 사람은 잘 사는 데로 고집이 있었을 것 같고요, 학식이 뛰어난 사람은 또 지적인 자신감이 있었을 테고요, 여러 종교와 철학에 심취했다가 예수님을 믿고 모여든 아주 컬러풀한 사람들의 모임이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3. 고린도서를 읽을 때 유의해야할 점

그래서 고린도 전후서를 보면 주제가 엄청 다양해요. 누가 누구를 싸웠으면 가능하면 세상 법정에 가지 말고, 교회에서 해결을 해보자, 음행에 관한 훈계에서 결혼에 관한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도 담겨있고요, 고린도전서에 담긴 바울의 메시지는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에요. 7장 2절에 보면 음행의 문제를 피하려면 결혼을 하라고 해요. 절제가 안 되는 사람은 결혼을 하고, 만약에 아직 결혼을 안 했고, 음행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면 바울 자신과 같이 결혼하지 않고 살라고 하거든요. 사람들이 창세기나 계시록은 문자적으로 믿으려고 하면서도, 이런 구절들은 문자적으로 믿으려고 안 해요.

당연히 바울의 개인적인 권면으로 읽으셔야 합니다. 결혼하지 않는 게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적용하시면 안 되고요.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이 그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교회를 시작하게 하는 선교적 열정의 삶을 살다 보니, 자연스레 성도들에게도 이런 메시지를 주게 되었던 같아요. 특히나 고린도에는 다양한 성문제가 많다 보니 좀 더 보수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고요. 어떻게 보면 아가서의 시대, 솔로몬의 시대보다 굉장히 후대의 이야기인데도 더 올드해진 느낌이죠?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당사자들이 선택할 일인데, 음행의 문제에 넘어질 것 같으면 결혼하라니요. 하지만 우리는 시대적 상황과, 바울이 목도했을 여러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읽으면 되겠습니다.

이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고린도 전서 11장에 보면 여자는 교회에 올 때 히잡처럼 머리에 무엇을 쓰고 와야 한다고 해요. 성당에서 쓰는 가벼운 천 정도가 아니라, 이슬람에서 하는 히잡처럼 얼굴 때고 머리를 다 가리는 너울이라고 해요. 이게 당시 유대교의 문화였고요, 그리스 문화에도 종종 있었데요. 일단 예수님 시대의 여성에 대한 인식은 아주 안 좋았어요. 유대인들이 아가서를 제대로 안 읽었던 게 문제인 것 같아요^^; 열심히 암기만 하고, 원하는 구절들을 중심으로 신앙의 내용을 구성했으니까요. 그래서 당시 율법의 세부 조항에는 여자가 밥을 했는데 맛이 없어, 그러면 이혼사유로 합당하다, 이런 엉뚱한 조항도 들어가고 그랬어요. 그만큼 문제가 있었던 거죠?

바울은 최소한의 지킬 것은 지키도록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보수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언어는 남성 중심의 언어 일지 모르겠으나,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 앞에서 서로 가 사랑해야 한다는 메시지예요. 어느 한쪽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고요, 오히려 당시의 남성 중심적 문화에 비교하면 아가서의 남녀평등적 방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죠. 결론적으로 이 11장의 바울의 메시지, 문자적으로 지켜야 할까요? 여성분들 히잡같이 얼굴만 빼고 다 가리고 교회에 오셔야 할까요? 그렇게 하면 아무도 안 오겠죠? 그런데 보수적인?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는 교회는 그렇게 해요. 가톨릭은 조금 수정해서 흰 천을 쓰는 것 같고요. 제가 볼 때는 전혀 의미 없는 건데 말이죠.

우리나라 신약학자 중에 레전드, 전설적인 교수님 중에 김세윤 교수님이라고 계셨어요. 그분이 하필 가장 보수적인 장로회 합동의 교수님이셨어요. 그래서 이 고린도전서를 가르치면서 이런 바울의 이야기들은 메시지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니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자적으로 지키는 게 아니라, 바울의 개인적인 이야기이니까 바울의 본심이 무엇인지 헤아리며 읽자고 했다가 큰 논란에 휩싸였어요. 합동 교단은 여성에게 목사의 자격을 주지 않거든요. 문제가 있는 거죠? 김세윤 교수님은 이 문제로 결국 학교에서 쫓겨났고, 지금은 미국에서 교수로 지내고 있어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교단에 정말 중요한 레전드 신학자들이 있는데, 합동이나 통합이 이상한 일로 떠나는 사건들이 있고요, 그게 정말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4. 고린도교회와 바울

바울이 이렇게 보수적인 태도로, 신중하게 교회의 성도들에게 답변을 해야 했을 만큼, 고린도라는 도시가 문란하고, 문제가 많았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워낙 고집이 강했던지, 바울의 이야기를 그렇게 잘 들은 것 같지는 않아요. 고린도후서 2장 5절에 보면 ‘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전에 편지를 썼다’는 말이 있어요.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 쓰인 편지로 보이는데요, 쉽게 이야기해서 교회와 바울 간에 갈등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것은 고린도 전후서를 찬찬히 읽어보면 알 수 있어요. 성도들이 베드로를 따르고 싶어 하는 그룹, 아볼로를 따르고 싶어 하는 그룹 등등으로 갈라져서 바울의 권위를 무시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바울이 자신이 왜 교회의 일을 하는지, 하나님께 소명을 어떻게 받았는지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오거든요.

제가 목사여서 더 그런 게 눈에 들어오는진 모르겠지만, 마음이 와 닿는 게, 바울은 이중직 일을 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세웠거든요.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바울이 아테네를 떠나서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로마에서 떠나온 한 부부를 만나요.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입니다. 바울은 이분들과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거든요. 당시 군용 천막을 만드는 건 굉장히 전문적인 일이었나 봐요. 바울이 평생 율법을 공부하며 살았을 텐데 언제 또 그런 기술을 배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기 위해 바울도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바울은 교회에 헌신하는 두 부부와 함께 생업을 하며 교회일을 해요.

생업의 일을 하면서 고린도에서 교회를 세웠는데도,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공동체를 만들었는데도, 고린도 전후서를 보면 많은 위기와 갈등들이 교회에 있었다는 게 보여요. 바울은 왜 그렇게 열심히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데 열심을 내었을까요? 평일에는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지내고, 토요일 안식일에는 유대인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주일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인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하고요. 그렇다고 교회가 평화로웠던 건도 아닌데 말이죠.

 

5. 몸된 교회

저는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이 교회에 대한 바울의 생각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몸의 비유 말이에요. 예수님의 사랑에는 어떤 중력과 같은 것이 작동되는 것처럼 말이죠!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이 세상의 모든 현실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어떤 관계망을 만들게 되는 것 같아요. 왜 그럴까요? 오늘 읽은 본문의 앞부분, 12장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 가운데 한 분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피조물이다’고 말하거든요. 신학적으로 말이죠. 바울이 고린도에서 개척을 해서 공동체가 시작한 것은 맞지만, 그 뒤에서 바울의 마음에 열정을 쏟아 넣고, 또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같은 마음을 부어주신 분은 성령님이신 거예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각기 잘난 맛에 여러 가지 은사를 쫓아다녔어요. 자신들의 능력만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고 생각하고 서로 분열하고 갈라서는 일들이 많았거든요. 그런 교회 성들에게 바울은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사람들인데 서로 누가 높고 누가 낮은지 은사 싸움을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하고 있어요. 발이 손보다 존귀한 게 아니죠, 귀가 눈보다 존귀한 게 아니죠, 몸의 모든 부분은 똑같이 중요해요. 어느 것 하나 없어서는 안 되며,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게 아니죠. 그런데 교회는 누가 더 영적인지를 재고, 누가 더 하나님의 사람인지를 비교하는 거예요, 심지에 바울에게까지 그 잣대를 대면서 말이죠.

바울은 몸의 기관들은 서로 싸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슬픔과 짐을 나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손을 다쳤어요, 피가 나고 아파요, 그러면 그 아픔은 모든 몸이 함께 지는 거예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에요. 우리 중에 누군가가 다쳤다고 해서, 그 아픔을 우리가 동일하게 질 수는 없겠죠, 하지만 그 아픔에 공감해주고, 그 개인이 그 아픔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도록 돕는 공동체가 ‘몸 된 교회’인 것이죠. 바울은 이 마음이 교회를 만드는 성령님의 마음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거예요.

 

6. 그리스철학

고린도에 만연한 그리스 철학은 몸의 철학이 아니었습니다. 몸의 철학은 굉장히 현대적인 이야기예요. 대부분의 철학의 역사는 정신의 역사였습니다. 몸의 가치는 정신에 비해 낮게 두었어요. 고대 그리스 철학이 가장 대표적이고요. 정신의 가치만을 높게 두었을 때, 그러니까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은 정신, 영혼이며, 몸은 썩어 없어질 것이고 잠시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가 그리스 철학의 이야기인데요, 많은 경우 교회가 신앙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 철학을 말할 때가 많죠. 우리는 날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며 몸의 부활을 말하는데 말이죠. 정신, 영혼의 가치만 두는 경우 두 가지의 극단적인 길로 가는 경향이 보여요, 하나는 금욕주의고요, 하나는 쾌락주의예요. 금욕주의는 몸을 편하게 하는 것을 거부하는 거예요. 먹고 자는 일뿐만 아니라 남녀의 성에 관한 이야기는 터부시 되는 거죠. 반면에 쾌락주의는 이래요, 어차피 쓰고 없어질 몸인데 가지고 있을 때 누리자, 내 영혼에 영향을 주진 않을 테니까. 그래서 부도덕한 성문화를 조장하게 되는데요, 이게 고대 그리스 사회에 극단적인 흐름이었어요.

참고로 근대의 쾌락주의, 벤담과 밀의 이야기는 좀 다른 이야기예요. 요즘에 경제학에 관심이 생겨서 책을 읽다가 알게 된 건데요, 예를 들면 이래요, 지주가 길을 가다 넘어져요, 그래서 무릎이 까였습니다. 아프죠? 이번엔 노예가 길을 가다가 넘어졌어요. 무릎이 까였습니다. 안 아플까요? 똑같이 아프다는 거예요. 그 고통의 양은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에 달린 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굉장히 평등에 관한 이야기로 진행이 되더라고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오늘 바울이 이야기한 몸의 비유와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몸의 한 부분이 아프다고 다른 부분이 괜찮은 게 아니야, 그러니까 교회 공동체는 서로의 아픔을 돌보아야 해! 근대의 쾌락주의자들은, 아픈 정도는 누구나 똑같이 느끼는 거니까 사회는 어느 한 부류의 사람들의 고통에만 집중해선 안돼! 재밌죠, 생각해볼거리 같아요. 아무튼, 바울은 고대 그리 서철학의 정신-편향적, 영혼-편향적 철학에 맞서 몸 자체를 교회 공동체를 표현하는 은유로 사용합니다. 몸을 중요시하지 않는 철학과 맞서 싸우는 거예요. 그가 직접 노동을 하고, 생계를 꾸리고, 토요일에는 회당에 가서 전도를 하고, 다음 날인 주일에는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직접 뛰었던 것은 이런 몸의 신앙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사랑은 머릿속에서 하는 게 아닌 거예요. 여러분의 생각이 사랑을 만드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말과 행동이 사랑을 만드는 거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길을 걸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움직여야죠. 주일 모임에 오시는 것도 사랑의 첫걸음을 뗀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 모임에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눠주시고, 들어주시고. 때때로 가능하다면 개인적인 만남의 시간도 가지시구요. 십여 명이 같이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둘, 셋이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으니까요.그리고 친해지다가 몸이 되다가 갈등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요? 이제는 갈라서자 뒤돌아서지 마시고요, 몸이 그렇게 할 수 없듯 사랑 안에서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그 과정이 일어나는 공간이 교회입니다. 성령님이 한 마음을 주시는 모임 말이죠.

 

7. 건강한 몸의 확장

고린도전서 16장에 보면 후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요. 돈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돈을 자기한테 달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기근으로 고생 중인 다른 교회 공동체를 위해 돈을 모으는 거예요. 바울은 그것이 몸 된 사랑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모은 후원금을 가지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또 가는 거예요. 바울은 그렇게 일생을 살았어요. 그래서 교회가 시작되었죠. 유대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전 세계 누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일 수 있게 된 것은 바울의 몸 된 헌신에서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몸의 비유’를 한 교회 안에서만 실현하는 게 아니라 ‘교회 간’에 까지 실현한 거예요. 다른 교회의 고통에 까지 관심을 기울이고, 아파하고 도울 일을 찾는 거죠. 물론 목사님, ‘자기 교회 안에서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남의 교회까지 어떻게 신경 써요?’ 하면 맞는 말이긴 한데요, 그게 건강한 상태는 아니죠. 세상에 대한 관심, 이웃 교회에 대한 관심까지 있는 상태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우리가 바울을 본받는 태도이고요, 성령님의 마음에 합한 자세입니다. 세상에 관심도 없고, 다른 교회에 관심도 없는 데다가, 자기 교회 안에 빠져있는데, 몸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정신적인,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들에만 빠져있다? 이게 최악의 상태라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사랑합시다 노래만 부르고 있는 상태 말이에요.

 

8. 교회의 기도제목

오늘은 기도제목을 하나 공유하고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며칠 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명성교회 세습에 관한 총회 재판이 있었어요. 결국 어떤 결론을 못 내리고 다음 달 8일로 연기되었거든요. 교회 방송이 아닌 일반 언론에서도 많은 질타를 받고 있고, 또 미온한 태도를 보이는 장로회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많지요. 저는 지하철 타고 학교 출근하는 길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명성교회 이야기를 하면서 친구에게 교회를 왜 다니냐고 말하고 있더라고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명성교회가 건강한 ‘몸 된 교회’가 되는 것,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우리 교회나 잘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프네요.

신학교 교수님들도 갈리고, 교단의 목사들도 갈렸고요, 그래서 자칫 교단이 갈라질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윗동네에서 이렇게 한 몸을 이루지 못하는데, 한 몸을 이루자는 설교를 하자니 고민이 되긴 했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8월 5일에 총회 재판국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쁜 결과가 있기를 기도합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가 하나님의 ‘몸’이고, 때때로 갈등이 있고, 아픔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바로 잡아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어야겠습니다.

교회가 ‘건강한 몸’을 이루는 것에 열정을 쏟지 않고, ‘큰 몸’을 이루려 할 때 어떻게 되는지 그 종말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건강한 몸을 이루기 위해 우리 교회는 얼마나 성령님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고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한번 밥 잘 먹는다고, 한번 운동한 다고 건강한 몸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꾸준한 열정과 실천이 필요할 것 같아요! 서로의 기쁨도 공유하고, 서로의 아픔도 공유하며 서로가 함께 자랄 수 있는 교회로 함께 자라나 가는 저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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