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만희]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이다
[박만희]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이다
  • 박만희
  • 승인 2019.07.22 22: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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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희 전도사의 설교 - 누가복음 10장 38~42절

좋으신 나님의 평화가 [가까운 교회]와 [함께.걷는.교회.]의 모든 이들에 삶에 함께 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앞에 선 김에 인사를 짧게 하겠습니다. 저는 ‘박만희’이고 [함께.걷는.교회.]에서 5년 째 함께하고 있습니다. OO/OO님, OO이, OO이, OO이, OO이를 만나러, 또 까페 이인을 응원하러, 또 OO님이 자랑하는 아이스라떼를 마시러 예전부터 오고 싶었습니다. 처음엔 서울에서 예배를 마친 후에 올 계획이었는데, 준비하다보니 [가까운 교회]와도 함께할 좋은 기회다 싶어서 지난주에 급한 연락을 드렸습니다. 짧은 시간이겠지만 함께하기로 정해지고 나니 기대도 되고 조금은 설레기도 했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제가 여기에 서 있다는 점입니다. 땡땡이를 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말이죠. 아무쪼록 제 자신과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애석한 시간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가까운 교회]처럼 [함께.걷는.교회.]도 매주 교회력을 따라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 역시 교회력 본문입니다. 멀리 떨어진 두 교회가 처음으로 함께하는데도, 지난주 ‘선한 사마리아인’ 본문에 이어서 오늘 본문을 함께 읽을 수 있다는 게 교회력이 주는 장점이자 묘한 매력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연합예배’라는데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늘 하던 대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은 다섯 구절 밖에 안 되는 짧은 내용을 다룹니다. 등장인물은 마르다와 마리아 두 여인입니다. 이들은 자매이기도 하죠. 보통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그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본문은 나사로를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또 그들 가족이 살았다고 요한복음이 전하는 ‘베다니’라는 특정 지명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같은 인물들일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나사로의 누이인지 아닌지는 오늘 본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이 본문을 오늘날 교회에 단순하게 대입해서 생각합니다. 전달하는 방식이야 차이가 있겠지만 요약하면 이 정도가 아닐까요? ‘교회 봉사도 중요합니다. 중요하지 않다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니 균형을 잘 맞춥시다. 봉사와 신앙의 일치를 이룹시다.’라는 내용 정도로 말입니다. 이 교훈은 주로 교회 내 일 때문에 발생하는 분란을 향합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성가대나 찬양팀 등 각종 봉사로 인해 생기는 갈등을 봉합하는데 쓰입니다. 그 중에서도 식당봉사를 하는 권사님 이하 여성 성도들이 표적이 되곤 합니다. 제 편견인지는 몰라도 마르다와 마리아가 여성이기 때문일 테고, 내용 역시도 밥상 차림 즉 주방에 관한 일이다보니, 교회 일에 가져다쓰기 안성맞춤인 본문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본문을 어떻게 읽고 계신가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본문은 일과 말씀 혹은 신앙에 대한 내용일까요? 또 자주 들어온 것처럼, 예수님은 마르다를 책망하고, 마리아는 칭찬하신 걸까요?

본문이 그런 얘길 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만약 그렇다면 저는 예수님에게 좀 다른 방식으로 따지겠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시느라 그렇다고 쳐도, 손님 대접하느라 넘쳐나는 일을 제자들에게라도 좀 돕게 하라고 들이대겠습니다. 대체 내가 몇 명 분 밥을 하고 있는 줄 알고 그렇게 속편한 얘길 하시느냐고, 그만큼을 준비하려면 할 일이 몇 가지인지 아느냐고, 밥 하는 거 우스워 보이느냐고 조목조목 따져 묻겠습니다. 밥은 밥대로 얻어먹고 훈계질은 훈계질대로 하실 생각이냐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심보가 딱 그 정도거든요.

마찬가지로 본문을 가지고 누군가 그런 설교를 한다면 또 따지겠습니다. 점심 먹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제발 주방으로 좀 들어오라고 말하겠습니다. 음식 못한다고 핑계하지 말고 좀 배우라고 말하겠습니다. 음식 말고도 할 일 넘쳐나니 입 다물고 좀 내려 오라구요. 당회에서 결정만 내리지 말고, 이게 얼마나 하기 싫은 일인지,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어려운지 들어보라고 하겠습니다. 아니 그 전에, 대체 권사는 왜 있는 거냐고, 교회 헌법에 여성 장로가 안 된다는 얘기가 없는데, 권사는 대체 왜 만든 거냐고, 대체 왜 당회에는 당신들만 앉아 있느냐고 지금의 저는 들이댈지도 모릅니다. 저 본문을 오늘에 적용하려면, 오늘이 어떤지도 알아야 할 테니까요.

누군가 제게 ‘그런 주변적인거 보지 말고, 본문이 말하는 핵심을 읽어야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게는 별로 실효가 없을 것 같습니다. 또다시 편견 섞인 제 판단에는 이 본문을 쉽게 처리해버리는 사람 수 만큼, 본문이 그리는 장면을 불편해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 보이니까요. 본문 속 불편함을 도외시하고 전하는 말씀 따위 듣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제 주변에는 넘쳐 납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에 온 한 청년은, 설교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온갖 혐오를 견디지 못하고 설교 중에 ‘대체 무슨 하시는 거냐고’ 손을 들고 질문했다가 갖은 비난을 받아 결국 교회를 떠났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청년이 좀 심했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기 계신 도훈님과 저는 훗날 서로가 설교 강단에서 허튼 소리를 지껄인다면 서로 멱살을 잡고 끌어내릴 권한을 서로에게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본문을 계속해서 봉사에 관한 내용으로 읽겠다고 고집한다면 제가 그걸 뜯어 말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새롭게 생각하고 고민한 후에 말해야 하며, 또 많은 것을 바꾸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럼 누군가는 제게 이렇게 따져 물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당시 문화에 맞게 읽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입니다. 남성인 제자들에게 주방에 들어가라고 할 수 없는 것도, 손님인 그들을 잘 대접하는 것도 당시 문화 중 일부가 아니겠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오늘의 시선으로만 본문 장면을 상상하는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적절한 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본문을 다시 읽어야 합니다.

먼저 3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38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계속해서 39절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39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말씀이 우선이냐, 일이 우선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이 두 구절은 어딘가 심하게 뒤틀려 있습니다. 두 구절 모두에 이미 당시 문화에 맞지 않는 내용이 은근슬쩍 끼어 있습니다. 눈치 채셨겠습니다만, 우선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는 내용이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그 모습은 당시 선생과 제자 사이에서만 볼 수 있던 장면이니까요. 예를 들면, 바울과 그의 스승 가말리엘 사이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란 겁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이상합니다. 예수님과 언니 마르다의 대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 장면은 이미 낯섭니다. 거기 있어서는 안 되는 이가 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참여해서는 안 될 이가 참여하고 있고, 들어서는 안 될 이가 듣고 있습니다. 이상한 장면입니다. 이 낯선 장면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가 당시 몇이나 될까요. 누가는 왜 이런 장면을 넣었을까요.

우선 39절에서 문제가 있는 장면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럼 38절에서 찾아야 할 장면은 뭘까요. 뒷 문장입니다. ‘마르다라는 여성이 예수를 자신의 집으로 모셨다’는 내용이 그렇습니다.

마르다의 맞아들임을 ‘환대’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면, 그녀는 예수님을 환대 했습니다. 창세기에서 롯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집으로 모셔서 자신의 자리를 내어준 것처럼,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환대는 집주인이 하는 일입니다. 당시 집주인은 늘 남성이죠. 환대는 남성의 몫입니다. 집주인인 남성들은 환대의 의미로 자신의 딸을 내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문화가 성서 곳곳에도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최근들어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환대’마저도 당시에는 남성들의 몫이었다는 겁니다. 만약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사로의 누이라면, 호스트는 나사로여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마르다라는 여성이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고 기록합니다. 그게 이 본문의 시작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리아까지 가기도 전에 셋팅부터가 비틀려 있습니다. 이것은 애당초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한편, 마르다의 환대는 10장 앞부분을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는 3주 동안 누가복음 10장을 함께 읽었습니다. 오늘이 그 마지막 내용이죠.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10장 첫 내용은 '파송'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체적인 지침 몇 가지를 내렸습니다. 그 지침 중에는 제자들을 맞이하는 집에 대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어느 집이든 제자들을 받아들이면 거기서 머물고, 준비한 음식을 먹고 마시며, 그 집을 위해 평화를 빌어주라는 내용이었죠.

본문에 나오는 마르다의 환대가 그 내용의 실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중이고, 마르다는 여정 중에 있는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여정중인 그들을 위해 먹고 마실 것과 잠자리를 준비중입니다. 선생격인 사람을 집으로 모셔서 말씀을 듣는 일은 당시 흔한 풍경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이야기도 그런 모습 중 하나죠. 다만 누가복음은 고정값인 남성주인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여성 마리아가 예수를 맞았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읽기도 가능합니다. 본문을 ‘누가 예수를 환대하는가?’에 대한 내용으로 보는 겁니다.

기대되지 않던 사람입니다. 예상 밖 인물입니다. 초대할 권한이 없는 인물입니다. 본문에는 유력한 남성 '그'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 여성인 '그녀'가 있습니다. 반복하지만 이 그림은 이상합니다. 교회에 익숙한 우리야, 식사를 대접하는 마르다의 이야기가 평범하게 들리겠지만, 그거 아니란 겁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초청하는 장면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앞에 앉은 장면은 뒤집힌 그림입니다. 마치 율법과 가장 가까운 제사장이나 율법교사의 자리에 사마리아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있던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누가 여정 중에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가? 누가 그와 이웃할 것인가? 누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것이며, 누가 구원을 얻는가?’에 관한 ‘예수님의 비틈’이라면, 오늘 본문은 ‘누가 십자가를 향한 여정 중에 있는 예수를 환대하는가? 누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예수의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를 누가복음이 작정하고 그려내고 있다고 말입니다. 본문은 말하는 겁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다. 마르다다. 마리야다'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을, 율법의 한 가운데에 놓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비난으로 온갖 수모와 멸시가 온몸에 축적된 사마리아 사람을 바깥에서 안으로 초청해 율법을 차지하게 합니다. 저들 따위 불에 타 소멸해도 상관없다는 혐오를 당하던 이를 계명의 한복판에 놓습니다. 그렇게 율법은 그의 것이 됩니다. 율법은 그의 것입니다.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의 전부를 책임질 수 없더라도, 당장은 두고가야 하는 몸의 한계가 있더라도 도울 돈이 부족하더라도, ‘계명’은, 이웃하려고 버둥거리고 애쓰는 자의 것입니다. 제사장도 레위사람도, 질문을 던진 율법 교사도 사마리아 사람이 받은 것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그에게 내어준 자리를 박탈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일으키는 전복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환대와 제자 됨에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습니다.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평가 받던 이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결코 그럴 수 없던 존재가 죽음을 향해 가는 예수를 맞아들이고, 십자가를 향해 가는 그의 말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제멋대로 마르다와 마리아를 주변으로 밀어낼 수 없습니다. 마르다가 맞아들인 예수와 마리아가 들은 그의 음성을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를 향한 마르다의 불평을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오늘 설교의 관심이 아니기도 하고, 불분명하기도 해서 자세하게 설명할 자신은 없습니다. 어쩌면 마르다가 내보인 짜증 혹은 질투는, 환대 중에 우리 삶에 일어나는 온갖 투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기로 오늘도 결정하는 우리 안에 있는 온갖 옳음과 정의, 무력함과 허무함, 사랑과 혐오 등의 경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맞이한다고 해서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요. 본문에 따르면, 그건 우리 모두가 가진 ‘많은 일에 대한 염려’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많은 일들은, 우리가 믿는 동안 우리를 끝없이 따라 다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4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42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고, 그것은 예수의 발 앞에 앉아 그의 말을 듣는 일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마리아는 누구도 빼앗지 못할 예수를 가졌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녀가 예수를 독점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예수의 것을 가졌다는 말이고, 그녀가 가진 그것을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택한 좋은 몫은 뭘까요. 마리아와 같을 겁니다. 예수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는 겁니다. 누구도 빼앗지 못할 무엇으로 삼는 겁니다. 우리의 말과 몸에 스며들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는 우리에게만 있다'는 소유권 주장을 뒤흔들어 놓는 겁니다. ‘너희에게는 예수가 없다’는 비웃음을 뒤로 보내는 겁니다.

저는 여기 함께 모인 두 교회가 좋은 몫을 택하려고 모인 사람들이라고 믿습니다. 이때 좋은 몫이란, 완결되지 않을 옳음을 빼앗기지 않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누가 내 이웃인지를 선정하려고 하기보다, 강도만난 자와 혐오 당하는 사마리아인의 나를 세우는 일 일지도 모릅니다. 사랑을 사랑하는 일 말입니다.

우리가 택한 좋은 것을 빼앗기지 맙시다. 차별과 혐오에 예수를 사용하려는 이들에게 예수를 빼앗기지 맙시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예수를 써먹으려는 이들에게도 예수를 빼앗기지 맙시다. 차별과 혐오와 탐욕을 내버림으로써 말입니다. 우리가 들은 것을, 그가 하신 말씀을 빼앗기지 맙시다. 예수가 율법을 다시 읽어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도 다시 읽어 우리의 것으로 삼읍시다. 예수를 따라 걷고, 그를 맞이하며, 그의 말을 들읍시다.

아무도 그것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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