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주의 발치에 앉은 마리아
[이택환] 주의 발치에 앉은 마리아
  • 이택환
  • 승인 2019.07.21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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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누가복음 10:38~42
Johannes Vermeer (1632–1675),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1654~1656.

오늘 (누가복음 10장 38절부터 42절 사이의) 말씀에는, 마르다/마리아 두 자매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마르다가 언니이고, 마리아가 동생이라는 것 외에, 이들이 어디에 사는 어떤 사람들인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요. 비슷하게 요한복음에 마르다/마리아 자매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유대 베다니에 거주했고, 두 자매 외에도 나사로라는 이름의 남자 형제가 있습니다. 특히 나사로는 예수님의 친구라 불릴 만큼 예수님과 친분이 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 일행이 종종 그들의 집을 방문해서 머물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마르다/마리아가 바로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마르다/마리아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도 나사로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외에, 두 집안의 분위기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르다/마리아 역시 예수님과 친근한 사이로 보이며, 특별히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헬라어 단어(39절, 휘페덱사토)는 문법상 이들이 예수님 일행을 이미 여러 차례 영접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전통적으로, 하나의 질문이 있다고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섬김이 중요한가, 아니면 말씀 듣는 것이 중요한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렇게 볼 경우, 마르다는 섬기는 자들의 대표이고, 마리아는 말씀 듣는 자들의 대표가 됩니다. 마르다가 섬김을 중요시하는 것은 그녀가 예수님 일행을 초청한 집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중동지방의 손님을 환대하는 문화는 유명하지요. 일찍이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도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고 말씀하셨지요(마7:12). 따라서 집 주인 마르다에게는 마땅히 손님들을 영접하고 좋은 음식으로 대접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일행은 예수님과 열 두 제자, 모두 열세 명일 수 있지만, 같은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70인 제자를 파송 한 것을 고려하면, 일행이 수십 명이 될 수 도 있었습니다. 마르다의 마음이 분주할 수밖에 없었지요(40). 또한 이웃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이미 본문 바로 앞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 역시, 이웃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일 법 합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예상이 빗나갑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들의 대표인 마르다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날 분주해서 일손이 달린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의 도움이 절실했습니다. 마리아 역시 집 주인이기에 손님을 영접해야 할 책임이 있었지요. 하지만 마리아는 그 바쁜 와중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단지 예수님 발치(발아래, 발 근처)에 앉아 예수님 말씀만 듣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참다못해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예수님, 제가 혼자 힘들게 일하는 것을 생각하신다면, 제 동생 마리아에게 빨리 저를 도와주라고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저라면 당연히 “마리아야, 얼른 가서 수고하는 언니 좀 도와주어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의 요청을 거절하십니다.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마르다야 마르다야!” 예수님이 마르다를 두 번 부르시지요? 그녀가 예수님 일행을 영접하고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수고하는 것은 귀하지만, 그렇게까지 염려하고 근심할 일이 아니라는 강조입니다. 마르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시는 말씀 같지만, 한편으론 그녀의 수고를 도외시하는 말씀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르다가 불필요하게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일을 하기보다, 꼭 필요한 일 몇 가지, 또는 가장 중요한 일 한 가지만 해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마치 오늘날 한국교회에 주신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큰 교회 작은 교회 할 것 없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가, 과시하는 데 집착해 온 면이 없지 않습니다. 프로그램도 백화점처럼 많고, 담임목사부터 교육전도사까지 바쁘지 않은 교역자가 없습니다. 과거 부교역자 시절엔 저도 신학 책은 물론 신문 읽을 새도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성도들도 바쁩니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를 하려면 교회를 거의 제 2의 가정이나, 제 2의 직장으로 삼아야 합니다. 직분자 뿐 아니라 일반 교인, 청년들도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지요. 그렇게 계속 다양한 거룩한 일거리를 만들어내는 교회가 좋은 교회고, 또 그렇게 교회를 중심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교인이 좋은 교인처럼 여겨졌습니다. 어떤 교회는 규모에 비해 후원하는 해외 선교사 숫자가 지나치게 많습니다(후원 내용보다는 숫자가 더 중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 선교지들은 추후 교회 관계자 방문지이기도 함). 그런 교회는 대개 담임목사가 가지고 있는 감투만 해도 수십 개지요.

저는 이 말씀을 마르다 대신, “한국교회야, 한국교회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이렇게 읽어도 별로 이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확실히 일이 적어요! 한편, 목사들이 교회 일을 줄이고 싶어도, 성도들 중에 “왜 다른 교회는 다 하는데, 우리교회는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안 하느냐, 왜 다른 교회 목회자들은 다 하는데 우리 목회자들은 안하느냐?”해서, 어쩔 수 없이 일을 만드는 교회도 없지 않습니다. 단순히 일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교회가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3)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분주히 많은 일을 하느라 염려하고 근심하는 마르다보다, 예수님 앞에 가만히 앉아, 말씀 듣는 쪽을 택한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마리아의 선택권을 존중해 주고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일을 시키기 위해 마르다가 마리아를 데려가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오늘 말씀은 여기서 끝납니다. 이 자체만으로 보면 예수님은 분명히 마르다보다 마리아 편입니다. 그렇게 보면 교회의 전통적인 질문, 즉 섬김과 말씀 가운데, 예수님은 말씀이 더 중요하다고 선언하신 것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정말로 “섬김보다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일까요? 100% 틀린 것은 아니지만, 현실과 좀 괴리가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 말씀 듣는 것이 중요하다 해서, 마르다를 비롯한 집안사람들 모두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는다면, 손님접대는 누가합니까? 오히려 말씀이 중요할수록, 다른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의 섬김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말씀 듣는 것이 중요하긴 해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요. 어떤 면에서 말씀은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듣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전에 오늘 본문이 과연 섬김이냐, 말씀이냐를 가르는 기준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누가복음 10장 전체의 주제가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초반부에서 예수님은 70인 제자들을 유대 각지로 파송하시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전파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심을 품고, 영생, 곧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과 이웃,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대해 질문하지요. 그 때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한 이웃을 제사장이 피해가고, 레위인도 피해갔다. 오직 사마리아인만 그를 보살펴주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이 비유를 단지 섬김이 중요하다는 가르침만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처음부터 이 비유가 “누가 우리 이웃인가?, 즉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이웃,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요. 오직 유대인만 그들의 이웃,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보다 오히려 그들이 개처럼 취급했던 사마리아인이 진정한 이웃, 즉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급진적 화두를 던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웃에 대한 기존의 경계를 허무셨어요. 왜? 하나님 나라에는 그런 경계선이 없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이 그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이어지는 오늘 본문 역시, 단지 섬김의 중요성만을 강조한 이야기로 보기 어렵습니다. 섬김보다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물론 아니지요. 우리는 여기서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경계선을 허무는 어떤 단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면 어떨까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가 만약 남자였다고 가정하는 겁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마르다/마리아의 남자 형제 나사로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 때에도 과연 마르다가 나사로를 부엌으로 데려가 일을 시키려고 했을까요?

당시 마르다는 자신과 마리아가 여성이기 때문에, 마땅히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여성으로서 어울리지 않게, 부엌이 아닌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있습니다. “발치에 앉는다”는 것은 당시 랍비에게 교육받는 제자들이 날마다 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과거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 받았다고 말했는데(행 22:3), 여기서 ‘문하’라는 말이 ‘발치’(푸스, feet)입니다. 즉 바울은 랍비 가말리엘의 “발치에 앉아” 가말리엘에게 배운, 가말리엘의 제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스승의 발치에 앉아 배우는 제자의 일은, 당시 남자에게만 주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리아가 그런 남자 행세, 제자 행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마리아인이 이스라엘의 이웃이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에서 허용되지 않던 일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그 권리를 인정하셨습니다. 넓게 해석하면, 예수님이 여성에게도 제자가 될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이 됩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 말씀은 결코 봉사가 중요하냐 말씀이 중요하냐 차원이 아닙니다. 그보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경계를 허문 것처럼, 남성과 여성에 대한 차별의 벽을 허무는 차원인 것이지요. 당시 이미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을 여제자(마테트리아)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다비다에게 처음으로 여제자라는 말이 적용되지요. 이후 바울은 그가 개척한 여러 교회에 수많은 여성 리더십을 세웁니다(루디아, 브리스길라, 뵈뵈, 유오디아, 순두게 등).

오늘 우리가 복음 안에서 과감하게 뛰어 넘고, 또 허물어야 할 경계선은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교회를 두려워했던 것은(그래서 핍박함!) 세상이 굳건하게 세워놓은 수많은 경계선을 뛰어넘고 허무는, 교회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급진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반대 현상이 벌어져요. 교회가 온갖 경계선들을 굳게 세우고, 오히려 세상이 허물면, 또 다시 교회가 세웁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의 급진성을 상실한 그런 교회라면 세상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흔한 이익단체, 친목단체와 다를 바 없다고 대신 우습게 여길 뿐이지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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