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자유’에로 부르시다
[곽건용] ‘자유’에로 부르시다
  • 곽건용
  • 승인 2019.07.15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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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의 설교 - 출애굽기 3:7~12

 

Edward Poynter (1836–1919), 이집트, 1867
Edward Poynter (1836–1919), Israel in Egypt, 1867

복종이냐 자유냐?

오늘부터 몇 주간 ‘자유’를 주제로 설교하겠습니다. 이 주제를 갖고 설교할 생각을 한 것은 오래 전이었지만 그 동안은 차일피일 미뤄왔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신앙과 관련해서 ‘자유’라는 주제가 매우 중요한 주제이고 사실 ‘자유’가 신앙의 핵심이고 전부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유’라는 주제를 제대로 다루는 것에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자유’를 얘기하려면 싫든 좋든 어렵고 복잡한 철학적인 얘기들을 피할 수 없는데 제가 그걸 얼마나 쉽고 피부에 와 닿게 얘기할 수 있을지도 자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어왔는데 지지난 주에 갑자기 이젠 더 미루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류 역사에 수많은 종교가 명멸했습니다. 수많은 학자들이 종교의 기원과 발전과정, 그 의미와 기능과 역할 등에 대해 논의해왔고 그 중에는 종교가 머지않은 장래에 소멸할 거라고 예측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특히 이성의 힘으로 온갖 모양의 무지몽매와 미신, 종교적 광신, 불합리한 관습이나 전통 같은 것들에서 인간을 해방시킬 것으로 믿었던 18세기 서구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수많은 지식인, 학자들이 종교의 사멸을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종교는 사멸하기는커녕 20세기와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융성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갖고 있고 종교에 대해 기대하고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종교는 절대자 또는 절대적인 가치나 절대 진리에 대한 순종으로 이해됩니다. 종교는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기보다 훨씬 더 큰 어떤 존재, 흔히 절대자라고 부르는 존재에 복종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거기에 귀속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인간의 주체적인 의지와 선택과 행위,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을 포괄하는 ‘자유’와는 대립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인간의 자유의 확대와 종교는 반비례 관계에 놓여 있다는 얘기입니다. 계몽주의시대 이후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사람들이 종교가 사멸할 거라고 내다본 근거가 이것입니다. 인간의 자유가 확대될수록, 그리고 과거에는 절대자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일들을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인간이 할 수 있게 됨으로써 종교는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그런데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습니다. 21세기 과학은 과거에는 신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겼던 일들을 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보수적인 종교인들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인간이 감히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라고, 그랬다가는 신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종교가 협박도 해보지만 과학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사멸하지 않았습니다. 사멸하거나 쪼그라들기는커녕 종교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지역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와 남미 등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덜 문명화된 지역에서 그렇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종교가 융성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입니다. 좀 더 다각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계몽주의라는 용광로를 거치면 종교가 타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욱 단련된 모습을 갖게 됐습니다. 오히려 종교의 사멸을 예측했던 사람들은 인간에게 종교가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이해했음이 밝혀졌다고 봐야합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기독교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이 질문은 너무 광범위해서 대답하기 곤란하니까 질문의 범위를 이렇게 좁혀보겠습니다. 기독교는 ‘자유’와 관련해서 어떤 종교입니까? 만해 한용운 시인은 ‘복종’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남들이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만해의 시 가운데 ‘님의 침묵’ 다음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시입니다. 계몽주의 시대 철학자가 이 시를 읽었다면 쓰레기라고 외치면서 내던졌을 겁니다. 자유보다는 복종이 좋다니, 자유를 모르지 않지만 당신에게만은 복종하고 싶다니, 복종이 자유보다 더 달콤하다니, 그게 자기의 행복이라니 말입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미개한 생각이었겠지요.

 

모든 종교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 시는 요즘의 기독교 신앙에 딱 맞는 시가 아닙니까. 시인이 불교 승려인 줄 모르고 읽는다면 어떤 신실한 기독교인이 지은 시라고 해도 믿을 겁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게 신앙이라고 믿는 기독교인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자유를 말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조건 하에서 자유라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독교인의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라면서 일정한 제한을 부여하는 자유가 기독교인의 자유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 사실은 신앙과 자유의 관련에 대해서 전혀 생각해보지 않고도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만해의 시 ‘복종’은 기독교인들이 ‘아멘!’으로 받아들일만한 시입니다. 더욱이 만해는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라고 노래한 바로 다음에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 그것만은 복종을 할 수가 없습니다 //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라고 노래하는데 이 대목이 이르면 아마 벌떡 일어나서 큰소리로 ‘아멘, 할렐루야!’를 외칠 기독교인이 많을 겁니다. 이 대목을 부처님이 아닌 기독교의 하느님에게만 복종하겠다는 뜻으로 읽고 그렇게 하겠지요.

만해는 왜 이렇게 노래했을까요? 왜 자유보다 복종이 더 좋다고 노래했을까요? 저는 이렇게 추측합니다. 그가 자유보다 복종이 더 좋다고 한 까닭은 자유가 필연적이든 아니든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게 할 가능성’을 열어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만해에게 자유는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복종하지 말아야 할 존재에게 복종할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얘기할 텐데 이 점은 자유를 얘기할 때 반드시 짚어야 할 점입니다.

성서에 ‘자유’란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오는지 알아봤습니다.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원어가 아니라 ‘자유’라는 우리말 번역어가 등장하는 횟수이므로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는 없지만 좌우간 ‘자유’라는 단어가 개역개정에는 쉰일곱 번, 새번역성서에는 예순네 번, 공동번역성서에는 예순아홉 번이 나옵니다. 이만하면 많이 나오는 겁니까, 아니면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겁니까? ‘복종’이란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오는지도 알아보니 개역개정, 새번역성서, 공동번역성서에 각각 예순한 번, 예순한 번, 일흔 번 등장하네요. 대체로 자유와 복종은 비슷한 횟수로 등장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인류 역사상 모든 종교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시작됐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 어떤 종교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종교는 ‘역사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하늘에 관한 것이라 해도 시작은 땅에서 이루어졌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래서 당신을 이단이라고 부르는 거야. 기독교는 하느님의 계시로 출발한 종교인데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를…….’이라고 반박할 수 있겠지만 그 하느님의 계시가 기원전 17세기 또는 12세기라는 역사적 시기에 팔레스타인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지역에 살던 아브라함이면 아브라함, 모세면 모세라고 하는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유대교와 기독교 역시 역사적 성격을 갖는 종교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는 그것이 시작된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주 오래됐기에 역사적인 기록이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종교는 그 기원을 신화(myth)라는 양식에 담아 보존하고 전승했습니다. 종교가 신화적 기원을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구약성서의 야훼 종교는 어떻게 시작됐나?

그런데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그 종교가 시작됐는지가 다른 종교와는 비교할 수 없이 구체적이고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종교가 있는데 그게 바로 구약성서의 종교, 고대 히브리인들의 야훼 종교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 대목을 전하는 출애굽기 3장의 일부를 읽었습니다. 모세가 양을 치다가 호렙산의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나타난 하느님을 만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히브리인들, 곧 야훼 하느님의 백성들을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키라고 부르는 장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약성서 종교’라고도 부르고 ‘야훼 종교’라고도 부르는 종교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 종교는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예수 종교’ 곧 ‘기독교’의 조상입니다.

야훼 종교는 노예해방에서 시작됐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로든 바꿀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야훼 종교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 노예들에 의해, 그들의 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이 종교의 본질과 핵심을 생각할 때 ‘자유’나 ‘해방’이란 개념을 도외시하면 절대 안 됩니다. 야훼 종교의 핵심은 해방과 자유입니다. 세계 구석구석의 수많은 다양한 종족들의 종교를 다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노예들에 의해 시작됐고 노예들의 자유를 위한 해방이 목적이었던 종교는 구약성서의 야훼 종교가 유일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 종교는 시작부터 ‘자유’와 ‘해방’이 핵심이고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야훼 종교의 후예인 기독교인들이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가 믿는 종교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누구에 의해서 어떤 가치를 추구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현재 기독교인들 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기독교를 떠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고상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됐는지 알았더니 겨우 노예들에 의해 시작됐다니, 내가 이런 저급한 종교를 왜 믿겠는가…….’라고 후회할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기독교가 노예들의 해방과 자유와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독교를 믿을 수 없다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이니까요.

오늘은 여기까지 얘기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유를 얘기할 때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와 ‘무엇을 위한 자유’를 구분해서 얘기합니다. 그런 얘기들이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얘기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때와는 시대가 크게 달라졌으므로 그 사건을 이해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얘기를 더 발전시켜야겠지만 말입니다. 그 얘기는 다음 주일에는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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