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만희]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박만희]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 박만희
  • 승인 2019.07.15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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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희 전도사의 설교 - 누가복음 10장 25~37절
Vasily Surikov(1844~, 선한 사마리아인, 1874
Vasily Surikov(1844~1916), 선한 사마리아인, 1874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우리 모든 삶에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오래된 게임이 있습니다. 사람이 많아야 할 수 있는 게임이라서 교회나 학교 같은 단체에서 주로 했습니다. 대부분 아시겠지만 간단히 설명해보면, 큰 원을 그리고 앉아있는 사람들 중 아무나에게 술래가 찾아가서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질문을 받은 사람은, ‘예나 아니요’ 둘 중 하나로 답할 수 있습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이 ‘예’라고 답하면, 답한 사람의 양쪽에 앉은 두 사람이 재빠르게 자리를 바꿉니다. 그때 술래는 두 사람이 자리를 바꿀 때 비는 자리 중 하나에 앉으면 됩니다. 누구든 앉지 못하는 사람은 다음 술래가 됩니다. 재빨라야 하겠죠. ‘예’라고 답할 경우엔 세 사람만 움직이면 되는데, 문제는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사람이 ‘아니요’라고 답할 경우입니다. 이때 술래는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그럼 당신은 어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때는 모두가 긴장을 해야 하는데요. 답변에 따라서 모두가 자리를 옮겨야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아무 대답이나 할 수 있습니다. ‘안경을 쓴 사람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안경을 쓴 사람은 전부 자리를 바꿔야 합니다. 대답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빨간색이 들어간 옷을 입은 사람’이라고 답할 수도 있고, ‘아침을 안 먹은 사람’이라고 답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답이 나오든 해당되는 사람은 빠르게 자리를 옮겨야 합니다. 일종의 자리 바꾸기인데, 굉장히 격렬해서 다치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옛날 사람 티를 내려고 옛날 게임 얘기를 한 건 아니고요. 오늘 설교 본문을 읽다가 생각이 났습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이 본문 중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어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질문을 새삼스레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어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이 옆집 사람을 뜻하는 건 아닐 겁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저 역시 제 옆집 이웃이 어떻게 생겼는지 몇 명이 함께 사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생각해 볼 필요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이웃의 얼굴이라도 알고 살자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이 옆집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니라면 이야기는 복잡해집니다. 본문에서처럼 이웃은 강도를 당해 길 위에 쓰러진 사람일지도 모르고, 요한과 야고보가 삭제시켜버리려고 했던 사마리아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내 옆자리에 두고 싶은, 선택 가능하다고 믿는 소수 몇몇인지도 모릅니다.

이웃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따지기 이전에 짚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본문 속 율법 교사를 한심하게 여기는 대부분의 생각과는 반대로, 우리는 늘 이웃을 고르고 싶어 하고, 고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 옆에는 누구를 둘 것이며, 또 누구를 도울 것인지, 누가 나와 함께하기에 적절한지를 은연중에, 혹은 의식적으로 우리는 선택합니다. 나에게 무해하고 내가 좋아하며 내게 유익한 사람을 이웃 삼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누가 내 이웃’인지를 끊임없이 따져 묻고 또 탈락시킵니다. 물론 따져 묻고 탈락시키는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는 따져 물어지고 탈락되는 대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보니 내 옆자리에 두고 싶은 사람은 나를 자기 옆에 두고 싶어 하지 않고, 나를 이웃삼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가 별로 내키지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계속 미끄러집니다. 강제로라도 내 손에 꼭 쥐고 있지 않는 한 사랑하고 싶은 이웃은 언제나 나에게서 벗어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이웃을 선별하려는 것처럼, 이웃은 끝도 내게서 빠져나갑니다. 결국 우리는 ‘이웃 사랑’이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피로함에 사로잡힙니다. 이웃하기에 지쳐버린 우리는 허무와 회의에 빠져 자유와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말이 좋아 자유와 독립이지 ‘인생은 원래 혼자’라는 진부하면서도 자조 가득한 한탄을 우리는 내뱉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본문을 읽고 어쩌다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은 본문이 있겠습니까만, 오늘 본문은 특히나 더 유명한 비유이면서 그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읽어온 이야기입니다. 가장 알기 쉬운 풀이로는, 강도를 당해 길바닥에 내버려져 죽어가는 사람을, 본체만체 하고 지나가버린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유대인들에게 짐승 취급 받던 사마리아인과 비교해서 읽는 방법입니다. 온 힘을 다해 쓰러진 사람을 도와준 사람은, 버림받은 사마리아인이었으니까요. 그들 중 누가 참 그리스도인인지를 생각해보는 겁니다. 윤리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양심을 건드리는 이야기로 읽어 보는 겁니다.

얼핏 보면 뻔한 읽기 같지만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율법을 가진 사람과 율법 갖지 못한 사람 중 누가 율법을 지켰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얼마 전 저는 사마리아를 성전을 갖지 못해 제사를 드릴 수 없는 지역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연히 율법도 지킬 수 없죠. 그와 같은 이유로 사마리아를 향한 편견과 차별, 그리고 멸시가 유대인들에게는 오랜 시간 쌓여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따위 불에 태워 지도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쯤은 예수님의 길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사마리아를 다시 언급합니다. 그것도 율법과 가장 가까운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 대응하는 자리에, 율법을 가지지 못한 사마리아인을 불러오는 겁니다. 그리고선 누가 율법을 지켰느냐는 겁니다. 율법교사는 어쩌면 마지못해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요. 너무나 당연했 보였던 이 이야기를 확장하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정말 어려워질 겁니다. 누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냐는 질문을 가능하게 하니까요. 율법 바깥에 있는 사람이 도리어 율법 안에 있다는 이야기이니까요.

지난 주 언급한 것처럼, 부름과 보냄이라는 예배 형식에 백날 참석한다고 해서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 겁니다. 예배 같은 거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우리를 부름과 보냄 사이에 늘 새롭게 세우는 기독교적 형식이기도 하니까요. 전 이렇게 모여 애쓰고 버둥거리는 일 너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다만 ‘예배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늘 자신을 부름과 보냄 사이에 세우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예배를 가졌다고 믿으면서도 자신을 부름과 보냄 사이에 세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보냄의 수신자로 자신을 인식하지 않는 이들 말입니다. 지난 주 말씀을 다시 나눌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사마리아인을 언급한 예수님의 말씀은, 비유를 듣는 율법교사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위험하고 불편합니다. 어쩌면 ‘누가 이웃이 되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교사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돌려 말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존심 때문에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을 입에 담고 싶지 않아서 말이죠.

두 번째 유명한 풀이로는 질문 자체를 뒤집어 버린 예수님의 지혜에 경탄하며 읽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뒤집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드신 후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고 되묻습니다. 앞에서 나눈 이야기를 끌어오자면,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는 물음은 ‘당신은 어떤 이웃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해체시켜버리는 물음입니다. 예수님의 물음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에서 ‘나’를 끌어내립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라는 질문에는 ‘나’가 들어갈 자리는 없습니다. ‘강도 만난 자’가 ‘나’보다 우선합니다. 예수님의 물음은 나를 높은 지위에서 끌어내릴 뿐만 아니라, 나를 해체시키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물음에, ‘내’가 들어갈 자리를 빼버린 응답을 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대답에 ‘나’는 설 곳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이웃이 될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있을 뿐입니다.

본문이 만약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이야기이기만 하다면, 비유를 다 마치신 후에 이렇게 되물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요. ‘이들 중 누가 너의 이웃이냐’고 말입니다. 그럼 그는 큰 깨달음을 얻은 채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진짜 숨겨진 이웃입니다.’라고 답했을 겁니다.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렇게 답했을지도 모릅니다.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그 장소는 인적이 드물어 항상 강도와 폭력이 도사립니다. 하루 이틀 문제가 아닙니다. 피해자가 더 발생하지 않도록 치안을 늘리고 CCTV를 더 설치해야 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그 질문엔 ‘내’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나’라는 분명한 토대를 흔들어 놓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나를 가만히 둔 채, 강도 만난 사람과 사마리아인을 도움 받아야 할 대상으로 두지 않습니다. 내가 율법을 잘 지키도록 돕는 수단으로 그들을 두지 못하게 합니다. 반면 그 질문은 ‘나’를 사정없이 흔들고 바꿔서 이웃의 자리에 놓습니다. 나를 고정시키지 못하게 합니다. 강도 만난 자와 혐오 받던 사마리아를 우선하고, ‘나’를 변하는 자리에 놓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질문은 율법 교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질문이고 또한 변함으로의 초대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어느 회사의 ‘부당해고 복직투쟁을 위한 기도회’에 참여할 때 일입니다. 하루는 회의 끝에 한 교회에 연대와 참여를 요청하기로 결정하고 연락을 했습니다. 연락을 받은 교회는 ‘주일날 교회로 와서 상황을 설명해달라’는 응답을 했습니다. 저도 아는 목사님 두 분과 한 청년이 들뜬 마음으로 PPT와 자료 등을 열심히 준비해서 갔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이유는 ‘부당해고 당한 노동자들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였죠. 해당 교회 장로님 몇 분은 보고를 준비해간 사람들에게 대놓고 충고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이었어야 그들은 함께 했을까요. 그 교회가 무조건 틀렸다고 나쁘다고 말 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고, 우리라고 크게 다를까 싶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함께하자고 요청할 생각도 했고, 또 그 교회는 와서 이야기 해 달라고도 했겠죠. 그럼에도 생각해 볼 여지는 있습니다. 당시 부당해고 노동자들이 그 교회의 이웃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뭘까요. 단순한 예로 사용해 죄송하지만, 그 교회는 ‘누가 내 이웃인지’를 결정하는 확고부동한 위치에 서 있던 건 아닐까요.

저 역시 투쟁 방식에 백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현장에 있다 보면 불편할 때도 많습니다. 때로는 제가 민감한 성별이나 나이 문제에 그들이 둔감해서 불편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인격에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저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을 때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모든 것이 제 기준에 들어맞아야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내 이웃되기에 적합해서 함께 했던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혹시 내가 이웃할 수 있을까?’하는 조심스러움으로 한 주에 한 번이나마 그 자리에 참석했던 것뿐입니다. 제 의도 역시도 의심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약자의 약자다움, 피해자의 피해자다움 같은 게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틀에서 벗어나면 편들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순수한 피해자, 순결한 약자만이 나와 이웃할 자격이 있다고 은연중에 생각하는 겁니다. 나를 그대로 두고 이웃을 채점하는 겁니다. 교회 자체를 뒤흔드는 예수의 질문은 견딜 수 없어 하면서 말입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는지를 묻는 예수의 질문을, 교회는 다시 고칩니다. 강도 만난 자로서의 태도는 적절한지, 쓰러져 있는 저 사람의 평소 인격은 어떤지, 충분히 가난하고 충분히 불쌍한지, 타종교는 아닌지 등을 교회는 늘 같은 자리에서 묻는 겁니다.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을 제목으로 삼을 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 많은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조금 세게 말하면 본문은 강도 만나 사람이 누군지를 살피고 무한한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내용도, 사마리아 사람에게 가졌던 편견을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우리 이제 진짜 돕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태도는 늘 나를 한 가운데 놓고, 누구를 내게 붙일지를 고민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교회라는 확실한 토대 위에 누구를 어떻게 얼마나 돕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강도 만난 자와 혐오 당하는 사마리아에 대해, 우리는 이웃으로 변해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환경주일에 들었던 이야기를 빌리면, 여기 굳건하게 서 있는 내가 어떻게 환경을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어떤 환경이 될지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읽기 방법을 말씀 드렸습니다. 대체 뭐가 두 가지라는 건지 헷갈리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복잡하게 한 것 같기도 하고, 잡다하게 이것저것 말씀 드린 것 같기도 합니다. 굳이 나누자면 사마리아인을 중심으로 읽을지, 아니면 예수님의 질문을 중심으로 읽을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말씀드린 읽기 외에도 본문은 더 다양한 읽기가 가능합니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느냐’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고 말입니다. 재미있는 답변입니다. 기록된 문자뿐만 아니라, 기록된 그것을 어떻게 읽는지도 중요하다는 뜻일 테니까요.

여기 계신 분들은 기록된 이 본문을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더 다양한 읽기가 가능한 본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어떤 읽기가 됐든, 기록된 그 말씀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함께 읽은 그 말씀이, 우리를 강도만난 자 옆에 세우기를 바랍니다. 때로 우리 서로가 누군가를 향해 베푸는 작은 자비가, 굳건한 나를 붙들고서가 아니라, 예수의 뒤를 따라 걷는 중에 있는, ‘우리’에게서 자연스레 비롯하기를 바라며 말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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