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까맣지만 아름다운
[김동환] 까맣지만 아름다운
  • 김동환
  • 승인 2019.07.15 0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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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목사의 설교 - 아가서1:5, 6, 8:6, 7

1. 젊은이들의 대화

지난 주일 화요일 아침이었습니다. 학교 정문을 지나서 교실로 들어가는 데 앞에 어떤 젊은이들, 두 분이 걸어가는 거예요. 5학년이나 6학년 정도로 보이는 친구들인데, 아침부터 진지하게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빨리 교실로 가려다 보니 좀 뒤에 가까이 가게 되었고요, 의도치 않게 젊은이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A : “ㅇㅇㅇ야, 나 좋아하는 사람 있다.” 
B : “누구?” 
A : “나. 나 좋아하는 사람 있는 줄 알았어? 나,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야~”

피도 눈물도 없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많이 웃었습니다. 물론 속으로 웃었어요. 프라이버 시니까요.

 

2. 피도 눈물도 없는.

처음 들을 때는 그냥 웃긴 이야기였는데요, 교실로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약간 마음이 그런 거예요, 왠지 저도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았거든요^^;; 사회로 나가보니까요, 은근히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만나는 게 쉽지가 않네요, 일단 교회를 다니는 분인지 파악이 안 되는 게 어렵고요, 또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아주 반갑진 않아요, 뭔가 이상하게 믿고 있는 분은 아닐까 걱정이 먼저 되더라고요. 비겁한 변명은 여기까지 하겠고요 예전에 소개팅에서 만난 선생님이 저희 교회에 오신 일이 있었잖아요? 갑자기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네요,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셨으면 그냥 무릎 꿇고 ‘저를 거둬주세요' 할 텐데, 참 아쉽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별생각 없이 지내고 있는데요, 저도 이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학교 아이들이 하도 연애 언제 할 거냐고 묻길래, ‘지금은 정말 바빠서 안되고, 여름 방학하면 여자 친구 생길 거다’ 했거든요, 두 달 전에 말한 것 같은데, 아이들이 잊어버리질 않더라고요, 방학이 가까워지니까 저한테 기억하고 있는지 자꾸 상기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방학이 기다려지기도 하면서 부담도 됩니다. 아가서 본문을 준비하다 보니 이런 생각을 더 하게 된 것 같아요. 아가서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고, 또 교회가 그렇게 해석해왔다는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저 조차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갈급한 성도님의 요청으로 아가서를 준비하고, 한 주간 저도 고민하고 공부하고 기도하며 지냈는데요, 다행히 이런 위기의 순간에 이용주 교수님께서 오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피도 눈물도 없고, 인기도 없는 연약한 목사를 도우러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요, 궁금한 점들 있으면 교수님께 여쭤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3. 아가서는 어떻게 성경이 되었을까?

아가서는 제목 그대로, 아름다울 아, 노래 가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쉬르 하쉬림, 노래 중의 노래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헬라어로도 아스마 아스마톤이구요, 영어로 song of songs 이렇게 반복어로 제목을 씁니다. 한잣말로는 ‘아가’ 한 번만 쓰고 반복을 하지 않았는데요, 아마도… ‘아가아가’ 이렇게 하면 뭔가 없어 보여서 그런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노래 중의 노래! 이 아가서를 설교로 들어보거나, 성경공부를 들어본 적이 별로 없으실 거예요. 저도 사실 아가서를 가르쳐본 적은 없습니다. 약간 부끄러운 표현들이 있잖아요? 남녀의 사랑의 노래다 보니, 다 성인임에도 교회에서 막상 이야기를 하려면 좀 애매한 게 있어서 아가서는 주로 개인 묵상(?)으로만 읽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아가서를 유월절이라는 가장 중요한 절기 때마다 읽었데요. 노래로 불렀는지, 낭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중요한 예배를 위한 말씀으로 아가서를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대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아가서를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사랑,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신앙고백으로 읽고 가르쳤다는 것이죠. 기독교는 거기에 더해서, 예수님의 사랑의 눈으로 아가서를 읽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유대교, 가톨릭, 종교개혁시대의 아가서 주석들을 보면 아가서에 있는 문장, 단어들의 속뜻은 이것이다, 이것이다 이렇게 하면서 다양한 해석의 시도들이 참 많았어요. 저는 굳이 단어 하나하나에 신비한 어떤 뜻이 있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요, 다만 이토록 솔직하고, 때로는 로맨틱한 언어들이 담겨있는 노래, 시가 어떤 의미로 신앙고백이 되었고, 또 교회의 신앙을 지키는데 어떤 역할을 할지를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건, 유대인들이 이 아가서를 100% 남녀의 사랑노래라고 생각하진 않았다는 거예요. 그랬다면 이 말씀을 유월절에 낭독하진 않았겠죠? 구약의 야훼 신앙이 있기 전, 고대 근동의 사람들은 다신론을 믿었죠. 그래서 신들의 사랑을 노래했어요. 바벨론 시대에 노래로 불려졌던 신들의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릴게요. 두무지-이난나 신화이인데요, 이난나라는 여신이 있었는데, 자기 누이가 지하세계를 통치하고 있었데요, 이난나는 누이를 이겨서 지하세계의 통치권을 뺏으려 했지만 오히려 패배하고 지하 감옥에 갇혔어요. 하지만 엔키라는 사람의 중재로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되었는데요, 대신 조건은 이난나 자신을 대신할 누군가를 지하감옥에 두어야 했데요. 이난나는 남편 두무지가 자기가 지하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남편을 감옥에 보내버려요. 그래서 두무지는 일 년 중 반년은 감옥에, 대신 반년은 자기 누이가 지하에 들어가서 세상에 나올 수 있었어요. 이 두무지가 농사와 비의 신이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두무지가 세상에 나오는 6개월은 비가 오고 농사가 되고, 두무지가 지하에 내려가는 6개월은 춥고 비가 오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데요. 재밌긴 한데, 약간 ‘사랑과 전쟁’ 이네요? 예나 지금이나 사랑싸움은 치열했나 봅니다!

고대의 사람들은 남자신, 여자 신을 믿었잖아요, 그래서 사랑 노래는 신과 신, 신과 반신의 이야기가 많았어요. 뭐, 자유연애시대가 아니니 신화의 이름으로 사랑을 노래한 것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야훼 신앙,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사랑의 노래를 신들 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과 사람의 이야기로 전환시킨 거예요. 그런 면에서 아가서를 유월절에,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하나님이 다른 신을 좋아한다는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고백으로 이야기했다는 것. 사람의 삶에서 가장 피부로 와 닿는 사랑인 남녀의 사랑이야기로 신앙을 말한 다는 것. 이것은 정말 개혁적인 신앙고백이 되었던 거예요.

한 가지 또 생각해볼 점! 아가서가 유월절에 읽혔다고 했잖아요? 유월절은 사실 가장 거룩한 절기이죠, 거룩하다는 건, 다르다는 거고, 구별된다는 말이잖아요? 하나님의 권능의 심판으로 노예들이 이집트에 탈출했어요. 피를 문에 발라야만 장자가 살 수 있는 피의 심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자, 예수님도 모르고, 이 특별한 신앙 경험한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이 전능자이시지만, 친밀하고, 달콤한 사랑의 말을 하고 이런 이미지로 다가오진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도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후의 역사 속에서의 모든 신앙 경험들을 토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서와 같은 달콤한 사랑의 노래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 참 신비한 일인 것 같아요. 물론 우리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이 아가서의 고백과 같다고, 기독교인이기에 더욱 그런 고백을 할 수 있겠죠!

거룩과 친밀. 저는 이 아가서가 유월절의 말씀이라는 게 이런 의미로 다가왔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함부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가장 친밀한 분이시다. 두 가지의 역설적인 고백이 신앙고백 안에 모두 담겨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예를 들어서, 제가 교사 학교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합시다, 어떻게 하는 게 사랑하는 걸까요? 교사로서의 권위, 품격, 거리를 가지면서 동시에 친밀해지는 것, 친구같이 같은 눈높이로 아이들을 만나는 것. 이 두 가지의 말도 안 되는 역설을 가지고 늘 고민하고 있어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 차이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친구같이 친밀해질 수 있을까? 불가능해 보이는 역설을 계속해서 파고드는 게 제가 사랑의 길을 걷기 위한 고민이거든요.

신앙에도 똑같이 적용이 되는 것 같아요. 하나님을 너무 무섭게 보는 경향이 있고, 하나님의 높으심, 사람의 죄에 너무 깊이 집중하는 사람은 아가서를 충분히 묵상하며 균형을 찾아야겠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아주 가볍게 생각하고, 내가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시겠지, 친구 같은 하나님이시니까, 내 이런 모습 이해해주시겠지, 이렇게 옆집 아저씨, 동네 친구처럼만 생각하시는 분은 아가서를 가끔만 보시고, 구약의 다른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균형을 찾으시는 것도 좋겠어요!

 

4. 사랑을 노래하는 여인

길섶 교회분들은 모두 완벽하게 균형 잡힌 신앙의 눈을 가지셨다고 믿고요, 본문을 살펴볼게요. 아가서는 여자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합니다. 나에게 입맞춤을 해주세요, 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달콤합니다, 이렇게 아가서가 시작하는데요. 이게 신기한 부분이에요. 저희 소그룹은 지난주에 페미니즘 이야기를 많이 했었거든요? 여성 인권문제에 대해서 말이죠. 아가서가 고대 세계, 그러니까 수천 년 전의 이야기라고 했을 때 신기한 점은, 여성이 먼저 나서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원한다고 표현한다는 거예요. 여성을 사유재산처럼 여기던 시대에 여성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또 사랑하는 이를 부르는 노래가 만들어졌다는 게 신기한 일이죠,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요.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아가서가 처음엔 분명 남녀의 이야기였고, 게다가 성경 곳곳에 불신앙의 상징을 음란한 여자라고 비유를 하다 보니, 여성에 관한 이야기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가서라는 여성 중심의 사랑이야기가 성경으로 들어왔을 것이다라는 해석을 하는 분들도 있어요. 물론 당연히 그 이후에 유대교에서는 신앙고백으로 읽혔지만, 처음에는 순수한 남녀 이야기였을 거라고 하는 거예요. 물론 추적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런 가능성도 있다 정도만 이해하시면 되어요. 이번에는 제가 오늘 함께 읽은 첫 번째 본문인 1장 5절 6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5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내가 검어서 예쁘단다. 게달의 장막 같고 솔로몬의 휘장 같다는구나. 
6 내가 검다고, 내가 햇볕에 그을렸다고, 나를 깔보지 말아라. 오빠들 성화에 못 이겨서, 나의 포도원은 버려둔 채, 오빠들의 포도원들을 돌보느라고 이렇게 된 것이다.

Gustave Moreau(1826~98), Song of Songs, 1893

이 여인에게는 컴플랙스가 하나 있었는데, 피부가 검다는 거였어요. 우리나라는 좀 심한데, 고대의 이 시대에도 하얀 피부가 인기가 있었나 봐요. 이건 시대마다, 나라마다 다른 거니까 고대에는 다 그랬다, 이렇게 말할 순 없겠고요, 적어도 이 여성분은 피부가 검은 걸 컴플랙스로 여기고 있어요. 사람들이 게달의 장막이라고, 솔로몬의 휘장 같다고 놀린다는 거예요. 게달이란 뜻이 검다는 뜻이라는데요, 사막의 원주민 부족이라고 추정하고 있어요. 솔로몬의 휘장에 관한 정보는 성경에는 없는데요, 솔로몬 성전 이전에 성막 단계에서도 바깥은 여러 동물의 가죽으로 덮어놓잖아요? 성막 안은 금박으로 처리를 하지만, 이것도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검은 가죽 휘장을 사용해서 솔로몬의 휘장 같다는 말이 나왔나 봐요.

여인은 적극적으로 말해요. 내가 검다고 깔보지 말아라, 오빠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포도원은 관리도 못하고 오빠들 포도원들을 돌보느라 이렇게 타버렸다. 당당하죠. 검은 게 아쉽긴 한데 이런 일들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깔보지 말아라. 포도원 이야기와 가족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이 여자분이 어떤 분인지를 살짝 알 수 있는 근거들이에요. 우선 포도원 밭 일을 하는 분이신데, 아주 못 사는 분은 아니지만, 또 아주 잘 사는 분도 아닌 것 같아요. 이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 솔로몬은 포도원을 일꾼들을 시켜서 가꾸거든요. 그런데 이 여자분은 자기가 직접 밭일을 해야 하고, 때로는 가족들의 일도 도맡아 해야 했어요. 사랑하는 남자와의 경제적 격차를 이야기하는 부분들이 종종 나와요.

여기서 한 가지 미리 말씀드리면, 이 남자 주인공이 진짜 솔로몬일까? 하는 점이에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아가서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거든요, 솔로몬이 좋아했던 노래, 솔로몬이 이야기한 내용으로 발전된 노래 등등. 솔로몬 자신의 이야기로 봐도 괜찮고요. 이 아가서의 남자 주인공은 동네의 모든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고, 포도원 밭도 많이 가졌고, 엄청난 매력남이에요. 하지만 솔로몬 ‘왕’이라고 하기엔 이야기가 좀 안 되는 부분도 있죠. 왕이라고 한다면 포도원이 크고 일꾼들이 있다 정도로 묘사되지는 않겠죠? 그리고 중간에 결혼을 하고 잠깐 위기가 찾아오는 내용이 있는데요, 여자 주인공이 남자를 찾으러 나갔다가 파수꾼에게 도움을 요청해요. 하지만 파수꾼들이 여자 주인공을 떄리고 괴롭혀버려요. 만약 솔로몬 왕의 부인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요.

또한 솔로몬은 아주 아주 많은 여자 친구가 있었던 분이셨잖아요? 가장 지혜로운 왕이었으나 여자 문제 때문에, 너무 기준 없이 결혼을 많이 하다 보니 이방 종교의 신전들이 이스라엘 땅에 들어왔고 이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계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죠. 그런 솔로몬이 한 여인을 사랑하는 노래를 한다는 게 조금 낯설 수 있는 거예요, 정치적 이유로 많은 결혼을 하고 후궁을 두었지만, 진정한 사랑은 한 여인과 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해석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솔로몬이든, 솔로몬은 아니지만, 그만큼 사회에서 인기 있고 부유한 남자였든, 주인공 여자와는 무언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을 것 같은 넘사벽의 남자인 것 확실한 것 같아요. 여자 주인공은 시작부터 남자의 사랑을 노래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외모, 가족, 경제 이야기들을 하거든요. 그래도 당당하게 끝까지 사랑하고 결혼까지 나아가는 노래가 아가서입니다.

 

5. 돈으로 살 수 없는

이런 이해를 가지고 아가서의 마지막 장 8장 6절, 7절을 읽어볼게요.

6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 7 바닷물도 그 사랑의 불길 끄지 못하고, 강물도 그 불길 잡지 못합니다. 남자가 자기 집 재산을 다 바친다고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오히려 웃음거리만 되고 말겠지요.

아가서는 특히나 개역한글, 개역개정보다 새번역 번역이 잘 된 것 같아요. 시적인 느낌, 뮤지컬적인 느낌이 새번역에 더 잘 드러나요. 새번역을 보시면 각 절마다, 여자의 이야기인지, 남자의 이야인지, 친구들이 목소리인지가 나와있어요. 여러 목소리들의 합창, 뮤지컬 같은 느낌으로 읽으시면 되거든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이란 표현은 고대 근동지역의 속담 같은 거래요. 목숨을 다하는 사랑은 아무리 고대사회라고 해도, 자유가 없는 시대라고 해도 있어왔던 것 같아요. 바닷물이 그 사랑의 불을 끄지 못할 것이다는 표현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신들의 사랑에서 신과 사람의 사랑으로 아가서를 가져올 때 아주 멋지게 응용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고대 창조 신화에서는 창조주 신이 바다, 물의 신을 이기고 세상을 시작하거든요. 계시록에서도 하나님께서 많은 물 위에 계신다는 표현을 하잖아요? 바닷물이 사랑의 불을 끄지 못한다는 표현은, 연인 간의 뜨거운 사랑에도,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사랑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멋진 표현 같아요. 남자가 자기 집 재산을 다 바친다고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가 읽어도 뼈 때리는 질문이네요. 돈으로 사랑을 창조해내려는 사람들에게 아가서의 이 질문이 던져지길 바라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사랑에도 돈이 필요한 현실이지요. ‘돈 없어도 돼, 둘만 사랑하면 되지!’ 했다가 부모님들의 반대로 결혼에 실패한 친구 교역자들 이야기를 많이 봤어요. 신앙의 가정에서도 똑같더라고요. 물론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현실의 벽이 높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여러분 모두에게 사랑의 불이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결혼을 빨리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고요, 그거 여러분의 자유이지요, 무엇이든, 어떤 사람이든, 사랑의 열정이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저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에요. 아가서를 묵상하면서,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나는 사랑이 많은 사람인가? 내가 살아온 날을 돌아보며, 나의 사랑들은 진실했나?’

다음 달 결혼을 앞둔 분이 계시죠? 8월에는 저희 교회 성도님 중에 첫 번째로 결혼하시는 분이 생겨납니다. 아가서의 여자 주인공, 남자 주인공처럼 스스로 주체적으로 사랑해나가는 길을 걸어가시길 축복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 가족들의 걱정, 돈에 대한 스트레스, 아가서 본문 안에서도 드러나는 근심들이 오늘에는 더 심하게 있을 테지만, 그래도 어떤 물로도 끌 수 없는 뜨거움으로 사랑의 길을 걸어 나가시길 축복합니다. 갑자기 주례 분위기네요? 오늘 이 자리에는 결혼을 하신 분도 있고요, 하실 분도 있고요, 연애를 하고 있는 분도 있고요, 저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분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랑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누군가와 만나서 사랑을 하실 분도 가장 멋진 사랑을 해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연약하고 불완전하지만, 당사자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낄 사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대사회처럼 단명하는 시대는 아니니까요, 너무 급한 마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긴 호흡을 가지고 가되, 사랑의 열정은 잃어버리지 않아야겠습니다.

 

6. 사랑은 뜨겁다.

사랑에는 어떤 뜨거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저는 어떤 모양의 뜨거움이든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목소리, 사회의 목소리, 내 안의 근심, 걱정들이 때로는 그 사랑의 불을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럴 때마다 여러분들은 아가서에 나타난 뜨거운 사랑의 불을 소생시켜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공부만이 목적이면 이렇게 모일 필요는 없어요. 독서모임으로 하면 되니까요. 유튜브 영상강의로 해도 되고요. 교회로 모인다는 건, 사람이 사람으로 만난다는 건, 하나님이 주신 어떤 뜨거움 때문이 아닐까요? 문자로는 안 되는!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당신의 연약함을 조금이나마 메워주고 싶고, 힘을 주고 싶고, 응원하고 싶은 그런 사랑. 하나님 주신 사랑으로 다시 일어나서 아가서의 연인들처럼 새로운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모임. 모임을 위한 모임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을 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돕는 모임이길 소원합니다. 저도 사랑이 부족한 목사이지만, 조금씩 노력해볼게요!

까맣지만 아름다운. 오늘 설교의 제목이었는데요. 여인이 스스로 이렇게 말하는 모습이 너무 마음에 와 닿더라고요. 우리가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죄인이다는 말을 할 때 이 여인의 고백을 인용하는 고대교회의 고백도 있었어요. 그것도 참 와 닿는 해석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안에 까만 부분들이 있지요. 어쩔 수 없이 거머쥔 부분들이 있을 거예요. 보고 싶지 않지만,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그래도 그런 나는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솔로몬이 이 여인을 사랑했기에 까만 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죠.

예수님의 사랑도 똑같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하는 까만 부분은 까만 걸로 끝입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까만 나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줄 거예요. 이렇게 스스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스스로 사랑할 대상을 찾아나갈 힘이 있습니다. 세상의 소리에 지치지 마시고, 다음 한주도 멋지고 아름답게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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