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 각색한 신화에서 복음을 추출하다
[김영웅의책과일상] 각색한 신화에서 복음을 추출하다
  • 김영웅
  • 승인 2019.07.14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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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홍성사, 2007년
C. S. 루이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홍성사, 2007년

‘웅깃’에서 ‘프시케’로 

난해한 이 소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유명한 그리스로마신화, ‘큐피트와 프시케’ 이야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루이스가 그 신화를 각색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에로스’로 알려진 사랑의 신 큐피트는 미의 여신 비너스 (헬라어로는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다. 어느 날 비너스는 인간들이 자신에게 경배하러 오는 발걸음이 갑자기 줄어든 원인을 알게 된다. 인간세상의 세 공주 중 막내인 프시케의 아름다움 때문에 인간들은 굳이 비너스를 찾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비너스는 금새 질투와 분노에 휩싸였다. 그래서 아들인 큐피트에게 세상에서 가장 추한 존재와 프시케가 사랑에 빠지도록 화살을 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큐피트는 프시케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어머니의 명을 어기고 술수를 써서 인간들로 하여금 프시케를 희생제물로 바치게 만든 다음, 구해준 뒤, 밤마다 그녀를 찾아와 사랑을 나눈다.

프시케는 두 언니가 보고 싶었다. 큐피트는 그녀를 믿고 두 언니와 만나게 해준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너무도 행복하게 보여서 언니들은 프시케에게 질투까지 느낀다. 남편의 얼굴조차 한 번도 보지 못한 프시케에게 등불을 주면서, 밤에 남편이 잠들었을 때 몰래 불을 밝혀 얼굴을 확인해 보라고 권한다. 절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말라고 했던 남편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프시케는 그만 언니들의 요구에 응하고 만다. 그러나 괴물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언니들의 의혹에 동조한 것은 완전히 틀린 판단이었다. 잠들어있는 남편은 괴물이기는커녕 너무나 아름다운 남성이자 신이었던 것이다. 그때 등불에서 기름이 큐피트의 어깨로 떨어졌고, 그는 깨어나자마자 분노와 배신감에 자리를 뜬다. 죄책감에 프시케는 방랑을 시작하며 큐피트를 찾아 나선다. 결국 비너스에게까지 이 사실이 알려지고 프시케는 비너스의 계략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게 된다. 불가능한 일임에도 여러 존재들의 도움으로 비너스가 내준 과제를 거의 완성하게 될 무렵, 마지막 과제에서 그녀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열어서는 안 될, 페르세포네로부터 받은 '아름다움의 묘약' 상자를 열어보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정신을 잃는다. 그때 큐피트가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고, 곧장 제우스에게 날아가 프시케와 합법적인 결혼을 성사시켜달라고 부탁한다. 그리하여 프시케는 신이 되고, 둘은 happily ever after 살았다는 이야기다.

프시케의 철자는 Psyche. 영어로 "사이키"라고 읽는 이 단어는 마음, 정신, 영혼을 뜻하는 단어다. 우리가 심리학 (Psychology), 정신의학 (Psychiatry), 또는 정신병자 (Psycho) 등의 용어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접두어로도 쓰인다. 그렇다. 눈치 챘겠지만, 프시케는 '영혼의 신'이다. 루이스는 이 신화를 차용하여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왜 하필 신화를 이용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반영하는 작품을 만들려고 했을까? 이 책을 읽고 해석하려고 시도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의도는 정확히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루이스가 신화에서 각색한 부분이 어디인지 아는 것이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에서 직접 밝히듯, 루이스는 제물로 바쳐진 프시케가 큐피트에 의해 구해진 이후, 그리고 프시케가 두 언니들의 의혹에 넘어가기 이전, 잠시 동안 인간 프시케와 신 큐피트가 사랑을 나누었던 아름다운 궁전을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바꾸어놓았다 (신화에서는 보였다). 그리고 신화에서의 두 언니는 프시케 만큼은 아니지만, 아름다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화자, 그러니까 맏언니인 오루알 공주는 자타가 공인하는 추녀다. 신화에서는 두 언니가 큐피트에 의해 죽음을 면하지 못하지만, 이 책에서 두 언니는 죽지 않는다. 한 가지 더,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지만, 이 책에서의 중심은, 오루알 공주의 일인칭 시점으로 이 책이 구성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듯, 인간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루이스의 상상력의 무게중심은 오루알 공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인간관계에 있다고 봐야 한다. 이 책은 신화를 각색했지만, 인간이 주인공이 되어버린 이야기인 셈이다.

불행하게도 이렇게 각색한 부분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이 책은 여전히 난해하기만 하다. 우선 제목부터 착 와 닿지 않는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라는 제목에서 과연 누가 이 책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을까. 혹시나 해서 영어 원문을 찾아봤다. 'Till we have faces'. 똑같았다. 허무했다. 그러나 포기하긴 일렀다. 나는 '얼굴'이라는 단어가 신화와 이 책에서 어느 부분에 등장하는지를 살펴보았다. 먼저 신화에서는, 큐피트가 프시케에게 자기 얼굴을 보지 말라고 부탁하는 장면, 그래서 프시케는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무슨 뜻이 있겠거니 하며 두 언니들의 의혹을 접하기 전까지는 남편의 얼굴을 감히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이 내용은 이 책에서도 똑같다. 프시케는 오루알 공주를 만나고 등불을 건네 받은 뒤에서야 한 밤중에 불을 밝혀 큐피트의 얼굴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선 '얼굴'에 관계된 중요한 한 가지를 루이스가 추가시켜 놓았는데, 그것은 오루알 공주가 프시케를 두 차례나 만나고 난 후 궁전으로 돌아와서는 항상 베일을 쓰고 다니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 이전까지는 자신이 추녀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맨 얼굴로 다녔었는데, 그 날 이후 이 책을 회고록 형태로 쓰기까지 오루알 공주는 항상 베일을 쓰고 다니게 된다. 즉,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자기 얼굴을 숨기는 행위는 곧 자신의 신분이나 정체를 숨기는 행위다. 다시 말해, '얼굴'의 의미를 '정체성'이라고 해석한다면, 기독교 세계관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제서야 드디어 해석의 실마리를 한 가닥 잡았다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답해가는 과정, 동시에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가 누구신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을 해나가는 과정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중추적인 부분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해석은 '정체성'이라는 키워드로 접근해야, 이 책의 이면에 숨겨진 루이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책의 말미에 가서 오루알 공주는 꿈과 이상을 보게 되는데, 여러 상징적인 사건들의 급전개가 펼쳐진다. 이 책을 난해하게 만든 주요인으로 작용하는 부분이다. 이상 중 하나가 '얼굴'에 관계된 것인데, 화자인 오루알 공주가 신들에 대한 고소장을 열두 번은 족히 반복해서 읽으면서 스스로 대답을 얻고 난 후, 그 깨달음을 고백으로 적어놓은 부분이다. 이 책에서 루이스의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문장이라고 보여진다. 다음과 같다. "나는 신들이 우리에게 드러내놓고 말해주지도 않고 우리 스스로 대답을 찾지도 못하게 하는 이유를 잘 알게 되었다. 이렇게 자기 중심에 무슨 말이 있는지 찾아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게 내 말의 의미입네 떠드는 소리를 신들이 뭐 하러 귀 기울여 듣겠는가? 우리가 아직 얼굴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신과 얼굴을 맞댈 수 있겠는가?"

이 깨달음을 얻기 직전까지 오루알 공주는 자신이 회색 산의 신인 '웅깃'이라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오던 차였다. 자신의 정체성을, 얼굴이 없으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존재인 웅깃으로 인식하려던 차였다. 자신이 유일하게 신뢰하고 사랑했던 프시케와 바르디아, 그리고 여우 선생까지 잃은 이후, 그 동안 스스로는 사심 없는 '사랑'이라고 여겨왔던 믿음 혹은 신념이나 감정이, 실제로는 자신을 위해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욕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던 시기였다. 자신이 웅깃이라는 것은 자신의 영혼이 웅깃처럼 추하다는 의미였다. 탐욕스럽고 피에 굶주렸다는 뜻이었다. 그렇다. 자신이 웅깃이라는 오루알 공주의 그 깨달음은, 소유하려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진리를 비로소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신들을 고소하다가 자신도 몰랐던 숨겨진 정체가 탄로나고 고소당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타락한 영혼을 맨 얼굴로 대면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여우 선생의 유령과 함께 여신이 된 프시케를 만나게 되고, 오루알 공주는 프시케에게 자신의 이기적인 사랑을 토로하며 용서를 구한다. 그런데 프시케는 저승의 여왕에게서 받아온 아름다움의 상자를 그녀에게 내민다. "웅깃을 아름답게 해 줄 아름다움을 가지러 먼 길을 다녀온 걸 알잖아요"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오루알 공주는 수면 위에 비친 두 명의 프시케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 중 하나는 놀랍게도 자신이었다. 이어서 신 중의 신이 나타나 오루알 공주에게 말한다. "너 또한 프시케가 되리라." 이 말을 듣고 오루알 공주는 꿈인지 이상인지 모를 상태에서 깨어난다. 그녀는 풀밭에 쓰러진 채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다.

책의 마지막 문단에서 오루알 공주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나는 첫 번째 책을 신들에게는 대답할 말이 없다는 말로 끝냈다. 주여, 이제는 당신이 왜 대답지 않으셨는지 압니다. 당신 자신이 답이십니다. 모든 질문은 당신의 얼굴 앞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다른 무슨 대답을 들은들 만족하겠습니까? 다 말, 말뿐입니다. 다른 말들과 싸우기 위해 끌어내는 말. 오랫동안 저는 당신을 미워했고, 오랫동안 당신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제는...."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루이스는 신화를 각색한 이 난해한 소설을 통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진정한 회개를 매개하여

강조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 책의 화자, 오루알 공주는 자신의 이기적이고 소유하려는 사랑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정체가 웅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신은 그녀가 웅깃이 아니라 또 하나의 프시케임을 알려준다. 프시케를 통해 아름다움의 상자를 받아 아름다워지는 신비의 과정을 통해서 말이다. 신화와는 달리 이 책에서의 상자는 프시케에 의해 몰래 열리지 않았으며, 그대로 오루알 공주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그 상자 덕분에 오루알 공주 역시 아름다워진다. 웅깃이 아닌 프시케로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오로지 프시케를 통한 신의 도움 덕분에. 마치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처럼.

웅깃에서 프시케로의 transformation. 나는 ‘얼굴을 찾는다’는 의미를 자신의 ‘죄된 속성을 진실되게 깨닫는다’는 뜻으로 해석해본다. 칼빈의 전적 타락 교리와도 어울리는 이 해석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타락하여 구제불능이라는 영적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만든다. 즉,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라는 제목의 숨은 뜻은 ‘인간이 자신의 타락함을 진정으로 발견하기까지’라고 풀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진정한 회개 없는 구원은 값싼 은혜와도 같아서 화재 보험 같은 정도의 의미로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달라스 윌라드가 말했던 ‘바코드 신앙’과도 일맥상통한다. 루이스는 신화를 각색한 이 난해한 소설을 통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진정한 회개를 매개하여 강조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우리의 정체성은 일차적으로는 웅깃처럼 더럽고 추악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하나님백성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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