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택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이택환
  • 승인 2019.07.14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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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누가복음 10:25~37
Vincent van Gogh(1853~1890), The Good Samaritan, 1890년

오늘 복음서 말씀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현재 미국, 영국, 캐나다, 독일, 호주 등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 Good Samaritan Law”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큰 위험에 처했을 때,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외면하고 도와주지 않으면, 처벌할 수도 있다고 해요. 우리나라에서도 1950년대에 정부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을 만들려고 했다가, 국회 심의에서 삭제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당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거지들이 전국 집 앞에 적지 않은 상황에서, 집주인들을 일일이 처벌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몇 년 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지요. 오늘날 미국, 영국과 같은 선진국가들이 개발도상국들을 도와준다고 하면서, 신자유주의 체제로 불러내, 보호무역을 철폐하라고 요구합니다. 장하준 교수는 그것이 개발도상국가들을 도와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위가 아니라, 상처 난 부위에 소금을 뿌리는, 소위 ‘나쁜 사마리아인’의 행위라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오랜 기간 보호무역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선진국이 된 나라들이, 이제는 개발도상국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보호무역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행위와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정도로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교회 안팎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가 왜 나오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의외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원래 이 비유는 예수님에 대한 한 율법사의 반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이전 단락인 누가복음 10:24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은 한 마디로, 과거 유대의 선지자들과 왕들이 그토록 꿈꾸었던 메시아의 시대가 지금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 하나님 나라를 지금 제자들이 눈앞에서 보고,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이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는 자리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율법사가 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지요.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가 일어나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합니다. 특별히 그가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시험하다’라는 동사는 원래 ‘페이라조’인데, 여기서는 ‘에크’라는 접두사가 붙어서 ‘에크페이라조’, 즉 “철저히 시험하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가 볼 때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가당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달라진 게 없으니까요. 당장 로마제국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 것도 아니고,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냐는 것입니다.

그 때 그가 예수님께 했던 질문이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입니다. 여기서 ‘영생’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오해하기 딱 좋은 단어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죽은 뒤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1세기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영생은 “새롭게 도래하는 새 시대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이 악한 시대가 언젠가 하나님의 마지막 종말심판을 받아 끝날 것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종말 심판으로 이 세상이 전 지구적 파국을 맞이한다거나, 우주적 붕괴가 일어난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와 달리, 종말의 때에는 하나님의 메시아가 나타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를, 이 땅 가운데 열어갈 것으로 보았지요.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그 새로운 시대가 바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영생이란, 그렇게 새롭게 도래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말합니다. 말 그대로 영생은 “조에(삶) 아이오니오스(새로운 시대)”, 즉, ‘새로운 시대의 삶’이지요. 그러므로 지금 율법교사가 질문한 것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을 철저히 비꼬는 질문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예수 선생님! 지금 당신은 당신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했다고 주장합니다. 말이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맞다면, 내가 무엇을 해야 그 하나님 나라에서 살수 있다는 것입니까?”

질문에는 종종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진짜 몰라서 하는 겸손한 질문입니다. 그 경우 질문자에게는 따로 답이 없습니다. 또 하나는 이 율법 교사처럼 상대방을 시험하는 교만한 질문입니다. 처음부터 배울 의도가 없어요. 이미 자신에게 확고한 답이 있고, 그것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논쟁을 통해, 상대방에게 면박을 주려는 목적이 더 강하지요. 예수님은 그 율법교사의 의도를 아시고, 거꾸로 그의 생각을 물으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러자 그가 자신 있게 말합니다.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이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서 살 것입니다. 이 대답 속에는 이미 자신이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에 대한 공격이 있지요. “예수님, 당신은 과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또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십니까?”그가 볼 때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것은 율법교사가 기대한 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율법에 어긋난 이단적 대답을 원했지요. 그래야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망신 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이 그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물러설 율법교사가 아닙니다. 그는 신의 한 수와 같은 질문을 생각해냅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역시 몰라서 묻는 게 아니지요. 율법이 말하는 이웃은 이스라엘 동족인데, 예수, 당신은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이웃 동족 유대인들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느냐는 비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과연 동족을 해하는 일을 하셨을까요? 율법교사가 볼 때에는, 안식일에 귀신을 쫓고, 병자를 치유한 모든 행위가 다 율법 해체 행위입니다. 아무 데서나 사람들의 죄 용서를 선포한 것은 곧 성전 모독 행위입니다. 율법과 성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주신 두 기둥인데, 그 근간을 뒤흔드는 것은 곧 이스라엘을 해하는 행위가 되지요.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이웃을 해하는 일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를 묻는 이 율법교사에게 어떤 분명한 답을 주셔야만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들려주신 말씀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아마도 어떤 사람은 유대인 동족일 것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폭행당한 후 버려져,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누가 보아도 도움이 절박한 이웃입니다. 과연 누가 그를 도와줄까요?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안타깝게도 존경받는 유대의 제사장이 죽어가는 이웃을 보고 피해갑니다(안티-파레르코마이). 거룩한 제사장이 옷이나 손에 부정한 피를 묻히고, 부정한 시체를 만지는 것이 꺼림직 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제사와 관련하여 시간을 늦출 수 없는 중요한 약속이 있었던 것 때문일까요?(어떤 목사는 토요일에는 주일예배 설교준비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결혼식 주례는 물론, 장례식 집례도 일절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비슷한 이유로 성전에서 제사장을 돕는 레위인 역시, 죽어가는 이웃을 보고 피해갑니다(32). 그 때 반전이 일어납니다.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뜬금없이, 유대인에게 개 취급당하던 원수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죽어가는 이웃을 더욱 해코지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마리아인이 뜻밖에도 그 사람을 ①불쌍히 여깁니다(제사장, 레위인도 이 정도는 했을 것). ②하지만 그들과 달리 피해가지 않고, 다가가(프로스-에르코마이), 자신의 기름과 포도주를 꺼내 상처에 붓고, 싸매줍니다(응급처치). ③그리고 말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밤새도록 보살펴 줍니다. ④다음 날, 그가 떠날 때에도 그냥 가지 않고, 주막 주인에게 이틀 치 일당을 주면서, 돌봐줄 것을 부탁합니다. ⑤심지어 추가비용이 들면, 자신이 돌아올 때 다시 갚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율법교사는 점점 더 딜레마에 빠집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당시의 모든 가치관이 전도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강도 만난 사람이 사마리아인이고, 그를 도운 사람이 유대인이라면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 이야기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두고 사마리아인이 피해 달아난 이야기라면 좋았을 겁니다. 그러나 역시 반대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유대의 제사장, 레위인이 그랬다니 더 불편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욱 그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이야기 속의 사마리아인이 죽어가는 생면부지의 한 유대인을 살리기 위해, 그의 온 마음과 정성과 물질과 시간까지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마치신 후,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물으십니다.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는 현실 속에서는 상상하기도 싫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인지라, 차마 사마리아인이라 말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라고 둘러 댑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분명, 선행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비유입니다. 우리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외면하지 말아야지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적극 도와주어야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 비유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매사에 인종, 국적, 지연, 학연, 재산, 성별 등으로 자신의 이웃을 제한하는 자들을 향해,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직 사랑이, 그런 장벽들을 훌쩍 뛰어 넘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도래했다는 것이지요!

오늘, 그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또 다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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