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 언어가 영성입니다
[장일] 언어가 영성입니다
  • 장일
  • 승인 2019.07.13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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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 목사의 야고보서 강해 10 - 야고보서 3:1~12

서 론 

야고보서 강해 열 번째 시간입니다. ‘언어의 온도’란 책이 있습니다. 10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인데 뒤늦게 지난주에 읽었습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에는 나름의 온도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따뜻함과 차가움의 정도가 다릅니다. 먼저 온기 있는 언어는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합니다.

한 지하철에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앉아있습니다. 할아버지는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는데 볼륨이 너무 컸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 들릴 정도입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손등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말합니다. “여보, 사람들이 많으니까 이어폰을 끼고 보세요.” 할아버지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아, 맞다. 알았어요. 당신 말 들을께요”하며 주섬주섬 이어폰을 꺼내 들었습니다. ‘당신 말 들을께요’ 여러분은 이 한마디가 어떠한 온도로 다가오시나요? 작가에게는 이 말이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오’ 이렇게 들렸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용광로처럼 뜨거운 언어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감정이 잔뜩 실려있기에 듣는 사람의 마음에 화상을 입힐 수 있습니다. 조금 전 할아버지가 만약 다혈질이었다면 어떤 대답이 나왔을까요? “이놈의 여편네야 소리가 크기는 뭐가 커. 그리고 좀 크면 어때? 별것도 아닌 일에 참견하지 말고 그냥 잠이나 자” 아마도 이런 반응이 나왔을 겁니다. 끝으로 얼음장같이 차가운 언어도 있습니다. 이는 상대의 마음을 돌려세우긴커녕 꽁꽁 얼어붙게 만듭니다. 요즘 ‘갑분싸’라는 말이 있는데 혹시 아니나요? 갑분싸는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의 줄임말입니다. 어딜 가든 차가운 언어로 갑분싸를 만드는 분들이 꼭 있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언어의 온도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언어는 우리의 머리 뿐 아니라 가슴에도 새겨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참된 믿음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증명됩니다. 오늘 야고보는 우리의 믿음이 증명되는 자리가 또한 언어생활에 있음을 밝힙니다. 왜냐하면 혀를 잘 통제하는 것은 믿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언어생활을 점검하며 정직하고 진실한 언어로 나아가기를 축복합니다.

 

1. 언어의 중요성

언어가 영성입니다 첫 번째는, ‘언어의 중요성’입니다.

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 우리는 다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3 말을 부리려면, 그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말의 온 몸을 끌고 다닙니다. 4 보십시오. 배도 그렇습니다. 배가 아무리 커도, 또 거센 바람에 밀려도, 매우 작은 키로 조종하여, 사공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5 이와 같이, 혀도 몸의 작은 지체이지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웁니다.

언어의 중요성을 다루기전에 야고보가 먼저 권면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여러분 중에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선생 곧 교회의 지도자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많이 맡긴 자들에게 많이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사역자들은 그 특성상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지금도 저 혼자 말을 하고 있죠?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말이 많으면 그만큼 실언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2절에 누구를 온전한 사람으로 지칭합니까?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 말합니다.

이어서 언어의 중요성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말의 입에 물린 재갈과 배의 키가 그것입니다. 먼저 재갈은 어떻습니까? 재갈은 작지만 말의 입에 물리면 아무리 큰 말이라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배의 키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대한 타이타닉 호도 결국 키를 통해 제어를 받습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혀 또한 이러한 중요성을 지닌다고 말합니다. 분명 혀는 다른 지체에 비해 작습니다. 그러나 혀가 가진 위력은 크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큰 숲을 태웁니다.” 기억나시나요? 우리는 이미 강원도 산불을 통해 이 사실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뉴시스(2019.06.18)

지난달 18일 서울의 한 기독교회관에서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이날 회견에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개신교 원로들이 모였습니다. 회견장에는 ‘크게 염려하고, 크게 통회합니다’라는 제목의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개신교 원로들이 기자회견을 자처한 것일까요? 이날 발표된 성명서에는 한기총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극단적인 이념이나 신념을 기독교 신앙과 뒤섞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복음을 훼손하고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목사가 세속적 욕망으로 정치에 나서려 한다면, 교회나 교회기구를 끌어들이지 말고, 목사라고 내세우지 말고, 한 개인으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개신교 원로들은 회견 내내 굳은 표정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들이 노구를 이끌면서까지 기자회견을 자처한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바로 전광훈 목사의 주장이 마치 한국교회의 신앙이며 목소리인양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다 못해, 통회의 마음을 가지고 입장을 밝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사람이 뱉은 말로 인해 이처럼 한국교회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분명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 경고했지만 누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듯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참된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려움을 갖습니다. 우리의 작은 혀가 숲을 태우는 불이 아닌, 어두운 밤 생명을 인도하는 빛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 언어의 영향력 

언어가 영성입니다 두 번째는, ‘언어의 영향력’입니다.

6 그런데 혀는 불이요, 혀는 불의의 세계입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지체이지만, 온 몸을 더럽히며,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결국에는 혀도 게헨나의 불에 타버립니다. 7 들짐승과 새와 기는 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은 어떤 종류든지 모두 사람이 길들이고 있으며 길들여 놓았습니다. 8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혀의 부정적 측면을 이야기합니다. 6절에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입니다” 이게 뭘 의미할까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불은 모든 것을 태우는 파괴적인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불의의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불의한 일들을 의미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불의한 일들의 근원이 결국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인간의 혀에서 시작됩니다. 혀의 부정적인 영향력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온 몸을 더럽히며,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곧 혀가 인간 존재를 망가뜨리며 우리 인생의 여정에 불을 지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잘못된 말 한마디에 인생이 무너져버린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법정에서 위증의 죄를 엄격하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러시아에 가보면 곰을 반려동물로 키우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키우기에 야생성을 잃어버리고 결국 인간에게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혀는 결코 길들여지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존경받던 한 정치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온갖 혐오와 막말들을 쏟아냅니다. 왜 그럴까요? 더 이상 혀를 통제할 수 없게 된 것이죠. 그래서 야고보는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맹독을 가진 독사가 집안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로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동네 마트 가보셨나요? 일본제품을 모두 회수할 만큼 국민정서도 매우 예민한 상태입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외교적으로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굉장히 조심스럽습니다. 이때일수록 국가 정상간 나누는 말 한마디에 나라의 명운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처럼 언어의 영향력은 절대적입니다.

몽골 속담에 ‘칼이 낸 상처는 아물어도 말이 낸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공감이 되시나요? 언어의 영향력은 우리 개인에게도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영향력을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뭔지 아세요? 혀를 통제하기 위한 노력, 혀를 통제하기 위한 훈련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본능대로 내뱉는 것이죠. 여러분 교회에서는 누구의 입김이 가장 크게 작용할까요? 담임목사입니다. 이어서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순입니다. 물론 이러한 서열이 정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분쟁이 있는 교회들을 가보면 싸움의 근원이 어디에서 시작할까요? 새가족이요? 천만에요. 조금 전에 말씀드린 직분 순입니다.

자신이 뱉은 말이 어떤 영향력을 미칠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기준이 되어야 할 말씀은 사라지고 자신의 감정만 남아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야고보가 혀의 영향력을 부정적으로 설명하는지 이제 아시겠나요? 이만큼 우리는 내가 쓰는 언어의 영향력과 혀를 통제하는 훈련을 중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을 다루기 전에 우리는 이 사실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

언어가 영성입니다 마지막은,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입니다. 

9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 또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11 샘이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있겠습니까? 12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짠 샘은 단 물을 낼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혀의 이중성 곧 일관되지 못함을 지적합니다. 그 모습이 어떻습니까? 9절에 “우리는 혀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참 이상하죠? 분명 같은 입인데 찬양과 저주가 함께 나옵니다. 한마디로 일관성이 없는 모습입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모습을 단호히 배격합니다. 이어서 알기 쉽게 샘과 나무를 비유로 듭니다. 샘은 언제나 일관됩니다.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나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혀는 일관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늘처럼 예배시간에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다른 시간에는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들을 저주합니다. 여기서 ‘저주한다’는 표현을 너무 크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대에게 상처 주는 말, 남과 비교하는 말, 공감과 배려가 없는 말. 결국 이런 말들이 사람들을 저주하는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보면 말을 참 예쁘게 하는 사람과 같은 말이라도 참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계시나요? 저는 목회자이기에 아무래도 목사님들과의 교제가 많습니다. 제 주위에도 크게 두 부류가 있습니다. 가령 개척교회 목사님을 만난다고 해봅시다. 어떤 말을 건네는 것이 필요할까요? “아이고 목사님 그렇게 하니까 목회가 안되지. 아니 그 방법은 하나님이 안 기뻐하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늘 판단하고 정죄하는 말을 합니다. 반면에 위로와 격려의 말을 심어주는 분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많이 힘드시죠? 괜찮아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계세요. 눈에 보이는 게 없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계획하신 때에 반드시 역사하실 거예요.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갑시다.”

어떻습니까? 누구의 말이 위로와 소망을 주는지, 예수를 닮은 하늘의 언어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언어생활은 어떨까요?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성도가 말로 인한 상처를 가장 크게 받는 장소가 어딜까요? 두 곳인데 바로 가정과 교회입니다.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여호와는 나의 목자’ 거실 벽면에 커다란 말씀액자가 붙어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사용하는 언어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인내가 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세상과는 구별된 거룩이 있어야 하지만 타인과의 비교, 실체 없는 소문, 원망과 불평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요즘 채린이와의 대화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닙니다. 한 기사를 봤는데 아이의 언어발달에 아빠의 영향이 크게 미친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정확한 발음과 따뜻하고 안정적인 말투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쉽지 않습니다. 이미 입에 밴 말이라 그런지 날마다 인식하고 훈련해야함을 절감하는 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는 부모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어떻습니까? 하늘 아버지를 닮은 사랑의 언어, 소망의 언어입니까? 아니면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비교와 정죄의 언어입니까? 우리의 입술이 하나님을 찬송할 때나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들을 대할 때나 모두 동일하기를 축복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 언어생활이 말씀과 기도만큼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입니다.

 

결 론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야고보서 강해 열 번째 시간으로 ‘언어가 영성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혀는 작지만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언어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죽음의 언어가 가득합니다. 오늘도 입에서 나오는 화살이 관계를 깨뜨리고 인생을 망가뜨립니다. 생명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언어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언어가 절망에 빠진 자를 일으켜 세우고 삶에 소망을 주는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끝으로 우리의 영성이 깊어질수록 주님을 닮은 입술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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