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예언은 죽은 반복을 부활시키는 새로움이다
[김동환] 예언은 죽은 반복을 부활시키는 새로움이다
  • 김동환
  • 승인 2019.07.08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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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목사의 설교 - 요엘 2:28~32
Michelangelo(1475-1564), 요엘, 시스틴성당, 1508-1512

1. 반복 훈련과 창의성

일러스트 학원을 다닌 지 6개월이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6개월이면 동화책 두 권은 만들 줄 알았어요.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나 봅니다. 이제야 그림의 기초공부가 된 것 같고요, 디지털 페인팅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느낌이에요. 남은 여름, 7-8월 두 달 동안에는 제 그림 스타일을 찾는 게 목표입니다. 그림 공부하면서 느끼는 게 많았는데요, 이게 약간 운동이랑 비슷합니다. 어떤 운동이든 좋은 선생님께 기초를 잘 배우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운 데로 성실하게, 꾸준히 실천하는 거예요. 굉장한 반복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루에 몰아서 많이 하는 것보다 일정한 운동량을 유지하는 게 중요할 텐데요, 그림도 똑같아요. 외국에 어떤 교수님은 신경망을 확장시키는 걸로 설명하더라고요, 그림을 그리는 게 뇌 속에 그림-신경망을 확장시키는 거라서, 움직인 만큼 실력이 느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반복 훈련의 중요성! 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만, 이게 참 어렵죠?

이제 스타일을 찾으려는 생각 하다 보니, 창의적인 그림을 어떻게 그릴까 고민이 되어요. 6개월 정도 그려서 이제 겨우 따라 그리는 건 할 수 있겠는데요, 참신한 생각을 해내고, 내가 상상한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건 정말 다른 레벨인 것 같아요. 이번 주 숙제가 ‘아담과 하와’ 그리기인데요, 저번에 예수님 그릴 때도 막막했는데, 아담과 하와는 좀 더 막막한 느낌입니다. 본 적이 있어야 말이죠. 꾸준히 그리는 습관은 약간 체득된 것 같은데, 창의성, 새로운 생각을 해낼 수 있는 부분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여러분은 반복적인 일을 하는 걸 좋아하나요, 새로운 일을 하는 걸 좋아하나요? 반복적이라는 말이 따분하게 들릴 수도 있겠는데요, 어떠한 삶의 루틴을 만들고 그걸 지키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 있잖아요? 정해진 시간에 일기를 쓴다든지, 운동을 한다던지, 산책을 한다던지, 반복적인 규칙 속에서 안정감을 찾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요.

 

2. 나의 신앙생활 스타일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한번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신앙의 에너지, 동기부여, 힘을 어떤 활동에서 받고 있나요?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것도 규칙적인 라이프 스타일의 하나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묻고, 고민하고, 토론하고, 또 서로의 삶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게 신앙의 힘을 갖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거죠! 더 나아가서, 일정한 시간에 성경을 읽는다던지, 기도를 한다던지, 특정한 활동을 하는 것이 있다면 반복적인 활동에서 더 힘을 얻는 스타일이시겠죠?

저는 시간을 정해두고 하는 것 없고요, 필요에 따라 산책하며 기도하고, 필요에 따라 신앙서적을 읽어요. 20대 때는 성경을 읽으면서 힘을 많이 얻었고요, 지금은 정해진 방식은 없지만 기도든, 산책이든, 독서든, 교제든 때때로 부어지는 은혜에 힘을 얻고 있습니다. 설교도 금요일에 쓰는 날이 있고, 토요일 아침에 쓰는 날이 있고, 토요일 오후나 저녁에 쓰는 날도 있어요. 규칙적으로 하고 싶은데 이게 제 맘대로 안되더라고요 지금은 그냥 토요일은 설교의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일에 무슨 말씀을 나누어야 할지 신호를 빨리 받을 때는 토요일이 행복하고요, 빨리 안 올 때는 쪼금 힘든 날이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설교를 준비하고 작성하는 게 저에게는 의미 있는 신앙훈련이고,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 같아요. 여러분도 관심 있으시면 지금도 충분히 신학교를 가실 수 있어요, 저도 20대 후반에 신학을 시작했으니까요.

반복적인 루틴은 아니지만, 가끔 신앙서적을 읽는다든지,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한다던지, 날을 정해서 기도를 열심히 한다던지, 무언가 새로운 활동으로 힘을 얻는 게 더 큰 분들이 있을 거예요! 이건 사람마다 다 다를 테니, 여러분은 어떠신지 이야기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3. 제사장과 예언자

반복과 새로움의 이야기는 구약성경에도 똑같이 적용이 돼요. 우리가 예수님에게 메시아라고 고백하잖아요? 이때 ‘메시아’라는 말, 뜻이 뭐였죠? 두 가지가 있는데, 단어의 뜻은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란 뜻이에요. 이 단어가 나중에 구약시대가 마치고 중간기 시대에 다윗과 같은 이스라엘을 구해낼 영울 기대하는 이미지로 사용되면서 ‘나중에 와서 구해줄 사람’의 이미지가 더해진 거거든요. 본래 구약에서 메시아라고 하면, 그러니까 기름 부 음 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세 가지의 직분을 말해요. 다윗 했으니까 떠오르는 직분은? 왕이 되겠죠.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우잖아요? 왕뿐만 아니라 두 가지 직분이 더 있는데 바로 제사장과 예언자입니다.

이 제사장과 예언자가 바로 반복과 새로움의 대명사와 같아요! 제사장은 어떤 사람인가요? 공동체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속죄하고 싶을 때, 제사를 도와주는 사람인 거죠? 제사를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일부러 썼어요. 아시겠지만, 키우던 가축을 가져와서 본인이 그 가축을 죽이고 각을 뜨도록 되어있거든요. 현실에서 그렇게 철저하게 진행되진 않은 것 같지만, 어쨌든 율법의 기록으로는 그렇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자기가 키우던 가축이 아니라 성전 근처에 와서 돈으로 제물을 사서 드리는 방식으로 되었고요.

정해진 절기마다, 혹은 개인이 스스로 판단해서 반복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의식을 치를 수 있게 돕는 사람이 제사장이었어요. 이 의식이 실행되는 공간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시겠지만,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르면 안 돼요. 성전은 유대교적 언어이고요, 특정 공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신앙고백을 담아 부르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교회는 건물 개념이 아니라 공동체 개념이지요. 교회건물은 신앙을 공유하고, 성경을 배우고, 서로를 알아가는데 돕는 보조적 역할을 하는 건데, 신앙 활동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는 않고 건물 높이에만 에너지를 쓴다면 문제가 있는 거겠죠?

이게 구약시대에도 똑같이 문제가 되어요. 신앙생활에 반복적인 루틴을 만드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에요. 구약의 가장 많은 지면의 내용이 제사에 관한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서,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오직 ‘반복’ 만이 남으면 이게 문제가 생기는 거죠. 본질은 놓치고 외양에만 치우치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 시대의 성전도 돌과 돌 사이에 금박칠을 했어요. 햇빛이 비추면 찬란하게 빛나는 효과를 보여주려고 말이죠. 하지만 가장 타락한 시대였잖아요? 예수님을 핍박하고 처형한 사람들이 제사장들이었으니까요.

예언자들이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앙이 지속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반복적인 규칙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사람들이 그 의미를 묻지 않고, 반복하는 행위에만 빠졌을 때! 그래서 제사 행위는 있으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있을 때, 이를 경고하고 새로운 자극을 주는 메시아들이 바로 예언자예요.

 

4. 요엘의 외침

요엘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는 뜻의 이름입니다. 성경에 종종 등장하는 이름이에요. 요엘서는 딱히 언제 활동한 사람인지에 대한 배경 설명이 없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주전 8세기의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바벨론 포로 이후 주전 500년, 400년대의 예언자로 보기도 합니다. 배경 파악이 모호한 사람 중의 하나이기에, 역사적 맥락보다는 요엘서 자체의 내용에 집중해야 하는 책이에요. 요엘서의 앞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4 풀무치가 남긴 것은 메뚜기가 갉아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은 누리가 썰어 먹고, 누리가 남긴 것은 황충이 말끔히 먹어 버렸다.

1장 4절인데요, 풀무치, 메뚜기, 누리, 황충 이렇게 다른 이름을 썼지만, 다 메뚜기과의 곤충이라고 보시면 되어요. 그만큼 심한 기근이 왔다는 표현입니다. 이집트 열두 재앙의 하나였던 메뚜기 재앙이 생각날 만큼 큰 문제가 생겼나 봐요. 먹을 농작물이 없어지고, 따라서 성전에 드릴 제물도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심각한 자연재난에 직면한 요엘은 2장에서 이런 진단을 내립니다. 12절부터 14절을 읽겠습니다.

12 "지금이라도 너희는 진심으로 회개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13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주님께서는 은혜롭고 자비 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한결같은 사랑을 늘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많으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거두기도 하신다. 14 행여 주님께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오히려 복까지 베푸셔서, 너희가 주 하나님께 곡식 제물과 부어 드리는 제물을 바칠 수 있게까지 하실는지 누가 아느냐?

요엘은 이 심각한 기근의 상황에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은 진실한 회개라고 외쳤습니다. 요엘서의 주제이기도 해요. 겉으로 회개하는 척하면서 옷만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는 따끔한 충고를 합니다. 상상을 한번 해볼게요. 엄청난 실업의 위기가 저희 교회에 찾아왔습니다. 다들 수입이 없어져서 헌금조차 불가능해졌어요, 교회 공간을 대여할 비용조차 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제가 요엘 예언자 인양 여러분에게 마음을 찢고 회개하라고 외치는 게 맞을까요? 물론 그게 맞는 상황일 수도 있겠지만, 복잡한 현실에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재난상황이 있잖아요? 그래서 아무 때나 ‘내가 요엘이다’ 이런 마음으로 주변사람들에게 빨리 회개하라고 하면 큰일 납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는 요엘 선지자의 진실한 외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기록했고, 이 외침을 반복적으로 읽고 나누며 자신들의 마음을 점검하는 통로로 사용했다는 거예요. 이 예언서를 통해 일반화시킬 수 있는 게 있다면, “사람들은 진실로 회개하기보다는 겉으로 회개하기 쉽다”, 혹은 요엘서 1장에 나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그냥 포기하고 술을 마시며 잊고 싶어 하지 하나님께 진지하게 매달리지 않는다” 이런 내용을 일반화시킬 수 있겠습니다. 이런 상태가 요엘의 외침이 필요한 때이지요.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일반화를 하면 요엘서를 오독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람들이 말을 안들을 때 기근을 주신다, 메뚜기 떼를 보내신다, 벌을 주신다, 이렇게 신에 대한 일반화를 해버리면 차라리 요엘서를 안 읽는 게 나을 수도 있겠어요. 요엘서는 이미 닥친 끔찍한 재난의 상황에 벌어진 공동체의 모습을 보고 예언자가 일갈하는 내용이에요. 자연의 큰 재난 속에 있으면 하나님 앞에 더 깨어있어서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하고 기도하며 서로 힘을 합치고, 신앙적인 갱신이 일어나도 모자랄 판인데…. 사람들은 오히려 성전 예배를 외면하고, 술에 취해서 현실을 잊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엘은 차라리 슬퍼하라, 지금 울어라,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 고 직언을 합니다.

 

5. 예언자를 따라 하려면

그리고 요엘서에는 커다란 반전이 등장하는데요, 좀 전에 읽은 2장 12~14절, 그러니까 “이제는 진실한 회개를 하고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는 내용 뒷부분부터는 희망의 메시지가 되어요. 그전까지는 열심히 지적하고, 훈계하지만, 뒷부분은 절망한 공동체 사람들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인 거예요. 약간 성문서 장르의 시편과 비슷한 구조 같아요. 시편이 앞부분부터 중간까지는 대부분 절망하고, 탄식하는 내용이지만, 끝은 급격한 전환을 말하는 시가 많거든요. 갑자기 하나님을 찬양하고, 갑자기 승리를 외치는 시가 많아요. 예언서가 대체로 시편의 분위기와 비슷해요. 지금은 끔찍한 상황이지만, 결국엔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다라는 반전적인 분위기의 메시지가 많거든요.

만약에 요엘을, 예언자를 코스프레하시려면 이 뒷부분까지 따라 할 수 있어야 해요. 예언자라고 해서, 말씀을 맡은 사람이라고 해서 지적질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남을 비판만 하는 사람들 있죠? 사회를 비판하고, 교회를 비판하고, 자기가 속한 직장, 가정을 비판만 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물론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느 공동체든, 조직이든 내부의 구성원들이 문제점을 지적할 수 없는 구조라면 굉장한 문제가 있는 거저요. 직장이든 가정이든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거예요. 아무도 문제를 말할 수 없는 조직은 썩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본인의 개인적 실천은 없으면서, 희망과 용기를 나누지는 않으면서 무조건 비판하고 지적만 하는 사람들이에요. 예언서를 절반만 따라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아니면 그냥 성격이 안 좋은 사람일 수 도 있겠어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가 어떤 진실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예언’을 해야겠죠. 요엘 예언자가 삶으로 아무런 티가 안 나는데,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데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외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었을까요? 사람들은 단번에, “네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이런 말을 해?”라고 반문할 거예요. “안 그래도 먹을 거 없어서 금식하고 있는데, 또 금식하라고?” 이렇게 비꼬는 말을 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요엘의 메시지가 정경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동체 안에 기록되고 공유되어 왔다는 건, 당시의 사람들도 그의 이야기에 경청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게 해요. 요엘이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우리는 상상밖에 할 수 없지만, 이런 지적하는 말, 그리고 희망의 말을 말할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건 충분이 유추해볼 수 있는 거죠. 삶 속에서 보이는 진실한 노력, 하나님과 사람에게 향한 진심 속에서 지적하고 위로하고, 새로운 희망을 말할 때 우리는 예언자를 닮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6. 하나님의 영

오늘 읽은 부분은 요엘서의 하이라이트와 같아요. 굉장한 새로움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왔을 메시지예요. 하나님의 영이 모든 사람에게 부어진다는 이야기잖아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앞서 이야기한 메시아에게, 그러니까 하나님이 택한 소수의 리더에게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요. 요엘과 같은 예언자가 하나님의 영에 붙들린 사람으로 이해되는 거죠. 그런데 요엘은 이 하나님의 영이 모든 사람에게 부어줄 것을 말해요. 자녀들이 예언을 하고, 노인들이 꿈을 꾸고, 젊은이들이 이상을 볼 것이다. 심지어 종들에게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 임할 것이다.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소수의 리더에게만 부어진다고 믿었던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되나요? 세대를 넘어서, 남녀를 넘어서, 신분을 넘어서 임한다고 그래요. 고대 세계에 선포된 메시지라고 생각하면 엄청나게 급진적인 이야기죠. 세대 간의 갈등, 남녀 간의 갈등, 신분의 갈등은 근대, 현대사회의 주된 이슈인데 예언서가 미리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모두에게 임할 것이다.

요엘의 이 메시지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너무나 특별하고 새로웠을 거예요. 신앙에 관한 모든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고민을 하게 만들며,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드는 메시지로 와 닿았을 거예요. 여러분은 세대 간의 갈등을 넘어서기 위해서, 남녀 간의 갈등을 넘어서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종은 우리 시대에 없으니까, 조금 다르게 적용한다면, 사회에서 다양한 직분의 벽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계급의 차이를 넘어서기 위해서, 다시 말해 갑질을 넘어서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영’이 모든 사람에게 부어진다는 메시지를 가장 잘 실천하지 못하는 특수한 공간이에요. 신앙의 선배들과 청년들은 신앙의 내용을 서로 공유하질 못하고 있어요. 기독교의 단어들은 같이 쓰고 있지만 전혀 다른 내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남녀문제는 그래도 사회보다 앞서가고 있지 않나요?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청년부 안에서는 그래도 좀 괜찮은 것 같아요. 저희도 회장님이 여성분이시죠? 하지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은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아직도 주지 않죠. 요엘 선지자님의 호통이 좀 필요할 것 같아 보입니다. 왜 여성은 목사가 될 수 없을까요? 저도 이해가 안 가요. 장로회 통합은 제도적으로는 가능한데요, 현실적으로는 비슷해요. 여성 목사를 교회에서 잘 부르지 않아요. 여러분 청년시절에 교회 다니면서 여성목사님께 지도받은 경험이 있나요? 어린 시절 교육파트에서는 보셨겠지만, 청년, 장년을 섬기시는 여성목사님은 많지 않아요. 일반사회보다 변화의 속도가 훨씬 늦다고 생각해요. 이런 면에서 요엘 예언자의 오늘 본문의 예언이 다시 교회 안에서 되살아나야하한다고 생각해요.

 

7. 전체적으로 성경을 읽기 위해

오늘 본문의 뒷부분을 살펴볼게요. 30절에 등장하는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란 단어를 보면 혹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나요? 31절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요한계시록의 언어와 비슷하죠? 3장 15절에도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둔다는 표현이 있어요. 하나님의 심판을 표현하는 예언서의 독특한 말들이에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가면서 전쟁을 하잖아요? 그때 태양을 멈춥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탈출할 때도 태양이 가리어져서 어두워진 일이 있었죠? 마지막 재앙 때는 각 집의 장자를 살리고 싶으면 문 앞에 피를 발라야 했어요.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해준 불기둥, 구름기둥의 이야기도 있고요. 이 이야기들은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의 본질이에요. 태양이 실제로 멈췄냐, 안 멈췄냐가 중요한 사항이 아니고요, 물론 실제로 멈춘 건 아니겠죠. 하지만 태양이 멈췄다는 말은 이집트의 절대권력이 하나님의 권능 앞에 무력하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해와 달과 별, 불 이 모든 게 신성화되어서 신적 존재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고 있는 고대 세계에서 외친 신앙고백이라는 걸 알고 있어야 해요.

구약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그 모든 거짓 신들이 사실은 아무 힘도 없는 자연 그 자체이지만,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 허상이라는 게 드러나는 사건이거든요. 그러니까 별이 빛을 감춘다, 해가 떨어진다, 이런 신앙고백들이 예언서에 등장하는 거예요. 다시 말하자면, 모세 오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의 스토리들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요, 이 스토리들을 가지고 말하는 시적인 신앙표현들을을 읽어낼 수 있어야 예언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 예언서를 바르게 읽을 수 있어야 신약성경 또한 바르게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할 일이 많죠? 그냥 다 됐고, 태양은 실제로 멈추는 거고, 마지막 날에 태양이 떨어질 거고, 지구보다 태 야이 비교도 안되게 큰데 어디로 떨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연재난이 나면 다 하나님의 심판인 거고… 이렇게 가면 생각이 편하긴 한데, 결코 신앙적으로 올바른 이야기가 아니에요. 문자적으로 읽는 게 신앙적으로 열심인 사람이 아닌 거고, 오히려 성경을 읽는데 정성이 부족한 사람인 거죠. 거짓 열심이에요.

 

8. 새로운 열정으로

말씀을 마무리할게요. 오늘 요엘 예언자의 메시지를 교회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 사건으로 받아들여요.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님이 오셔서 교회 공동체가 시작되었다고 기독교는 고백하거든요. 유대교인들은 아마도, 아직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지 않았다고 할 거예요. 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저희는 하나님의 영의 일은 이미 시작되었고, 진행 중이라고 믿는 데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모든 세상적 가치관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진심으로 나아가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의 손길이 임하리라 믿는 건 중요한 일이에요. 여러분 스스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정체성,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을 받는 신앙의 리더라는 정체성이 있어야겠죠.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의미 없는 반복으로 주일예배에 오지 않길 바라요.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 무언가를 노력하고, 때로는 절망하지만 또 희망을 보고 달려가다가 마주하는 주일예배는 의미 없는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의미 있는 반복이 될 거예요. 아무런 노력도, 실천도 없이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을 목표로 한다면, 이번 주 중에 꿈속에서 요엘예언자님이 나타나셔서 여러분을 혼낼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이 세대를 넘어서, 남녀를 넘어서, 신분과 계급을 넘어서 모두에게 흘러갈 것이라는 새로운 외침. 이 요엘 예언자의 새로운 외침을 대언하는 저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예언이 필요한 곳에 가서 삶으로, 언어로, 사랑으로 예언을 하는 저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닿을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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