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새로 지으심 받는 것
[이택환] 새로 지으심 받는 것
  • 이택환
  • 승인 2019.07.07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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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갈라디아서 6:11~18
Valentin de Boulogne(1591~1632) "Saint Paul Writing His Epistles"(1618~20)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서로에게는 사랑을!” 이 유명한 경구를 남긴 사람은 우리에게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17세기 독일 신학자 멜데니우스입니다. 멜데니우스(Rupertus Meldenius, 1582-1651)의 이 유연한 사고가 17세기 초, 유럽의 온건한 개신교 신학자들 사이에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당시 유럽은 교회사적으로 정통주의 논쟁이 한창이었는데, 정통과 이단이라는 편 가르기에 따라,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시대였지요. 그런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도, “비본질적인 것에 개의치 않았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기독교에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통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귀합니다. 오늘날 개신교가 배타적이라고 하지만 사실, 예수님은 편협한 분이 아니시지요. 한 번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말합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기에, 제가 못 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금하지 말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면, 꼭 일치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양한 게 틀린 게 아니지요. 그런데 오늘날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비본질적인 것까지 자기 생각과 일치하지 않으면 서로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미국의 어떤 이민 교회는 교회당을 짓다가 큰 싸움이 일어나 분열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문제의 원인은 아주 사소한 데, 예배당 카펫을 빨간색으로 할 것인가, 파란색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고 합니다.

요즘 개신교는 협소한 신앙 때문에, 하나님 사랑을 이웃에게 잘 보여주지 못하는 면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 툭하면 분노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몇 년 전 국내의 한 유명 커피전문점이 업계 최초로 할랄 인증을 받자, 해당 커피전문점 불매운동을 해야 한다는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할랄 인증을 영적 전쟁 차원에서 본 것이지요. 할랄 산업의 성장이 무슬림들의 국내 유입 증가로 이어질 것이고, 그런 식으로 이슬람 문화가 우리나라에 유입되면, 기독교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입니다.

특정 회사가 할랄 인증을 받고 안 받고에 따라, 기독교가 죽고 사는 것처럼 말하는 건 기우입니다. 사소하고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기독교가 일일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지나친 일이지요. 하지만 한편, 아무리 지나쳐도, 만약 기독교의 본질이 훼손된다면, 그 사안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갈라디아서의 결론 부분인데, 바울의 입장은 처음부터 확고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7-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하늘로부터 내려 온 천사라도 너희에게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받을 찌어다!”

도대체 어떤 사안이기에 그가 그토록 단호했던 것일까요? 할례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말씀 15절에서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좋다는 게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사실상 유대인의 고유한 민족적 표지입니다. 따라서 당시 유대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할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할례를 강요했다는 것은, 사실상 유대인이 되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반대로,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 할례 받지 말라고 강요한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복음이 유대에서 나왔기 때문이지요. 예수님도 유대인이고, 사도들과 바울을 비롯한 초기 복음전도자들 다 할례 받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들 중 일부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한 데 있었습니다.

바울이 문제 삼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복음이 죽고 사는 본질이 거기 있다고 그가 본 것이지요. 그렇다면 당시 할례는 오늘날 할랄과 달리, 정말로 복음의 본질과 관련된 중차대한 문제였을까요? 바울은 복음의 본질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지 못할 인류, 즉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하지 못할 사람이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자나 무할례자가, 아무런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할례를 강요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해도, 단지 이류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일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네, 할례 받아, 유대인 그리스도인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벽한 차별입니다. 바울은 이런 복음은 가짜 복음이며,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할례파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부추긴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할례 받음으로써, 유대인의 박해를 면하는 데 유익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기독교 초기에는 로마 제국의 박해보다 유대인들의 박해가 더 컸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의 바울의 고생담에도 그 사실이 잘 나와 있습니다.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하지만 박해의 순간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할례 받았다고 해서, 유대인의 박해를 면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할례 받지 않아서 유대인들에게 박해받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할례 받은 유대인이, 율법을 파괴하고 성전을 조롱 한 거짓 메시아를 따른다는 이유로 더욱 박해 받기 쉽습니다. 따라서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할례를 받아도 박해를 모면하는 데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었습니다. 단지 복음만 훼손시킬 뿐입니다.

어쩌면 할례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선교적 자랑을, 할례 받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머릿수에 두었는지도 모릅니다. 즉, 얼마나 많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할례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는가를 그의 선교 업적으로 자랑하는 것이지요. 신대원 시절, 한 신학생이 제게 자신의 수첩에 적힌 깨알 같은 전화번호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길거리 전도를 하면서 예수님 영접기도를 받아낸 사람들의 전화번호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전도한 실적이라며 자랑하더군요. 그러나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전도한 사람들의 숫자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했던 죄인의 괴수,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인류를 구원해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 바로 그분의 사랑이 집결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는 그가 이전까지 자랑해 온 그 어떤 것들도, 아무 것도 아닌, 단지 배설물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로 인해 세상이 내게 대하여 죽고, 세상에 대하여 내가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세상의 모든 자랑거리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이 참된 복음, 즉 진실로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은, 그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새로 지으심 받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그렇게 우리가 새로 지으심 받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통해, 어떻게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일류 백성이 될 것인가? 또는 유대인들의 가혹한 박해를 어떻게 피해갈 수 있는가?를 다루는 어떤 전략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죄로 인해 심판 받을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최고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 때 우리도 세상도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서 같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심판받은 우리와 온 세상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세상, 새로운 창조세계로 나아갑니다. 지금은 비록 온갖 시련과 어둠과 혼돈 속에 있지만, 왜?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창조 세계가 아직은 마치 작은 겨자씨와 같아서, 눈에 띄지도 않고 너무나 쉽게 무시당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창조의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마침내 그 새로운 창조세계가 온 세상에 더욱 풍성해지고 가득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마지막 때에 반드시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이야기이지요.

갈라디아서는 흔히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불립니다. 갈라디아서를 읽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갈라디아서를 읽어도,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이 되기보다, 오히려 부자유스럽고 율법적이고 편협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그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서로에게는 사랑을!”이라는 멜데니우스의 경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경구를 통해 좀 더 생각해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과연 누가 진정한 자유와 참된 사랑을 누리고 또 전할 수 있는가?입니다. 자유와 사랑 이전에, 무엇이 본질인지 올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갈라디아서를 통해 바울이 우리에게 그것을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무엇이 본질인가, 즉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 새로 지으심 받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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