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만희] 빈 자리를 새롭게 하는 일
[박만희] 빈 자리를 새롭게 하는 일
  • 박만희
  • 승인 2019.07.0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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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희 전도사의 설교 - 요한복음 16장 12~15절

하나님의 선하신 영이 우리 모든 삶에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앞에 보이는 그림은 삼위일체에 관한 유명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예전에 감탄하면서 설명을 들었는데, 다 잊어버렸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예배 후에 천천히 살펴보셔도 좋겠습니다. 삼위일체 주일엔 무엇을 나누면 좋을까요. 삼위일체 주일을 맞아서 지난 시간들을 천천히 되짚어보면 교회력 한 회기가 전부 끝나간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대림절을 시작으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등을 우리는 차례로 보내왔습니다. 오늘 이후 우리는 다음 대림절까지를 성령강림절로 보내게 됩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각각의 절기는 저마다의 의미를 지닙니다. 지금 다시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교회력은 예수님의 오고 가심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그 흐름 안에서 복음이 갖는 여러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얼마 전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으니 이제는 그 이후를 다룰 차례입니다. 아시다시피 그 이후는 성령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성령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력은 성령을 주제로 하는 동시에, 그 중심을 예수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깁니다. 물론 다시 복음서로 돌아가 예수님이 삶과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테지만, 그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성령이 내주하는 한 인간을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령강림절 동안 우리는 악한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영이 우리 안에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흠이 없는 천사가 될 수는 없겠으나 그렇다고 스스로를 방치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영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성령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행위가 아닙니다. 승천한 예수를 멍하니 쳐다만 보지 말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는 자는 마냥 하늘만 쳐다보지 않고 몸으로 그 나라를 삽니다. ‘나 좀 어떻게 해 달라. 이 세상 좀 어떻게 바꿔 달라’고 말하기보다는 우리를 추동하는 성령을 따라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생각할 겁니다. 성령은 그러라고 예수님이 주신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는 성령을 초대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잠시 멈추는 겁니다. 돈, 가족, 타인의 시선, 우리의 욕망 등이 뒤엉켜 나를 움직이는 게 진짜 나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흘러가는 삶을 멈춰보는 겁니다. 침묵과 성찬, 함께 읽는 말씀과 노래 등 이물질이 정신없던 삶에 끼어들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잠시 멈춤 버튼을 누르는 겁니다. 잠시 멈춰서 내가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지를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서 생각해보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던 삶에 하나를 더하는 시간이 아니라, 빼는 시간으로 삼는 겁니다. 그건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마치 서로가 자석처럼 이 식탁에 서로를 끌어당기며 함께 새로운 삶을 꿈꾸고, 꿈꾼 그것을 말로 내뱉어 구체화하는 겁니다. 다른 것들이 가득 들어차 있던 우리 삶에, 하나님의 영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겁니다. 본문을 보면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본문은 사실상 지난주와 대동소이합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눈에 잘 들어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읽다보면 멍해지는 말씀입니다. 같은 본문을 준비하던 친구는 제게 전화를 걸어서 도무지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네 구절 밖에 안 된다는 게 고마울 정도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요.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전해줄까요. 본문 첫 절인 1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2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재미있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다소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할 말이 많은데 다 못하고 간다는 겁니다. ‘아직도’라고 말씀하신 걸 보면 남은 말이 있다는 겁니다. 재미있지 않나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면, 충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한다고 했는데 부족하다는 겁니다. 할 말이 더 있는데, 다 못했다는 소리입니다. 저는 이거 재미있고 독특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가르칠 것이 남았는데 다 말하지 못했다는 뜻이니까요. 이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기독교인들은 성서 안에 모든 답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어떤 우리는 성경을 법전으로 여깁니다. 성경이 법의 근간이 되는 헌법일 뿐만 아니라, 민법, 사법, 형사법 등 오늘날 경험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실정법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그런 생각은 성서에 대한 굳건한 믿음에서 나옵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교훈을 하나님이 성서에 전부 기록하셨다는 겁니다. 빠짐없이 말입니다. 그런 확신에는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의 구호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 구호가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말입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해서 논쟁이 일어나면,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 성경구절을 복사해서 가져다 붙입니다. 그게 정답이라는 겁니다. 말씀이 여기 있으니 입 다물라는 겁니다. 논쟁 따위 필요 없다는 겁니다. 상황에 대한 이해도, 사람에 대한 배려도 필요 없습니다.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만 중요할 뿐입니다. 삶에 관한 모든 정답은 때와 장소와 무관하게 성경에 담겨있다는 겁니다. 분야를 가리지 않습니다. 경제, 정치는 물론이고 과학, 가정, 결혼, 출산, 환경, 음식 등 모든 대답이 성경에 들어 있다고 혹자들은 말합니다. 가장 비근한 예가 여성의 안수문제죠. 성경이 정해놓았으니 여성은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가톨릭이나, 장로교 합동 측 쪽은 성경이 정해놓았으니 여성에게 안수를 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 얼마 전에는 저에게 성경적으로 이혼해도 되느냐고 심각하게 묻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가톨릭은 이혼 금지입니다. 성경이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처럼 이혼이 많은 시대에 필요한 교훈처럼 보이지만 사실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상습적으로 폭행하는 남편이 있더라도 아내가 참아야 합니다. 그게 미덕이 됩니다. 성경 말씀을 지키게 해주니까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하실 지도 모르지만, 확언하건대 지금도 그런 설교는 넘쳐납니다. 여러 각도에서 생각이 가능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성서는 규범인 동시에 법전이고, 또 모든 정답이 들어있는 백과사전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라고 말씀합니다. 남은 말이 있는데, 다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그게 뭘까요. 교훈이든 규범이든 계명이든 그게 뭐든 다 하지 못한 말씀이 있다는 데 그게 뭘까요. 뭔지는 모르지만 빈 칸이 남았습니다. 저는 이 빈칸을 우리가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이나 규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같은 것들이 침범할 수 없는 공간이니까요.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바탕으로 무궁무진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니까요. 이 빈공간을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우선 이 점을 말해야겠습니다. 성서가 모든 일에 대한 정답을 말해준다는 생각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든 걸 말해주고 지시하는 백과사전이나 실정법이 아닙니다. 때로 성서는 정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성서의 주제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경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에서 우리는 토지와 인간에 관해 소중한 교훈을 배울 수 있으니까요.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는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법전이나 백과사전이 아닙니다. 과학서적은 더더구나 아니죠. 우리는 성서에서 뇌과학이나 물리학 혹은 생물학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천체 물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가 지닌 세계관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니까요. 성서는 가족에 관해 말하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전부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성서는 법의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소중한 도움을 주지만 그 자체가 법은 아닙니다. 성서는 성별에 관해 말하나,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성서는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폭로하지만, 죄의 목록을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관해 말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에 관한 전부일 수는 없듯이 말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심지어 성서는 때로 성차별적이며, 노예제를 인정하고, 전쟁을 하나님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성서를 버려야 할까요. 성서가 그 자체로 규범일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 말씀일 수 없는 걸까요.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하려면 전적으로 그래야 하고, 그럴 수 없다면 성서가 하나님 말씀이라는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게 당연한 걸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표현의 한계는 있겠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성경은 결론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입니다. 또 이렇게도 표현하면 어떨까요. 성서는 실정법이 아니라, 그것의 근간이 되는 헌법이라고 말입니다. 성서는 대답이 아니라 물음이고, 결과가 아니라 원리인 겁니다. 예수님이 그때 당시 성서였던 구약을 그렇게 대했습니다. 성서는 법이나 백과사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계속되는 우리의 믿음이고, 예수를 따라 살기를 소망하는 자들의 끊임없는 고백입니다.

 

어쩌다보니, 삼위일체와 성령에서 시작했는데, 성경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무슨 이유로든, 예수님이 남겨놓으신 빈 칸들을 어떻게 하면 될까요. 구약을 빌려오든, 바울을 데려오든 해서 어떻게든 채워 넣으면 될까요. 어떻게든 빈 칸을 없애버리면 될까요. 13절을 초반부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뜻은 분명합니다. 남겨놓은 빈 칸은 진리의 영, 곧 성령이 채울 거라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조금 독특한 점이 있다면, 지난주 본문은 성령을 보혜사로 표현하는 반면, 오늘 본문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한다는 겁니다. 우리야 보혜사니 진리의 영이니 하는 말에 별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한 성령을 다르게 표현한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겁니다.

진리는 앎(아는 일)과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을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면 알게 하는 영, 깨닫게 하는 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무엇을요. 예수님이 전부 말하지 못한 무엇 말입니다. 어떤 이유로 예수님이 빈 칸으로 남겨놓은 무엇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예수가 다 가르치지 못한 일을 가르치는 영입니다. 모르던 것을 알게 하는 겁니다. 조금 더 익숙한 방식으로 말하자면, 진리의 영은 예수님을 알게 하는 영일 테고, 오늘 설교 방식으로 말하자면 예수님 안에 남아 있던 말씀을 알게 하는 영 일겁니다. 그게 뭘까요.

모릅니다. 하지만 빈칸 안에 무언가를 집어넣어 볼 수는 있을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관심 없어 하던 누군가의 소식인지도 모릅니다. 내 가족 바깥에 사는 누군가의 소식일지도 모르죠. 이를테면 홍콩 말입니다. 어제 제가 본 한 영상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응답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알아야 할 건, 애타게 부르짖는 누군가의 소리일지도 모릅니다. 깨닫지 못하면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누군가의 삶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여성과 남성의 생식기 모두를 가지고 태어나는 누군가의 인생처럼 말입니다. 분명이 있는데 드러나지 않아서 없다고 여겨지는 삶 말입니다. 독일은 알았기 때문에, 한국이라면 주민번호 1, 2로 밖에 표시되지 않는 시민의 삶에 그들을 위한 다른 법을 제정했습니다. 몰랐다면, 그들은 1, 2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삶을 살아야 했겠죠. 분명히 있는데, 없음 취급당하는 존재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합법적으로 내버린 쓰레기들에 파묻혀 죽어가는 뭇 생명들의 목숨은 어떤가요. 돈 주고 사서 쓰는 플라스틱에 파묻혀 죽어가는 생명들의 숨소리 말입니다. 하나님이 알지 못했다면, 그대로 이집트에서 살았을 노예들의 삶처럼 말입니다. 굳이 멀리가지 않아도 ‘몰랐다’는 이유로 외면 당하는 고통은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아주 가까이에 말이죠. 어쩌면 이곳에도 여전히 우리가 알기를 애써야 할 모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은 나 바깥의 존재하는 타자를 깨닫고 겸손하게 배우도록 하는 영인지도 모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모름은 단순한 모름이 아닙니다. 모름은 얼마든지 거대한 악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모름은 의도적인 게으름이고 그래서 악에 대한 방조일지도 모릅니다. 국회 청문회에서, 티비 뉴스에서 모른다는 말이 어떻게 쓰이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물론 전부를 알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나라 도시 이름도 다 모르는 판에, 홍콩 챙길 때가 아닐지도 모르죠. 홍콩 말고도 세계 도처에는 내전으로 죽어가는 셀 수 없는 목숨이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모든 지식과 정보를 전부 아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압니다. 어느 영화에서처럼 뇌가 백프로 발동해서, 온 세상 모든 정보를 다 알게 된다 한들 그게 성령의 역할은 아닐 겁니다. 그건 그냥 정보가 많은 거겠죠. 그게 우리를 바꾸지는 않을 겁니다. 성령은 정보나 데이터의 영이 아니니까요. 성령은 아는 일 때문에 우리를 바꾸는 영입니다. 성령은 ‘사랑’을 알게 하는 영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남겨놓은 빈칸으로 초대받는 순간들이 있겠죠. 성경구절을 복사해서 붙일게 아니라, 진리의 영에 추동된 우리의 대답을 내어놓아야 할때가 있습니다. 기존에 알던 앎이 새로운 앎으로 바뀌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빨갱이들에 선동된 결과 인줄만 알았던 제주와 광주의 죽음이, 사실은 국가가 앞장선 학살이었다는, 새롭게 알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 무엇이 죄고, 무엇이 죄가 아닌지에 대한 개념보다는, 삶에 대해 알고 말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인데, 삼위일체를 잘 말씀드릴 자신이 없어서 곁길로 조금 샜습니다. 저는 삼위일체를 교리적으로 말하는 데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인데 셋이고 셋인데 하나인 말로 다할 수 없는 신비만을 말하는 일에는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삼위로 존재한다면 그 방식 배우든지, 삼위일체가 우리와 무슨 상관인지를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방식은 무궁무진 한데요. 삼위일체를 인간의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신비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당연함과 앎에 갇히지 않는 하나님을 뜻하는지도 모릅니다. 당신과 나 사이의 당연함에 갇히지 않는 하나님 말입니다. 당연한 걸 지키는 일은 사실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연스러움 속에 숨은 악을 폭록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앎이 되어 우리에게 도착했죠. 내게 당연하지 않았던, 즉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와 타자를 깨달아 아는 일이, 성령이 우리안에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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