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배척(排斥)
[이택환] 배척(排斥)
  • 이택환
  • 승인 2019.07.0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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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누가복음 9:51~56

누가복음은 오늘 말씀 9장 51절부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우리교회도 지난 3월 첫 주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지요. 서대문구 창천동에서 마포구 서교동으로 교회가 이전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부도 카페바인에서 빅퍼즐문화연구소로 바뀌었구요. 장소 변화가 주는 국면전환은 생각보다 큽니다. 홍대 쪽으로 오니까 교회가 좀 더 젊어진 느낌이 듭니다. 저만 그런 건 아니겠죠? 누가복음 역시 오늘 말씀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사역 장소가 바뀝니다. 예수님 일행은 지금까지의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하고, 이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는데, 51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지금까지 예수님 일행은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갈릴리 일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유하는 하나님 나라 사역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정하시고, 그곳을 향해 나아가기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카페바인을 떠날 때, 저나 운영위원회가 무슨 굳은 결심을 하고 떠난 게 아닙니다. 카페바인이 나가라고 하니까 나간 것이고, 또 여기 온 것도 우리가 홍대 일대를 전도해야겠다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 온 게 아닙니다. 카페바인이 혹시 여기가 괜찮지 않겠냐고 소개해 주어서 온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 일행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스스로 굳게 결심하신 바 있으셔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굳은 결심을 하신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51절은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라고 설명합니다. 승천(아날렘프시스)이라는 단어는 하늘로 들림 받다라는 의미가 있지만 그 외에도 죽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약(헤메라)이라는 단어는 어떤 약속이 아니라 기한, 날짜, 때를 뜻합니다. 즉, 예수님이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꼭 예루살렘을 보아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종종 여행사 마케팅 중에 소위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라는 리스트가 있습니다. 유럽에도 있고, 미국, 캐나다, 호주에도 있던데, 우리나라에도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휴게소가 있다고 하지요? (죽전휴게소!)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단지 죽기 전에 꼭 가봐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죽으러 가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종종 여행하다 사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최근에도 헝가리에서 그런 안타까운 일이 있었는데, 그럴 줄 알았다면 아무도 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부터 죽으실 줄을 아시고, 작정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그러기에 굳은 결심(스테리조)이 특별히 필요했던 것이지요.

오늘 말씀의 핵심 주제는 배척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신 것도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그곳의 유력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율법을 모독했다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사두개 제사장들은 성전파괴주의자라고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반로마주의 선동자로 배척합니다. 군중들은 이리저리 휩쓸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제자 유다는 자신이 기대한 메시아가 아니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다른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납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배척했을까요? 예수님을 잘 모르고 오해하고 착각해서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신 분인 줄을 몰랐기에, 율법을 모독한 분으로 오해했습니다. 제사장들 역시 예수님이 새로운 성전 되실 분인 줄을 몰랐기에, 예수님을 성전파괴주의자로 착각했습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이 유대인 뿐 아니라, 로마인과 모든 이방인들을 죄에서 해방시키실 메시아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정치선동자로 오해한 것입니다. 군중들 또한 예수님이 누구신줄 몰랐고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기에 그렇게 예수님을 배반하고 부인하고, 져버렸건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우리가 배척하고 있는 사안들 가운데, 혹시 우리가 잘 몰라서 오해하거나 착각하고 있는 것은 없는가를 돌아보게 합니다. 배척이라는 말은 반대하거나 거부하여 밀어 내친다는 뜻입니다(밀칠 排, 물리칠 斥). 물론 우리가 마땅히 배척할 것이 있다면 배척해야 합니다. 가령 이단 사이비를 배척해야지, 우리가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생각과 다른 사안에 대해 충분히 알아보기도 전에 배척부터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방식으로 억울하게 배척당하시고 희생당하셨는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타인을 배척하는 격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배타적인, 종교가 기독교이고, 또 가장 배타적인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분당 모 교회 부목사 한 분의 설교가 회자되고 있습니다. 설교의 요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동성애를 반대하더라도, 퀴어 축제에 가서 바닥에 드러눕는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무례함이 오히려 기독교 혐오를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그리스도인들은 건전한 가정,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설교자가 동성애를 어떻게 보느냐와 별도로, 설교 자체는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설교자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성애 옹호 목사, 심지어 좌파 빨갱이 목사로 몰려, 당분간 목회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분은 동성애 옹호 목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게다가 좌파목사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소련은 스탈린 시절 동성애를 부르주아 타락의 산물로 처벌했고, 중국도 덩샤오핑 때 형사처벌까지 했습니다. 몇 년 전 북한도 동성애자를 처벌한다는 보도가 있던데, 그 부목사를 좌파 빨갱이 목사로 모는 것은 거의 바보가 아니고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앞장서서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 법학박사, 의학박사 같은 소위 지식인 크리스천들입니다. 기독교 배타주의에 눈 먼 사람들이지요.

한편 오늘 말씀은 타인이 그리스도인들을 터무니없이 배척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돌아보게 합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당장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사마리아는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었을 때, 북 이스라엘의 오랜 수도였습니다. 그 후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하자 앗수르 식민이주정책에 따라, 사마리아인들이 이방인과 뒤섞이게 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과도 늘 적대적이었는데, 주전 128년에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에 쳐들어가 그들의 성전을 파괴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사마리아 땅의 한 마을로 들어서자, 그들이 당장 예수님 일행을 배척합니다.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우린 유대인들이 싫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는 것이죠. 십여 년 전에 아차산역에서 장신대로 가는 길에 한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광진구청에서는 그 길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아파트 건축을 허가했는데, 몇 년 후 아파트가 일방적으로 그 길을 폐쇄했습니다. 학생들이 아파트 한가운데 지나가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것이지요. 결국 법정까지 가서 장신대가 승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일행은 호소할 법정 같은 게 없습니다. 즉시 그 지역을 벗어나는 길 밖에 다른 방도가 없어요. 안 그랬다가는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화가 치밀어 올랐나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건의합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몽땅 태워 버릴까요?” 이것은 그들이 즉석에서 생각해 낸 것은 아닙니다. 과거 엘리야 선지자가 사마리아 군대에 불을 내려 50명씩 두 번 100명을 죽게 한 일이 있었거든요(왕하 1장). 마침 이곳이 사마리아라, 야고보와 요한은 엘리야보다 능력 있으신 예수님을 통해, 그들에게 강력한 보복을 감행함으로써, 실추된 위신을 세우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야고보와 요한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갑니다. 우리도 운전하다 보면 깜빡이도 켜지 않고 갑자기 끼어드는 사람들이 있지요. 저도 그들에게 경적을 울리거나 하이 빔을 쏘면서, 강력한, 실은 소심한 차내 응징을 하곤 했는데, 요즘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자동차를 망치로 부수는 더 큰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고 해요.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신 예수님은 저도 꾸짖으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고난을 받아 죽으러 가시는 예수님과 그 분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보복이나 응징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누가복음 기자는 제자들을 비롯해서 유대인들이 미처 보지 못한 배척받는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님의 특별한 시각을 보여줍니다.

Vincent van Gogh(1853~1890), 선한 사마리아인(1890)

먼저 눅 15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레위인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닌, 저 사마리아인을 오히려 유대인의 참된 이웃으로 제시하십니다. 또한 눅 17장에서 예수님께 고침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가운데, 예수님께 나아와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정작 유대인이 아닌, 오직 사마리아인 한 명 뿐이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런 예수님의 언행심사를 통해, 그동안 사마리아 사람들들 배척해온 유대인의 행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고발합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사마리아 땅에서 배척당하신 지 불과 몇 년 뒤, 그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됩니다(행 8장).

사마리아 복음전도는 초대교회 빌립 집사의 헌신과 베드로, 특별히 요한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만약 요한이 몇 년 전, 예수님을 통해 사마리아 땅에 불을 내려 사마리아 사람 수백 명을 태워 죽였다면, 과연 나중에 사마리아 전도가 가능했을까요? 우리를 배척하는 이들에 대한 보복과 응징이 당장은 통쾌함을 줄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평생, 혹은 영원히 후회할 씨앗을 심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아마 요한은 나중에 사마리아 전도를 하면서, 예수님이 과거에 자신을 꾸짖어주신 일에 깊이 감사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이 근거 없이 타인을 배척하면 안 되지요. 우리 주님이 그런 자들에 의해 희생당하셨습니다. 그런 억울한 희생자들을 더구나 예수님을 따른다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또 우리가 억울하게 배척당한다고 해서, 즉각 보복하고 응징하려 해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기도는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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