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욱] ‘환대의 해석학’으로의 회심을 감행할 용의는 없는가?
[정한욱] ‘환대의 해석학’으로의 회심을 감행할 용의는 없는가?
  • 정한욱
  • 승인 2019.06.14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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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어크로스,
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어크로스,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인 저자는 이 책의 서두에서 2012년 <표현의 자유를 위한 정책 제안 보고서>의 집필에 참여하면서 처음 혐오표현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처음에 연구자로서의 지적 호기심에 가까웠던 태도가 일베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을 계기로 ‘혐오의 시대’가 도래하고 혐오표현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소수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조금씩 바뀌어갔다고 말한다. 

저자는 혐오표현이 “영혼의 살인”이나 “말의 폭력”, “따귀를 때린 것”에 비유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왜 혐오표현이 폭력이 되고 영혼을 죽이는 일이 될 수 있는지 독자들이 공감한다면 이 책을 쓴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표현의 자유는 옹호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혐오표현을 적절히 규제하는 것도 우리의 과제이며, 이 복잡한 문제를 하나하나 분석해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라고 강조한다. 차분한 논리만큼이나 뜨거운 가슴이 느껴지는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간략한 단상을 덧붙인다. 

 

본문 요약 

혐오표현(hate speech)이란 “소수자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인하고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 모욕. 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으로 정의할 수 있다. 어떤 표현이 혐오표현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표현이 특정 사회의 맥락에서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는지의 여부다. 따라서 혐오표현은 소수자를 그 대상으로 하며, ‘남혐’이나 ’개독‘같이 다수자를 대상으로 한 표현은 우리 사회의 맥락에서 바람직하지 않을지언정 혐오표현으로 문제시하기는 어렵다.

혐오표현의 유형과 해악   혐오표현의 유형은 ① 차별적 괴롭힘 ② 편견 조장 ③ 모욕 ④ 증오선동으로 나뉘며  그 해악은 ① 노출된 개인이 ‘정신적 고통’을 당하고 ② 누구나 평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공존의 조건’을 파괴함으로서 ‘공공선’을 붕괴시키며 ③ 그 자체로 차별일 뿐 아니라 실제 차별이나 증오범죄 같은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증오범죄란 “장애, 인종, 종교, 성적 지향, 성별, 성별정체성 등에 근거한 적대 또는 편견이 동기가 된 범죄”를 뜻하며, 증오범죄가 발생하면 그 집단 구성원들이 집단적으로 “나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

편견의 피라미드   편견 - 혐오표현 - 차별 - 폭력(혹은 증오범죄)은 편견의 발현이 표현인지 폭력인지로 갈릴 뿐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사진1. 편견의 피라미드). 특정 개인이 당한 정신적 고통은 모욕죄, 명예훼손죄, 민사상 손해배상 등으로 구제받을 수 있으나, 소수자 집단 자체를 지칭하여 모욕하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그 해악이 소수자 집단 전체에 미치는 전염성 혹은 집단성을 가지므로 혐오금지법을 통한 규율이 필요하며, 그중에서도 특히 증오선동은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 증오범죄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대책은 증오범죄법 제정이나 이는 편견 차별 혐오에 맞서 모든 사람의 존엄이 보장되는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혐오표현과 표현의 자유   혐오표현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표현’이기 때문이며, 표현의 자유를 쉽사리 포기할 수 없기에 그것이 표현에 머무르는 한 함부로 법으로 제한해서는 안된다. 혐오표현에 관한 논의는 광범위 규제인 ‘유럽식 접근’과 최소 규제인 ‘미국식 접근’으로 나뉘며, 전자가 법으로 혐오표현을 금지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법적 금지 외의 방식으로 혐오표현에 대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국에는 연방 차원의 혐오금지법이 없지만, 실제로는 형사규제를 뺀 거의 모든 규제를 시행하고 있다. 문명국가에서 혐오표현은 어떤 방식(법에 의한 규제 vs 사회에 의한 금지)으로 규제하느냐의 문제일 뿐 관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혐오표현의 규제   혐오표현의 규제는 크게 ‘금지하는 규제’와 ‘형성적 규제’로 나뉜다. 전자에는 형사 규제, 민사 규제, 행정 규제가, 후자에는 국가 법적규제와 자율적 규제가 포함된다(사진 2). ‘금지하는 규제’ 중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증오선동’이며, 차별을 당했다면 국가인권위원회와 같은 차별시정기구에 진정을 제기함으로서 ‘행정구제’를 요청할 수 있다. ‘형성적 규제’란 더 많은 표현을 활성화시키고 소수자 집단과 시민사회가 혐오표현에 대해 내성을 가질 수 있도록 지지하고 지원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다. 혐오표현은 ‘금지’하고 ‘처벌’하는 것 만으로는 근절될 수 없으며, 더 많은 표현이 혐오표현을 격퇴시킬 수 있도록 표현의 자유를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혐오의 지형을 뒤바꿔 혐오주의자들을 고립시키는 ‘대항표현’ 전략은 그 좋은 예다.

혐오표현 규제의 전략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는 ‘형성적 규제’를 중심에 놓고 표현 자체는 가급적 규율하지 않되 표현이라는 선을 넘어가는 순간 강력하게 규제하는 것이 가장 좋은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는 ① 혐오표현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고용, 서비스, 교육 등 자율에 맡기기 어려운 영역과 방송, 광고, 인터넷 등 공공성이 강한 영역에 한정하고 ② 혐오표현 중 가장 해악이 막대하면서 입증이 용이한 증오선동에 대해서는 형사 규제를 실시하며 ③ 증오선동 이외의 표현에 대한 규제는 형사처벌보다 차별금지법에 의거하고 ③ 차별행위에 대해서는 차별시정기구를 통해, 증오범죄는 증오범죄법을 통해 대처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은 지금까지 설명한 여러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를 총망라하는 법이므로 혐오표현 대응을 위한 입법조치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사진 3).

혐오표현과 한국사회   혐오표현은 그 자체로 해악을 가지고 실제 차별이나 폭력으로 이어진 경우도 많기에 당장 눈에 보이는 폭력이 없다고 해서 방치할 문제가 아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온라인상의 혐오가 오프라인으로 넘어가는 조짐이 보이고, 혐오표현이 빈곤, 불평등, 실업 등의 사회경제적 위기와 결부되는 경우가 발견된다. 한국 사회는 지금까지 혐오표현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대응에 사실상 실패했으며, 혐오의 확산에 취약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혐오표현은 공존의 조건을 파괴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며, 혐오표현의 문제에 대응하는 것은 ‘공존의 사회’를 위한 최소조건이다. 

 

개인적인 단상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당대 사회의 주류를 자처하던 사람들에게 자주 막말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지만, 여성과 어린이, 세리나 성매매 여성과 같이 그 시대의 소수자나 비주류에 속한 사람들에게 ‘혐오표현’에 해당하는 말을 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던 바로 그 예수를 따른다는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이나 성소수자와 같은 우리 사회의 약자나 소수자들을 ‘차별할 수 있는 자유’와 공론장에서 그들에 대한 ‘혐오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곧 종교의 자유라고 강변하며 ‘차별금지법’과 같은 관련법의 제정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오늘날의 당신들은 성경의 ‘문자’에 충실한 나머지 여성을 억압하고, 노예제도를 옹호하며,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던 당신들의 ‘영적 조상’들과 어떻게 다른가? 혹시 성경의 ‘문자’를 따르느라 예수의 ‘정신’을 놓친 것은 아닌가? 성경이라는 광활한 꽃밭에서 마음에 드는 꽃만 꺾어 보암직한 꽃다발을 만들려다 그 꽃에 담긴 생명력까지 박제해 버린 것은 아닌가? 혹시 레티 러셀을 따라 ‘본문으로 괴롭히기 (textual harassment)’를 통해 지속적으로 타자에 대한 배제와 억압을 자행하는 ‘차이의 해석학’ 대신 성경의 또 다른 중요한 전통 중 하나인 하나님의 환대 속에서 사람들을 환영하면서 차이를 긍정하는 ‘환대의 해석학’으로의 회심을 감행할 용의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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