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 나는 누구의 제자인가?
[김영웅의책과일상] 나는 누구의 제자인가?
  • 김영웅
  • 승인 2019.06.14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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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복있는사람
복있는사람
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복있는사람

2013년 5월,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이곳, 캘리포니아주 파사데나에서 그는 생을 마감했다. 향년 77세였다. 77년생인 나는 그가 타개한 지 7년째에 접어들던 지난 달부터 약 3주 간에 걸쳐 그의 대표작인 ‘하나님의 모략’을 읽어냈다. 짧은 기간이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깃든 그의 숨결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이제는 비록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직접 대면할 수 없겠지만,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가르침은, 이미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믿음의 선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수의 제자로 살길 소망하는 나에게도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그는 탁월한 통찰력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철학적 관점으로 조명하고 그 본질을 드러내는 데 기여했으며, 복음주의권에서 기독교 변증가로서의 면모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특히, 21세기를 접어들고나서 달라스 윌라드를 빼놓고는 '기독교 제자도'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영성훈련과 제자도의 본질과 비밀을 먼저 맛본 후, 그 맛을 전하고 나누기 위한 의지를 단호하고 열정적으로 피력했으며, 왜 예수가 참 스승인지 후대들에게 알려주는 데 인생을 바쳤던, 예수의 제자였다.

그의 정수가 녹아있는 이 책은 조그만 글씨에 500페이지가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쉽진 않았지만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저자의 예리한 분석력과 탁월한 해석이 곁든 많은 문장들이 나의 감탄과 공감을 자아내며 깨달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동안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밝혀주고, 그냥 지나쳐왔던 중요한 부분들을 재조명해주면서 예수의 가르침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각기 다른 신앙의 여정 가운데, 적어도 나에게는 적시에 만난 고마운 책이었다.

이 책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예수의 제자가 되라는 것. 선으로 악을 이기는 등 역설적이고 전복적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나라 (천국)가 임하도록 하시는, 즉 '하나님의 모략'의 동참자가 되라는 것. 그러기 위한 유일하고 완전한 길은 지금, 여기,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다는 것. 그 길은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 우리는 그 동안 잊어왔거나 오해해왔거나 무시해왔던 예수를 참 스승으로 모시는 제자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의 희망은 예수의 말씀을 새롭게 듣게 하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주께서 명하신 바를 실천하는 길을 열어 줄 복음을 이해하도록 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을 통해 달라스 윌라드는 오늘날 더 이상 예수를 향한 믿음의 본질로 간주되지 않는 제자도를 복음의 핵심 그 자체로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내용은 없다. 다만, 잊혀진 제자도의 비밀을 밝히 드러내주는 등불 같은 책이다.

‘하나님의 모략’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1장과 2장이 이 책 전체의 서론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서론 부분에서 우리는 저자인 달라스 윌라드가 오늘날 세상을 어떻게 진단하고 분석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예리하고 정확한 관찰과 깊고 풍부한 해석이 잘 드러나있기 때문에, 달라스 윌라드가 어떤 사람이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이 부분은 곧 폭풍처럼 전개될 산상수훈에 대한 그의 탁월한 통찰이 빚어낸 본론 부분 (4-7장)과, 마침내 소개될 제자도의 본질과 훈련방법에 대한 그의 간절한 바람이 녹아있는 결론 부분 (8-9장)의 훌륭하면서도 적실한 배경이 되어준다. 3장은 서론 (1-2장)과 본론 (4-7장)을 이어주는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고 보았으며, 10장은 거대 서사처럼 방대했던 여정이 비로소 마무리되며, 모두 함께 하나님나라를 기쁘게 소망하며 바라보는 부분으로 보았다.

환자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분석이 없다면 어떠한 처방도 불가능하며 환자의 병은 결코 나을 수 없다. 달라스 윌라드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이 시대가 앓고 있는 만성질환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판단한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만성질환은 과연 무엇일까? 1장에서 그는 오늘날의 인간 실존을 고속으로 전복 비행 중인 비행기에 비유한다. 알다시피, 거꾸로 뒤집힌 상태에서 위를 향한다는 건 곧 추락함을 의미한다. 그는 이 시대엔 삶의 모든 방향과 기준 (특히 도덕적 지식체계)이 모호하거나 부재하다고 보았다. 이 관점은 현재를 살아가며 진지하게 인간과 인생을 숙고해본 사람이라면, 교회 안팎에 상관없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실존을 상하가 뒤바뀌었는지도 모르는 채 고속 질주하는, 위험천만한 비행기에 비유한 것은 정말 탁월했다.

암흑과도 같은 시대에 처한 인간에게도 창조 질서의 흔적과도 같은 무언가가 남아있었던 탓일까. 인간은 모호한 관념만이 남은 껍데기 (책에서 그는 ‘자동차 범퍼 스티커’나 ‘선물가게의 화려한 문구’ 등과 같은 슬로건을 언급한다)에 인생의 방향과 기준을 의탁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삶과 무관한 껍데기와 같은 방향과 기준은 고장난 나침반과 같을 뿐이다. 게다가 이것들은 도덕, 사회,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을 장악했기에, 저자는 우리의 삶이 암흑과도 같다고 보았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어두움 가운데 빛이 임하듯 우린 하나님나라의 초청을 받았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믿음으로 누구든지 그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진정한 선과 의가 명징하게 가시적으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예수가 누구인지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여전히 혼돈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1장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철학적이고 신학적으로 진단하고 있다.

2장에 들어와서 윌라드는 그가 내린 진단을 분석한다. 우리가 받았던 하나님나라 초청이 ‘죄 관리의 복음’이라고 부를만큼 왜곡축소되었다고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내용물이 무엇인지, 혹은 어떤 상태인지에 관계없이 오로지 바코드에 의해서만 제품이 인식되듯, 기독교인들의 구원도 그저 사영리와 같은 교리에 정신적으로 동의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혹은 교회에 등록만 하면 되는 것처럼 여기는 웃지 못할 풍토를, 그는 ‘바코드 신앙’이라는 말로 함축하여 표현한다. 이러한 문화는 비단 강경 칼빈주의나 구원파에 국한되지 않고 소위 ‘우익의 복음’을 전반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특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우익의 복음에서 하나님나라 초청은 그저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즉, ‘바코드 신앙’의 핵심은 죄 용서받기 위해 굳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이는 곧 칭의와 성화의 단절을 의미한다. 꼭 예수의 제자가 될 필요는 없으며, 그렇게 안해도 마치 든든한 화재보험을 든 것처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값싼 은혜’와도 일맥상통한다.

‘우익 복음’에 대한 반동적인 세력으로 시작했던 ‘좌익 복음’에서도 본질은 마찬가지다. 자유주의의 배경을 가진 이 복음은 대표적으로 해방과 평등을 부르짖으며 사회윤리와 참여를 요구하고 정치, 사회적인 부분에서 세상 속으로 침투해있다. 비록 사랑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저자는 이러한 복음을 ‘아메리칸 드림’의 또 다른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평등주의, 행복, 자유 등의 단어가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결국 무엇을 욕망하든 그 욕망을 방해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악이나 죄가 된다는 식의 논리로 구성된 좌익의 복음은 우익의 복음과 마찬가지로 ‘죄 관리의 복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좌우에 치우친 양쪽의 복음의 중심에 예수가 증발되어 있다고 보았다. 스승으로서의 예수의 복음이 개인의 인격과 성품의 변화 (제자도의 목적)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한낱 죽음을 위한 복음 (죄책 해결이 목적) 아니면 사회참여를 위한 복음 (구조악 해결이 목적)으로 변질된 것은 어두움 가운데 빛으로 임한 하나님나라 초청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우리가 그 초청을 올바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면 삶과 신앙이 통합되어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본격적인 산상수훈에 대한 통찰로 들어가기 전, 저자는 3장에서 예수가 알았던 세상이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한 세상이며, 이는 하나님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라고 알려준다.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은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영역 (인간의 영혼뿐 아니라 우리가 숨쉬는 가까운 대기 중에도, 또 저 우주 끝에도)에 걸쳐 편재되어 있다는 의미이며, 이런 하나님나라의 삶이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제대로 아는 데에 복음의 핵심이 있다고 말한다. 즉, 예수의 가르침을 해석하고 전달하기 전, 예수의 세계관을 우리가 먼저 공유하여야 예수가 전한 하나님나라 복음과 그 복음의 핵심인 제자도를 실제 생활 지침으로 삼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제자도는 예수를 스승 삼아 본받고 그대로 살아내려는 의지/마음을 가진,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는 길로 볼 수 있다.

4장부터 7장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을 깊이 파헤친다. 하나님나라에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인 산상수훈은 두 가지 중심 질문을 다룬다.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가에 대한 것과 어떤 사람이 선한 사람인가에 대한 것이다. 4장은 첫 번째 질문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먼저 8복에 나오는 약속들을 각 복과 연결된 영적 상태에 대한 보상이나 결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일침을 가한다. 8복은 복을 받는 방법이나 자격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8복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뭔가를 해야만 한다고 해석해도 안 된다고 말한다. 8복의 핵심은, 하나님나라가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모든 인간에게 값없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즉, ‘그러므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8복을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각 복과 연결된 영적 상태의 연결 고리는 우리의 노력 (행위나 태도)가 아닌 그리스도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는 관념적인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과는 달리 실제 정황을 이용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치셨으며, 일반적 통념과 습성을 바로잡는 메시지를 하셨는데, 이는 지식 전달만이 아닌 각자의 삶에 진정한 구체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5장에 들어서서 산상수훈의 두 번째 질문, 즉 ‘선한 삶’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서도 이는 유효하다. 선한 삶이란 관념적이지 않다. 가시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인데, 그 행동 수정에만 피상적으로 천착한 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이다. 예수는 행동 자체가 아닌 행동의 근원에 중점을 두신다. 그 근원을 살피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의 골자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산상수훈은 율법을 무효화한 게 아니라 인간이 흐려놓은 하나님의 율법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본질을 나타내주는 핵심 단어는 ‘디카이오수네’라는 헬라어인데, 이는 히브리어 ‘쩨데크’를 70인 역에서 헬라어로 번역한 단어이며, 영어로는 Righteousness, 우리말로는 통상 ‘의’라고 번역된다. 천국 (하나님나라)의 의라고 할 수 있는 ‘디카이오수네’는 인간의 삶을 진정 옳거나 선하게 만들어주는 그 무엇이라고 풀 수 있으며,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대개 정의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피상적인 행동 수정이 목적인 그들의 율법과 행동적 순종을 넘어 디카이오수네를 삶에서 행함으로써 믿음의 순종을 자발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내면 생활의 치유와 회복이 산상수훈이 말하고자 했던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디카이오수네를 행하는 자는 곧 진정 선한 삶을 사는 자가 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산상수훈에서 예수가 가르쳐주듯이, 분노와 멸시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며,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갚을 것이며, 무저항과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원수를 대해야 한다. 이런 행위는 곧 아가페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천국 마음의 완성은 아가페 사랑이며, 디아키오수네는 곧 사랑이며 예수의 핵심 원리이다.

진정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중심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며, 진정 선한 사람은 이웃의 유익을 전심으로 도모하는 사람이다. 즉, 진정 행복하고 선한 사람은 예수의 제자와 다름 아니다. 피상적 행동 수정에 불과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 천국과 연합을 이루게 한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예수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는 진리와 자유와 사랑의 힘으로 악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모략의 동참자, 즉 제자가 된다. 그러나 이를 방해하는 두 가지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곧 명예와 부를 좇는 인간의 습성이다. 6장은 이런 명예의 덫과 부의 굴레에 대한 주의사항을 알려주고 경고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명예의 덫에 걸리면 하나님이 아닌 사람 앞에 서는 위선자가 되며, 부의 굴레에 갇히면 결코 가능하지 않을, 곧 두 주인을 섬기게 되는 배신자가 된다. 악은 지금도 인간 역사를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린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결단하여 하나님의 모략에 동참해야 한다.

본론의 마지막 장인 7장은 산상수훈의 결론 부분으로써 6장에 이어 하나님나라의 의와 능력으로부터 우리를 필히 단절시키고야 말 인간적인 구체적 습성과 내면의 태도 (정죄와 비난)에 대한 경고를 이어간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주기도문으로 대표되는 기도와 사랑의 공동체를 제시한다. 정죄와 비난은 남을 바로잡아준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우월감에 도취되어 결국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 회귀하는 결과를 낳을 뿐인 인간의 뿌리깊은 악한 습성이다. 남을 진정으로 선하게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아가페 사랑을 추구하고 그것이 슶관이 되게 하여 선함과 지혜로움으로 무장하여 오직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기도로 구하는 것밖엔 없다. 기도란 무엇보다 우리의 성품을 형성하는 길이며, 자유와 능력을 섬김과 사랑에 접목시켜 준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분의 능력을 받아 원하는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인격으로 성장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모략의 핵심에서, 통치란 단순히 선의 창조와 지배에 있어서 자유와 능력을 갖춘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우린 가장 위대한 기도인 주기도문에서 이를 잘 배울 수 있다.

저자는 덧붙여 말하기를 산상수훈은 산상강화로, 한 편의 설교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부만을 발췌해서 큐티 같은 묵상만을 한다면 오독하기 쉬우며, 예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결과,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에 머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설교는 한 편의 통일되고 완성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서론, 본론, 결론과 같은 순서가 중요하다. 산상강화는 특히 앞에 나온 부분을 전제로 할 때에만 뒷 부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참된 복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지 않고는 분노와 멸시에 대한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이해는 커녕 지키지 못할 율법의 강화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농후), 그 뒤에 나오는 명예나 부를 조심하라는 가르침, 정죄와 비난이 아닌 기도와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라는 메시지 역시 오독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 주의사항과 경고의 방향은 내면의 변화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외향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8장과 9장에 와서야 달라스 윌라드는 본인의 주요 골자를 말한다. ‘예수의 제자 또는 학생이 되는 법’과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교육 과정’이 각각 8장과 9장의 제목임은 이를 그대로 시사한다. 산상강화를 통해 예수를 스승으로 삼으며 예수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실제적으로 살아낼 제자의 본질과 훈련 방법에 대한 요지가 이 책의 결론 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산상강화의 마지막 주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과 실천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제자가 가져야 할 일상적 모습이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나는 누구의 제자인가?”, “예수의 제자인가?”,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하는가?”, “예수와 일상을 함께 살아내는가?” 제자도는 실생활 속에서 예수를 따르는 것이며, 우리들의 일상 전체가 제자도의 장이다. 저자는 제자를 삼으려면, 먼저 나부터 제자여야 하고, 제자 삼을 의지가 있어야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가 참 스승임을 믿게 만들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회심자를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복음주의권의 전반적인 풍토를 비판하면서, 회심자를 만드는 데 초점을 둘 게 아니라, 제자 삼는 일에 초점을 둬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윌라드는, 사람은 신념대로 살게 되어 있는데, 예수의 제자는 결단 후 변화된 신념으로 행동과 성품의 변화를 입은 사람이라고 덧붙인다.

9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훈련방법은 예수 제자반 교육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시작은 내면의 변화이다. 내면의 변화로부터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흘러나오는 외적인 변화를 입도록 도와주는 훈련방법이 9장에 친절히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순종은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순종은 감사가 원동력이며, 율법에 대한 순종 역시 하나님나라 백성 삼아주신 그분의 은혜에 대한 이스라엘의 감사에서 출발했다.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졌던 율법이 구속이라 해석할 수 있는 출애굽 이후에 일어났던 사건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천국의 순종은 천국의 풍요이다. 결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 순종으로 살아내는 삶은 곧 예수를 닮아가는 삶인데,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예수를 스승 삼아 성장하고 성숙해나가는 과정 전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영적성장의 황금 삼각형’이라고 명명하며, 우리들의 영적성장을 위한 방법을 도표를 그려서까지 설명해준다. 삼각형의 꼭대기에는 성령의 활동이 위치한다. 좌우의 모서리에는 일상의 평범한 사건과 새 마음을 입기 위한 특별히 계획된 훈련으로 각각 이루어져 있다. 일상의 평범한 사건에는 우리가 늘 겪는 ‘시험’이 포함되어 있으며, 계획된 훈련으로는 고독과 침묵, 공부와 예배를 저자는 강권하고 있다. 제임스 스미스의 ‘습관이 영성이다’에서 저자가 강조했던 제자도의 핵심 훈련이 교회예배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예배는 분명 예수의 제자가 되는 훈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건이 될 것이다.

방대한 양에 걸쳐 달라스 윌라드가 결국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앞서 언급했듯이, 제자도의 회복이며, 그러한 그의 결론을 강력하고 충분하게 뒷받침해주는 예수의 말씀을 그는 산상수훈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은 철학과 신학에서 뛰어난 관찰과 통찰과 성찰로 이루어진 윌라드만의 현실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분석에서 비롯되었다.책을 덮고 조용히 한밤 중에 홀로 앉아 나는 누구의 제자인가 묻는다. 망설이고 머뭇거렸다. 결국 입을 떼지 못했다. 나는 예수의 제자라고, 나의 스승은 예수라고, 왜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없었던 걸까. 윌라드가 말한 것처럼 내게도 친숙함이 생소함을, 생소함이 경멸을 낳았던 것일까. 아니다. 경멸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생소함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단번에 대답하지 못하는 부끄러움도 함께 말이다. 예수의 제자이길 늘 다짐했고 그렇게 배워왔으나, 나 역시 어릴 적부터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는 한 번도 예수라고 답해본 적이 없었다. 예수는 내게 스승이어야 했지만, 스승이지 못했던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를 만나고 다시 이 질문 앞에 서게 됐다. 단호하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대답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실제 나의 구체적인 삶에 침투한 하나님나라. 나와 함께 하는 예수. 제자로서 하나님사랑와 이웃사랑을, 좌우에 치우치지 않은 채 행하는 공의롭고 정의로운 삶을, 반드시 꾸준히 인격과 성품도 성장 성숙시키면서 전진하길 소망하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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