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 다른 기준이 필요합니다
[장일] 다른 기준이 필요합니다
  • 장일
  • 승인 2019.06.14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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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 목사의 야고보서 강해 07 - 야고보서 2:1-7

서 론 

야고보서 강해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예전에 봤던 한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EBS에서 방영된 ‘인간의 두 얼굴’이라는 프로입니다. 이 프로는 총 31가지의 실험을 통해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이 중에 가장 인상적인 실험은 다름 아닌 ‘첫 인상 실험’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번화가에 30대 초반의 한 남성이 서있습니다. 이 남성은 매우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옷차림 곧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습니다. 거리를 지나는 여성들에게 이 남성의 첫인상을 물어봤습니다. “직업이 뭐처럼 보이시나요?” 답변이 어떻게 나왔을까요? “공장에서 기계 수리 하시는 분 같은데요. 만두가게 같은 음식점 하시는 분 아닌가요?” 추가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남성의 연봉은 얼마처럼 보이나요?” “글쎄요 한 1,200만원?” “마지막으로 10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야박하게도 점수는 평균 2점을 넘지 못했습니다.

EBS
EBS 인간의 두 얼굴

잠시 후에 동일한 남성이 말끔한 정장으로 갈아입고 재실험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질문은 같습니다. “직업이 뭐처럼 보이시나요?”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변호사나 의사처럼 보이는데요. 대기업 직원처럼 보이네요.” “연봉은 얼마처럼 보이나요?” “1억 넘게 보이는데요.” “마지막으로 10점 만점에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점수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9.5점, 9.7점, 무려 만점인 10점까지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이 실험을 통해 무엇을 느끼셨나요? 놀랍게도 옷차림 하나만으로 참 많은 것들이 달라졌습니다. 만두가게 사장에서 변호사로, 1,200만원에서 1억으로, 2점에서 10점 만점으로. 이 다큐멘터리가 10년 전에 방영된 프로인데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요? 씁쓸하지만 한국사회의 외모지상주의, 외모차별주의는 여전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차별’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차별의 역사는 변함이 없습니다. 흩어진 교회 또한 이 차별 때문에 큰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 차별의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다룹니다.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바로 교회 공동체가 세상과는 다른 기준을 갖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기준을 재정립하기를 권면합니다. 또한 이 기준을 통해 차별 없이 동등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세워가기를 축복합니다.

 

1. 그리스도인의 기준

다른 기준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인의 기준’입니다.

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2 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3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든지 하오" 하고 말하면, 4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난 본문에서 야고보는 참된 경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기억나시나요? 참된 경건이란 자신의 혀를 통제하는 삶,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삶,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삶이었습니다. 오늘 다루는 차별 곧 사람에 대한 태도 또한 참된 경건에 속한 문제입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야고보는 매우 단호한 명령으로 권면을 시작합니다. 이러한 단호함의 배경에는 흩어진 교회 안에 있는 차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어서 차별의 구체적인 상황이 등장합니다. 참고로 2절의 ‘회당’은 원래 유대인들의 예배와 교육을 위한 장소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당시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이 모임에 두 사람이 들어옵니다. 한 사람은 화려한 옷에 금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금반지가 흔하지만 당시 로마제국에서 금반지는 상류층을 상징했습니다. 이어서 또 한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는 먼저 들어온 사람과는 확연히 비교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차림새를 보노라면 이게 옷인지 누더기인지 분간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두 사람에 대한 성도들의 반응입니다. 반응이 어땠습니까? 화려한 옷을 입은 부자에게는 호의를 베풀며 가장 좋은 자리를 안내했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에게는 어떻게 대했습니까? “당신은 서 있든지 바닥에 앉든지 알아서 하시오” 푸대접도 이런 푸대접이 없습니다.

2013년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윌리 라일(Willie Lyle)이라는 목사님은 새로운 교회에 부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신비한 꿈을 꾸게 됩니다. 꿈에서 하나님은 “부임할 교회가 있는 동네에서 노숙인으로 살아보라”는 메시지를 주십니다. 한편으로 참 황당하지만 목사님은 즉각 순종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부임할 교회가 있는 동네에서 5일 동안 노숙인으로 살게 됩니다. 여러분 이 5일의 삶이 어땠을까요? 말이 5일이지 돈도, 음식도, 친구도 없었기에 그가 당면한 절박함이란 예상보다 훨씬 컸습니다. 그래도 참 다행인 게 뭔지 아세요? 짧은 5일이지만 어디서 자야 경찰의 단속에 안 걸리는지, 어디에 가야 무료로 빵을 먹을 수 있는지를 터득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드디어 5일 간의 노숙을 마치는 주일이 되었습니다. 주일 아침에 목사님은 자신이 부임하게 될 교회 앞마당에 앉아있었습니다. 당연히 교인들은 그가 새로운 담임목사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교인들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약 20명의 교인들만이 목사님에게 말을 붙이고 필요한 음식과 돈을 주었습니다. 참고로 이들은 전체교인의 약 10%에 해당되는 숫자입니다. 이어지는 예배에서 목사님은 이러한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우리 교인들은 매주 한 시간만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교회는 소외되고 약한 지체를 섬기는 일이라면 우리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 예수님처럼 살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경건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야고보가 왜 차별을 책망하고 있습니까? 5절에 나오죠. 차별은 악한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며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차별하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여러분 언제 주님께서 우리를 차별한 적이 있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여전히 차별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이제 다른 기준이 필요합니다. 이때일수록 우리 믿음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 또한 그분의 영광에 합당한 그분의 성품에 합당한 우리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팎으로 차별이 만연한 시대에 이 순종으로 나아가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2. 하나님의 기준

다른 기준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5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어서 하나님의 기준이 나옵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선택하셨다고 나옵니까? ‘가난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늘 가난한 자의 편이기에 그렇다면 부자는 차별을 받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일방적으로 가난을 칭송하거나 부를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선택하셨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세상에서 차별을 받습니다. 앉을 자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돈도 없고 빽도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아무 조건 없이 그들을 품으시고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왜 선택하셨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만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전북 김제에 가보면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1908년에 지어진 한옥교회인데 지금은 문화재로 남아있습니다. 이 교회를 둘러싼 이야기가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유산으로 지금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조덕삼과 이자익 이 두 사람이 금산교회의 개척 공신입니다. 먼저 조덕삼은 양반 가문의 거상으로서 당시 탄탄한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이자익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고아였습니다. 그는 친척집을 전전하다 12살에 조덕삼 집안의 마부가 됩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주인과 하인의 연을 맺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은 미국에서 온 데이트 선교사에게 복음을 듣게 됩니다. 이어서 함께 세례를 받고 함께 집사 임명까지 받습니다. 1909년 교회가 건축된 다음해에 장로 선출을 위한 투표가 열립니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은 조덕삼 집사가 장로가 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조덕삼을 제치고 이자익 집사가 장로로 추천되었습니다. 당시 반상의 신분을 따지는 문화를 생각한다면 실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장로 선출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랍게도 아무 탈 없이 끝났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조덕삼 집사가 보인 태도였습니다. 그는 교인들에게 이자익을 장로로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을 신학교에 보내어 목사가 되도록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이자익을 자신이 섬기는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지역 복음화에 헌신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 놀랍지 않습니까? 물론 당시는 갑오개혁으로 이미 신분제가 폐지된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반상의 신분을 철저히 따지는 문화는 건재했습니다. 그러나 조덕삼 장로는 자신의 하인을 신분의 차별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대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기업 회장이 자신의 운전기사를 섬긴 격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도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도 하나님의 기준을 따름으로 더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 세상의 기준

다른 기준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은, ‘세상의 기준’입니다.

6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7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세상의 기준입니다. 앞서 야고보는 흩어진 교회 안에 있는 차별의 문제를 책망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흩어진 교회의 성도들 또한 세상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을 차별하고 억압했을까요? 6절에 나오는 대로 부자들입니다. 여기서 부자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아닌 교회 밖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홀대하고 핍박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늘 갑의 위치에 있었기에 온갖 불합리한 피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떠안아야 했습니다.

교회 안의 가난한 성도들은 소작농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늘 불리한 계약 속에 있었기에 빚더미에 오르기도 쉬웠습니다. 채무를 상환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될까요? 법정으로 끌려가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또한 부자들은 이러한 경제적 핍박 외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종교적 핍박까지 행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상황이라면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억울함을 넘어 말 그대로 피눈물이 나는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태가 당시 로마제국에 만연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 세상의 기준인 것입니다.

이랜드 대량해고 사태를 영화화한 '카트'
이랜드 비정규직 대량해고 사태를 영화화한 '카트'(2014)

2007년은 한국교회에 매우 특별한 해였습니다. 왜냐하면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이 100주년을 맞는 해였기 때문입니다. 전국에서 대부흥운동을 기념하는 집회들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러한 거룩한 운동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이랜드 비정규직 대량해고 사태’입니다. 2006년 11월 국회에서 비정규직 보호법이 통과됩니다. 이 법은 비정규직 근로자는 최대 2년까지 고용 가능하며, 2년을 초과할 시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랜드는 2007년 7월 해당 법의 시행을 앞두고 일부만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나머지는 대량해고를 강행합니다.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처절한 복직 투쟁에 나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투쟁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2008년 11월 노사협상이 끝날 때까지 무려 510여 일간의 시간이 소요됐습니다. 당시 이랜드 사태는 사회적인 파장이 컸던 만큼 이후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왜 이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물론 이러한 사태는 노동계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랜드 그룹이 지향하고 있는 가치에 있습니다. 알다시피 이랜드는 국내 대표 기독교 기업으로 유명합니다. 그동안 이랜드는 수많은 기독교 가치들을 자랑했습니다. 일례로 직원들의 휴게실을 기도실로 바꿀 만큼 남다른 열심을 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랜드 사태를 통해 목격한 민낯은 무엇입니까? 기독교 가치를 지향한다는 그룹이 실상 세상의 논리 곧 세상의 기준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로 교회와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뼈아프게 반성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야고보가 흩어진 교회를 책망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래도 됩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차별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교회마저 세상의 기준을 따른다면 교회의 권위는 추락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라면 이러한 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영광스럽게 받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맛을 잃은 소금은 그저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입니다.

 

결 론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야고보서 강해 일곱 번째 시간으로 ‘다른 기준이 필요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갖 차별로 가득합니다. 대표적으로 돈 있고 빽 있으면 대우 받습니다. 돈 없고 빽 없으면 속된 말로 그냥 찌그러져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교회는 다른 기준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 기준이란 하나님의 기준 곧 하나님 나라의 가치입니다. 또한 말 뿐 아니라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교회가 욕을 먹고 있는 시대라지만 놀라운 사실이 뭔지 아세요? 바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여전히 권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차인표, 김혜자, 션 같은 연예인의 기사에는 악플이 없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바로 그들의 삶이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팔로우교회 또한 광천동 지역에서 다른 기준 곧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작더라도 우리가 맡은 본문에 충성합시다. 끝으로 영육간에 가난한 자가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놀라운 일들이 우리 공동체를 통해 전수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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