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속되다고 말하기 전에
[이택환] 속되다고 말하기 전에
  • 이택환
  • 승인 2019.07.1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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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사도행전 11:1~18

지난 5월 17일(금)은 “국제성소수자혐오 반대의 날”이었습니다. 영어로 “International Day Against of Homophobia”, 앞의 글자만 따서 흔히 아이다호(IDAHO)라고 부릅니다. 미국 북서부에 있는 주 이름이기도 하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 날이 생소한데, 작년 5월 17일, 장신대 신대원생과 학부생 7명이 교내 채플에 무지개 색 옷을 입고 참석한 후, 인증 샷을 SNS에 올린 일이 있습니다. 일종의 “아이다호 기념 성소수자혐오 반대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장신대가 이들 7명 중 4명에게 6개월 정학 징계 처분을 내렸습니다.

장신대는 학칙에 따라, 동성애에 관한 교단 총회 결의에 반하는 행위를 한 학생을 징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총회가 작년에 “성경에 위배되는 동성애자나 동성애 옹호자는 교단 소속 신학대 입학을 불허한다.”는 내용을 결의한 바 있고, 이미 교단 헌법에도 “동성애자나 동성애 옹호자는 교회 직원 및 신학대 교직원이 될 수 없다.” 는 내용이 2017년에 신설되었습니다. 문제는 학생들의 성소수자혐오 반대 퍼포먼스가 과연 동성애를 옹호하는 것이냐의 여부입니다. 학교 당국은 당연히 그렇다고 여겨, 이들을 징계했지요.

그런데 요즘은 학생들도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습니다. 현재 학생들은 학교의 징계처분이 적법한지 소송을 진행 중입니다. 동시에 판결이 날 때까지 징계가 실행되지 못하도록, 학교를 상대로 징계처분효력정지가처분 소송을 냈는데, 우연인지 지난 5/17, 즉 국제성소수자혐오 반대의 날에 그 결과가 나왔습니다. 재판부는 “학생들의 행위가 동성애 옹호로 비칠 염려가 있다는 점만으로, 학교의 교육방침을 따르지 않은 행동으로 보기 어렵고, 상의를 무지개 색으로 맞춰 입은 행위 때문에 예배가 방해받았다거나, 이를 불법행사로 보기 어려우며, 또 이로 인해 학교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보기도 부족하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법원이 학교가 아닌 학생들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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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 본 재판이 남아 있는데, 지금까지 법원의 입장을 미루어 보면, 학교 당국이 승소할 가능성은 적어보입니다. 저는 이런 일들이 단순히 학교와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학칙 적용에 대한 소송 문제가 아니라, 큰 틀에서, “성소수자도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가?”와 관련된 21세기 신학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을 기독론의 관점에서 보면, “오직 예수!”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다!”(행 4:12)이지요. 그런데 이 문제를 교회론 차원에서 보면, “누가 과연 하나님의 백성인가?”의 문제가 됩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가 보편 종교이기에, 인종, 성별, 지위, 빈부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100% 유대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구분되지도 않았지요. 유대교의 구원론에는 원래 기독론이라는 게 없습니다(예수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오직 교회론만 있습니다. 즉,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 '여호와의 총회'(카할, 쉬나고그, 에클레시아)의 멤버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유대인이지요. 그러나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유대인답지 못한 자들, 즉 고환이 상한 자, 음경이 잘린 자, 사생자 등은 제외되었습니다(신 23:1).

1세기에는 여기에 안식일과 정결규정 등, 중요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암하레츠(죄인, 빈민, 땅의 사람들), 창기, 세리 같은 사람들도 거의 구원받을 수 없는 부류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같은 정통파 유대인들은 예수님 일행이 안식일에 환자를 치유하고(안식일 위반),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고(정결 규정 위반), 죄인과 창기, 세리와 어울리는 행위에 대해 강력히 비난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유대인일지라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보기 어려웠던 것이지요. 어쩌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도 죄인과 창기, 세리가 과연 구원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을 법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기독교인 100%가 유대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논쟁들은 초대교회 안에서 비교적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유대 사회의 죄인/빈민/암하레츠 계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창기는 직업을 바꿔야 했겠지만, 세리들은 꼭 직업을 바꾸지 않고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세리장 삭개오가 보다 깨끗한 세리가 되었지, 세리 직 자체를 그만 둔 것은 아니었지요. 어쨌든 초대교회는 같은 유대인 그룹 안에서 이런 저런 사회적, 경제적 장벽들을 뛰어 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넘어서야 할 장벽은 이 외에도 많이 있었는데, 일단 100% 유대인도 아니고 100% 이방인도 아닌, 사마리아인들이 과연 구원 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에서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가 일어나자,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중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은 전하자, 하나님 나라 표적들과 유사한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과연 사마리아인이 구원 받을 수 있는가? 그들도 유대인과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교회 안에 제기 됩니다. 이를 위해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사마리아로 달려가 점검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내립니다. “사마리아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 다음 번 장벽은 100% 이방인의 구원 문제였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지요. 베드로는 이미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로마 총독 거주지 가이사랴에 주둔 중인 이탈리아 부대의 백부장 고넬료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동일한 성령을 받아,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 소식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 때 교회에서 제기된 문제가 “과연 고넬료 같은 이방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NO, 라고 생각했습니다. 2-3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2절의 할례자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말하고, 3절의 무할례자는 고넬료를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베드로를 비난한 것을 보면, 베드로가 유대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서 고넬료 같은 이방인은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확고한 전제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두 가지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4절). 베드로는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자신의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찬찬히 설명해 갑니다. 그 설명이 5절부터 17절까지 이어지는데, 본문의 거의 80% 이상을 차지합니다. 두 번째는 반대로, 교회가 베드로의 말을 경청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오늘 말씀의 80%이상이 온통 비난할만하고 의심 투성이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되는 내용들을 교회가 진지하게 경청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까? 18절,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이 옳다고 여겨, 기꺼이 자신의 생각을 바꿉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는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되었고, 나중에 사도행전 15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선교를 할 때,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다시 한 번 이슈가 됩니다. 그 때에도 사람들이 100% 승복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방 선교지 곳곳에서 생각을 달리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계속 부딪히지요.

빅 이슈가 토론 한 번, 회의 한 번으로 쉽게 결론 나는 법은 없습니다. 만장일치로 결론이 나도, 회의 밖에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요. 때로는 다음 번 회의에서 뒤집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시스템이 교회 안에 갖춰져 있다면, 결국 토론과 회의를 거듭할수록 교회가 올바른 결론을 찾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점에서 초대교회가 오늘날 한국 교회보다 낫습니다. 그 이후에도 세계의 교회들은 지난 2000년 동안 여성, 노예, 식민지 원주민, 장애인, 어린이, 가난한 자 등에 대한 각종 장벽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21세기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장벽 가운데 하나가 동성애자, 성소수자들의 구원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전통적 교회가 그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고전 6:9). 즉,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오늘날 세계의 여러 교회가 깊이 헌신된 신실한 그리스도인 가운데,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나라에도 그런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탈피하지 않는 한, 그들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오늘 말씀은, 교회 안에서 누구라도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고, 또 비록 자신과 다른 입장에 대해서도 진중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하지만 현재 한국교회는 우리교단만 해도 이런 주제에 대해 언로가 꽉 막혀 있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동성애자임을 밝히거나, 옹호하면 신학교 입학이 불가능하고, 나중에라도 입학이 취소됩니다. 신학교를 졸업해도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 역시 같은 이유로 집사, 권사,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교단은 아예 세례도 받을 수도 없고, 심지어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오늘날 최신 생물학, 정신의학, 뇌과학,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법학 등의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 성소수자 스스로 뿐 아니라, 그들에 대한 타인들의 이해에 적극 반영되고 있습니다. 수십 년간 이 문제에 대해 천착해 온 서구 교회들의 경우, 성소수자들에 대한 이해가 과거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전통적 입장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는 교회들은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소수자의 구원 문제, 그것은 21세기 교회가 넘어서야 할 장벽일까요? 아니면 절대로 넘어가면 안 되는, 교회의 보호벽일까요? 성소수자들을 속되다고 말하기 전에 오늘날 교회가 반드시, 그리고 신중하게 생각해보아야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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