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박해자에서 전파자로
[이택환] 박해자에서 전파자로
  • 이택환
  • 승인 2019.06.14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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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사도행전 9:1~20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1571~1610), 바울의 회심(1600)

부활절 세 번째 주일, 사도행전 말씀은 박해자 바울이 전도자 바울로 변화된 유명한 다메섹 사건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바울이 유대 식 이름 사울로 등장합니다. 사도행전은 13장부터 그의 로마식 이름 바울을 사용하는데, 본 설교에서는 편의상 바울로 하겠습니다. 1-2절은 바울이 다메섹 사건 직전까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간략하게 묘사합니다. 당시 바울은 교회에 대해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행 8:3은 그를 “교회를 잔멸하는(뤼마이노마이, 더럽히다, 파괴하다) 자”라고 소개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모여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가, 남녀 가리지 않고 감옥에 보냈습니다. 그가 이제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까지 소탕하려고 합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에서 약 240 킬로미터 떨어진 옛 아람의 수도인데, 스데반의 순교 이후, 유대 밖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 다수가 모여 있었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의 위임장을 받아,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해서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기 위해 그곳으로 출발했습니다. 경건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바울이 교회를 그토록 혐오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마이클 버드, 손에 잡히는 바울, IVP, 50-52).

첫째는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를 믿는 것이 가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누구보다 뛰어난 존재여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를 전한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 전체가 십자가에 달린 것을 말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모욕을 넘어, 하나님에 대한 모욕입니다. 둘째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할 수 있는 의식들을 예수에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례, 기도 등을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고, 예배 중에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마라나타’, 즉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말들을 예수에게 사용하는 것을 바울이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셋째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 밖으로 나아가 이방인들에게 예수를 전하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를 믿지 않는 이방의 할례 받지 않은 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는 것은 유대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부활사상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정말 말도 안 되게,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며 허황된 부활사상으로 세상을 미혹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교회들을 싹 쓸어서 잔멸하길 원했지요.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유가 달라요. 과거 유대인들처럼 교회가 예수를 메시아로 선포하고, 하나님으로 경배하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해서가 아닙니다. 일찍이 인도의 간디는 “나는 예수가 좋다. 그러나 교회는 싫다”라고 했다지요? 지금도 간디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좋은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비윤리적이고, 몰상식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원수를 사랑하기는커녕, 가장 배타적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박해를 자초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나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을 때가 좋은 때입니다.

최근에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단지 교회와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기독교와 성경, 더 나아가 하나님과 예수님까지 혐오하는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폭군이고, 예수님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목사는 사기꾼이고, 교회는 좀 모자란 사람들이 다니는 곳입니다. 한 때는 C.S. 루이스 같은 뛰어난 기독교 작가들의 변증이 먹혔는데, 요즘은 별 관심이 없어요. 그동안, 워낙 교회가 이상한 일을 많이 하다 보니, “우리교회는 다르다. 나는 그런 목사가 아니다”라고 해 봐야 잘 통하지 않더라구요. 이런 때는 속이 상해도 차라리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채찍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어떤 모욕이든 묵묵히 받아들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Bartolome Esteban Murillo(1617~1682), 바울의 회심
Bartolome Esteban Murillo(1617~1682), 바울의 회심(1675~1682)

바울이 다메섹 근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행 26:13에는 그 빛이 해보다 더 밝은 빛이었다고 하는데, 바울은 그 빛에 압도되어 즉시 땅에 엎드렸습니다(능동). 그 순간 소리가 들려와 그가 귀를 기울였습니다(능동). 보통 사람 같았으면 깜짝 놀라 나자빠졌을 것입니다. 물론 바울도 크게 놀랐지만, 적어도 경건한 유대인으로 잘 훈련된 바울은, 이런 현상이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된 어떤 특이한 사건으로 직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 경건한 바리새인들은 오늘날의 관상기도 비슷한 방식으로, 종종 에스겔 1장의 하나님의 임재 장면을 묵상했다고 합니다.

에스겔 1장에는 네 개의 얼굴(사람/사자/소/독수리)을 가진, 네 개의 날개와 네 개의 바퀴가 달린, 불이 번쩍거리며 광채를 내는, 마치 우주선 혹은 전차와도 흡사한 신비한 물체/ 생물이 나옵니다. 에스겔은 이를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로 판단하고, 즉시 그 자리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지금 바울 역시, 갑자기 등장한 대낮의 해보다 밝은 빛의 출현을 하나님의 임재로 판단하고 에스겔처럼 그 자리에 엎드렸습니다. 역시 음성이 들려와 귀를 기울였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지만 에스겔의 경우와 달리, 그 음성은 바울이 예상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위해 충성하느라 정말로 수고가 많구나!” 라는 하나님의 위로의 음성을 기대했는데, 그에게 들려온 것은 맹세코 하나님을 박해한 적이 없던 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였습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즉시, “주여, 뉘시니이까?”, “티스 에이 퀴리에?/누구십니까? 하나님!” 이라는 이상한 형태로 그가 질문합니다. 하나님이신 것은 알겠는데, 말씀의 내용으로는 누구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곧 답변이 들려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 한 마디에 바울이 소위 멘붕, 그것도 토탈멘붕에 빠집니다. 아마도 그 순간 환상 속에서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분명히 본 것 같아요(실제보다 더 실제적으로!/Realer than Real!) 그가 훗날 고후 4: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그 때 바울은 지금까지 그가 확신했던 모든 것들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져버렸습니다. 여지껏 그는 예수와 그 추종자들을 하나님께 철저히 반하는 세력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잔멸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알고 보니 그 반대였습니다. 그동안 바울은 단지 교회를 박해했을 뿐인데,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한 것이고(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그 예수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지니신 분이시기에, 그래서 바울이 본 하나님이 바로 예수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바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8절의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상태, 물론 지금 바울의 눈의 건강 상태를 말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가 지금까지 두 눈으로 보았던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단지 오판해 온 것이었음을 중의적으로 묘사합니다. 누구라도 자신이 인생을 완전히 헛살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충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은 그런 진실의 순간(the Moment of Truth, MOT)을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겠지요. 바울 역시 그 진실의 순간을 직면하고는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다메섹 사건은 일차적으로 눈 먼 열심으로 가득한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바울을 보면 올바른 방향 없이 열심만 특심이었던 한국교회를 생각하게 됩니다. 한동안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이 다 하는 것이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게 제자훈련이었는데, 그 제자훈련의 총 본산이 오늘날 사*의 교회입니다. 한국교회의 세계적인 자랑거리가 새벽기도이고, 그 새벽기도를 5부까지 진행하면서, 그 시간에 무려 5만 명이 모인다고 자랑하던 교회가 지금의 명*교회입니다. 단지 “돈만 후원하는 선교가 아닌 몸이 가는 선교”를 부르짖으며, 교회 예산의 60%를 선교에 쓰고, 교인의 60%를 선교지로 보낸다는 교회가 2012년까지의 삼*교회였습니다.

열심보다 중요한 게 방향인데, 눈 먼 자들에게 방향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어디로 가든 열심히 가는 게 중요합니다. 왜 요즘 한국 교회가 침체하는가? 옛날처럼 열심히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 왜 요즘 한국교회가 줄어드는가? 옛날처럼 열심히 전도하지 않아서 그렇다! 늘 같은 소리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눈 먼 열심은 배를 산으로 보냅니다. 거꾸로 가게도 하고, 제자리를 맴돌다 침몰시키기도 합니다. 지금은 방향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방향을 잘 모르면 차라리 멈추어야 합니다. 갈 방향을 몰라서 모든 일을 멈추고 사흘 동안 두문불출했던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일러주셨습니다. 그가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시내로 들어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유대인 그리스도인 아나니아를 만납니다.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아나니아는 악명 높은 박해자 바울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어 형제로 맞아주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원수가 형제로 바뀌는 감동적인 장면이지요. 그러나 이런 결단을 하기 까지 아나니아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과 망설임, 분노와 고통이 있었을까요? 사실 바울도 그 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여러 정황상 그가 다메섹 은밀한 곳에서 감쪽같이 살해되었다 해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18절에서 즉시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그가 세상을 다시 보게 된 것, 결국 바울이 그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부터 그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으니까요.

그날 바울이 세례를 받습니다. 아나니아의 말을 따라,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세례를 통해 그가 시인합니다. 그 주님 예수께서 아나니아를 보내 눈을 뜨게 하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음을 받아들입니다. 이어서 음식을 먹고 다시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에 있는 제자 공동체에서 며칠간 머물며 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눕니다. 교회가 낯선, 혹은 과거에 적대적이었던 사람일지라도 환대하고 음식을 나누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교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는 공동체, 그분을 그리스도로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공동체가 그렇게 세워져 나가는 것입니다. 2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박해자에서 전파자로, 바울이 그렇게 다시 태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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