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어머니 사라, 어머니 하갈
[곽건용] 어머니 사라, 어머니 하갈
  • 곽건용
  • 승인 2019.07.0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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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의 설교 - 창세기 16:1~13

어머니날이 꼭 있어야 할까?

5월 10일은 어머니날입니다. 고국에는 어린이날이 있고 아버지날은 없는데 여기 미국에는 어린이날은 없고 아버지날이 따로 있습니다. 기록을 보니 고국의 어머니날은 1953년인가에 국무회의 의결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 날이 공휴일도 아닌데 왜 국무회의 의결까지 거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지켜오다가 1973년인가에 아버지까지 포함해서 그 날을 ‘어버이날’로 지키기로 했다고 합니다. 왜 아버지날은 없냐는 불만이 있었나 봅니다. 왜 미국에는 어린이날이 없을까요? 쉽게 할 수 있는 대답은 ‘매일이 어린이날이니까’라는 대답일 겁니다. 우리 고국은 어떻습니까? 고국에서도 매일이 어린이날 아닌가요? 이젠 고국도 어린이에 관한 한 미국과 사정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고국에는 여전히 어린이날이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게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욕먹을 얘기일지 모르지만 이젠 어머니날이니 아버지날이니 어린이날이니 하는 것들을 없앨 때가 됐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있던 걸 없애기는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어린이날/어머니날/아버지날이 있는 게 무슨 문제냐? 하루쯤 어머니, 아버지, 어린이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주면 어때서?’라고 항의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저는 이젠 그런 식으로 하루 이들을 위해주고 행사를 벌리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정은 조금 다르지만 현충일(Memorial Day)도 그렇습니다. 현충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 주로 군인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이 날의 주제는 당연히 ‘애국’입니다. 그 날 평소와는 달리 예배실에 성조기 갖다 놓고 교인들 중에 전쟁에 참가했던 참전군인들 사진까지 나눠주면서 기리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게 과연 옳은 일인지, 의심합니다. 미국의 경우 그들이 언제 어디서 왜 죽었는지를 생각해보면 곧 답이 나옵니다. 굵직한 전쟁만 세어 봐도 미국은 2차 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중동전쟁 등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 중에 미국 땅에서 벌인 전쟁은 하나도 없고 모두 다른 나라에 가서 치른 전쟁입니다. 그 전쟁들을 왜 했는지를 생각해보면 과연 그 날을 기리는 게 정당한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 침략 전쟁이요 적나라하게 자국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 사람들을 살육한 전쟁 아니었습니까. 그런 전쟁에서 죽은 사람을 기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이냐는 얘기입니다. 자랑스러운 전쟁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하긴 자랑스러운 전쟁이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현충일은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국가 이데올로기 장치입니다. 물론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은 현충일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그 날 하루 어머니, 아버지에게 잘 해드리는 것은 요즘 세상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얘기해보겠습니다.

어머니날만 되면 인터넷에 많이 돌아다니는 사진이 있습니다. ‘꽃으로 퉁 칠 생각하지 말라’는 현수막 사진입니다. 웃자고 하는 말이요 행동일 수 있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습니다. 과연 어머니날이 무슨 의미냐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상이 많이 변했는데 유독 어머니만 안 변했을 리 없습니다. 어머니는 ‘어떤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는 게 고전적인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는데 과연 지금 얼마나 많은 어머니가 ‘어떤 희생을 감수해서라도’라는 말에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겠습니까? 세상도 변했고 어머니도 변했으며 어머니의 사랑도 변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는 게 위하는 걸까?

부모 사랑 얘기를 하면서 성경을 예로 드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자식의 부모 사랑도, 부모의 자식 사랑도 성경대로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성경을 모르고 하는 무식한 말입니다. 요즘 성경대로 자녀를 교육하면 감옥에 갈 수 있습니다. A. J. 제이콥스라는 사람이 성경대로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1년 동안 성경이 하라는 대로 살아봤습니다. 그 후에 그는 <미친척하고 성경말씀대로 살아본 1년 The Year of Living Biblically>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는 성경대로 살아보기 위해서 성경을 여러 번 정독하고 세심하게 준비한 다음 실제로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살아왔습니다. 이 책에 흥미로운 얘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잠언에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다.”라거나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면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와 같은 말씀을 저자는 어떻게 지킬까 고민했다고 합니다. 정말 성경대로 몽둥이로 자녀를 때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동학대죄로 감옥에 가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티로폼으로 장난감 방망이를 만들어서 그걸로 아이들을 때렸습니다. 아이들은 맞고 아파하기는커녕 재미있어 하며 웃기만 하더랍니다. 물론 이는 극단적이 예일 수 있지만 모든 것이 변하는데 성경의 가르침은 변하지 않는다고, 어머니의 사랑만큼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달에 신문에서 인상 깊은 칼럼을 하나 읽었습니다. 은유라는 작가가 쓴 칼럼으로서 세월호 부모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중에 제 눈길을 끈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 대목을 인용하겠습니다. “애들은 좋은 곳에 갔으니까 이제 마음에 묻어라.” “교통사고다 생각해라.” “시간도 흘렀는데, 옛날처럼 같이 산에도 다니고 만나서 술 한 잔도 하자.” “아이를 잃은 건 슬프지만 너는 그만큼 보상을 받지 않았냐?” 세월호 유가족이 들었던 위로의 말들이다. 상대방의 선의는 의심하지 않으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유가족을 배려하는 행동도 배려가 되진 않았다. “유가족입니다” 하는 순간에 모든 사람들이 아무것도 안 시킨다. 커피 한 잔, 물 한 잔 마시려고 해도 “앉아 계세요, 제가 타 드릴게요.”하고, 어딜 가도 유가족 자리는 따로 마련한다. 지나친 배려는 때론 배제가 된다. 유가족이 술을 시켜도 되나, 화장은 해도 되나, 여행 간다고 손가락질하면 어쩌나 지레 주눅이 든다.

작가는 이 나라가 아이들만 구하지 못한 게 아니라 유가족들의 슬픔도 보듬어주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슬픔을 보듬어주는 게 어떻게 하는 걸까, 생각해봤습니다. 어떻게 해야 유가족들의 슬픔을 보듬을 수 있을까요? 그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이번에 여러분에게 보시라고 한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와 성서 이야기 몇 군데서 그 대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영화에는 정신장애자인 주인공 어니의 열여덟 살 생일을 준비하는 가족들 얘기가 나옵니다. 그때 식구들이 각자가 할 일을 나눕니다. 큰딸은 뭘 하고 작은딸은 뭘 하고 아들은 뭘 하고 등등. 그런데 당사자 어니가 이렇게 묻지요. “나는 뭘 해야 해?” 형인 길버트가 “넌 그날의 주인공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어니가 다시 묻습니다. “내 생일인데 난 뭐 하냐고?” 그러자 가족들은 저마다 이렇게 말하지요. “그냥 있기만 하면 돼. 얼굴만 내밀면 되는 거라고. 너는 그냥 나이만 먹으면 돼.”

 

누가 누구를 학대했을까?

제가 오래 전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다시 볼 때는 이 장면에서 소름이 끼쳤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사건을 겪었기 때문이겠지요. 그 ‘가만히 있으면 된다.’라는 말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가만히 있다가 304명의 소중한 생명이 어떻게 됐습니까. 비록 정신장애자일지라도, 그리고 자기 생일일지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그를 위해주는 걸까요? 정말 그렇습니까? 어린이날이고 어머니날이고 아버지날이고 간에 이젠 꽃으로 퉁 쳐서도 안 되겠지만 그날 하루 아무 일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서 대접만 받고 헤어질 때 돈 봉투 주는 것으로 축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서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던’ 여인 하갈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하갈 얘기는 제가 어머니날에 여러 번 했지만 오늘 또 합니다. 그녀는 이집트인으로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이었다가 주인마님인 사라가 불임이었으므로 주인마님 사라의 뜻을 받들어 바깥주인 아브라함과 동침해서 아들을 임신합니다. 아브라함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한 씨받이가 된 것이지요. 그러자 하갈이 사라를 깔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는 과연 그랬을까 싶습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다 있는데, 하나는 아무리 아기를 가졌어도 그렇지 몸종 주제에 어떻게 주인마님을 깔볼까 싶기도 하고, 다른 하나는 대를 이을 아들이 몹시 중요했던 사회였으므로 아이를 임신함으로써 하갈의 지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성서는 하갈의 입장보다는 사라의 입장에서 얘기를 서술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쓴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찌 됐든 사라는 그 꼴을 참지 못하고 하갈을 학대했다고 합니다. 이런 걸 보면 하갈이 자기 처지를 잠시 망각하고 주제넘게 행동했다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라가 남편의 아기를 가진 하갈을 내쫓지는 못했습니다. 자기 아이가 없는 처지였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하갈이 사라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서 스스로 집을 나갔는데 도중에 하느님의 천사를 만나서 그녀가 낳을 아들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란 약속을 받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하갈은 아들을 낳아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라에게 기적이 일어나서 그녀도 임신을 했고 때가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게 되었는데 하루는 사라가 보니까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기 아들 이삭을 놀리고 있더랍니다. 계산해보면 이스마엘과 이삭의 나이 차이는 14년 이상이 됩니다. 열네 살인 이스마엘이 갓난아기 이삭을 놀렸다는 얘기가 이해하기 힘듭니다. 안 그렇습니까? 데리고 놀았다면 모르지만 말입니다. 좌우간 그 광경을 본 사라는 남편에게 가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졸랐습니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라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는 재산이고 돈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사라와 입장이 같지 않습니다. 이스마엘도 자기의 씨를 가진 자기 아들이니 말입니다. 그가 하갈을 염두에 두었다는 근거는 볼 수 없습니다. 아마 자기 씨인 이스마엘은 소중해도 하갈은 안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때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하갈 때문에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위로인지 뭔지 하는 말씀을 하시고는 사라의 말대로 그들을 내보내라고 말씀했다고 합니다. 이삭 뿐 아니라 이스마엘도 한 민족의 조상이 될 거라면서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지만 오늘은 삼가겠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에 음식과 물을 싸주고서 두 사람을 내보냈습니다. 둘은 빈들을 정처 없이 헤매다가 물이 다 떨어져 죽게 됐습니다. 하갈은 아이를 덤불 아래에 뉘어 놓고서 통곡했습니다. 본문은 마치 이스마엘이 아기인 것처럼 말하는데 나이를 계산해보면 이 때 이미 10대 중반이었으므로 이런 얘기는 좀 맞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때 하느님이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천사가 내려와 하갈을 위로해줬고 눈을 밝혀서 샘을 발견하게 해서 죽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누가 길버트 그레이프를 먹어치우는가?

시대적 배경은 하갈의 그것과 많이 다르지만 자신을 가둔 울타리를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길버트 그레이프>입니다. 영화의 원제목은 <What’s Eating Gilbert Grape>입니다. ‘누가 길버트 그레이프를 먹어치우는가?’ 또는 ‘누가 길버트 그레이프를 갉아 먹는가?’ 정도가 되겠습니다. 이 영화는 제가 좋아하는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작품입니다. 스웨덴 사람인 그는 1980년대 중반에 <개 같은 내 인생>이란 작품으로 영화계에 화려하게 등장했고 헐리웃에 와서도 여러 좋은 작품들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과 <사이더 하우스 룰스 Cider House Rules>라는 영화가 널리 알려져 있고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 영화는 지금은 유명한 배우가 된 조니 뎁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촉망받는 젊은 시절의 영화로서 특히 디카프리오는 정신장애자 연기를 진짜처럼 했다고 해서 찬사를 받았습니다.

주인공 길버트는 어머니와 누나와 여동생, 그리고 정신장애자 남동생 어니로 이루어진, 문제 많은 가정의 20대 실질적인 가장으로 엔도라라는 인구 1천 명 정도의 작은 마을에서 한 식료품점에서 일하는 점원입니다. 길버트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집을 나가 있다가 어느 날 돌아와서 얼마 후에 집 지하실에서 목매달아 자살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때의 충격으로 7년 동안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않고 먹기만 해서 체중이 500파운드나 나가는 거구가 됐습니다. 그녀는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 이외에 다른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게 됐습니다. 스스로 감금한 셈입니다. 길버트의 남동생 어니는 지적장애 소년으로서 이런 경우 10살을 넘기기 어렵다고 말들 했지만 18살 생일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틈만 나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습관을 갖고 있는 그는 가족들과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말썽을 많이 피웁니다. 길버트는 동생 어니를 돌볼 책임을 맡아서 자기 삶이 거의 없다시피 한 피곤한 20대입니다. 서른네 살인 누나 에이미는 학교 카레테리아가 문을 닫는 바람에 집안일을 책임지고 있고 열여섯 살 여동생 엘렌은 한참 사춘기로서 멋 내기에 몰두하는 철부지입니다. 이런 길버트에게 유일한 탈출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웃 유부녀 베티와 맺은 부적절한 관계입니다. 참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엔도라는 1년에 한 번 때가 되면 수많은 캠핑족의 RV가 지나가는 마을입니다. 고여 있어 썩어가는 물 같은 마을에 줄지어 RV가 지나가는 광경은 다른 세상,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느 날 할머니와 함께 떠돌아다니는 캠핑족 아가씨 베키가 자동차 고장으로 엔도라에 머물게 됩니다. 높은 곳에 자주 올라가 마을 경찰의 골머리를 썩이는 어니를 잘 돌보는 길버트의 모습에 호감을 느낀 베키는 길버트와 가까워지고 점차 연인 관계로 발전합니다. 또한 베키는 우연히 길버트와 베티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고 짐작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우연한 사고로 베티의 남편이 사고로 죽고 베티 가족이 마을을 떠나게 되면서 길버트와 베티의 부적절한 관계는 자연스럽게 청산되고 길버트는 베키와의 사랑을 키워갑니다. 가족들은 어니의 18세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열어주려 하지만 계속해서 이런저런 말썽을 부리는 어니 때문에 길버트는 인내의 한계를 느낍니다. 하루는 답답한 마음에 트럭을 몰고 정신없이 질주해서 마을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차마 떠나지 못하고 베키를 찾아가 답답함을 토로하며 하룻밤을 같이 지냅니다.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집으로 돌아와 어니의 생일파티에 참석합니다. 파티 후에 어머니를 2층으로 올라가 길버트가 소개하는 베키를 만난 후에 평화롭게 침대에 누워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제 가족들에게는 어머니 장례를 치르는 일이 남았습니다. 어머니의 몸무게가 5백 파운드가 되므로 아래층으로 모시고 내려올 수 없습니다. 그러려면 크레인을 사용해야 하는 등 보통 어렵지 않겠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은 어머니를 더 이상 세간의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집에 불을 지릅니다. 어머니를 집과 함께 화장한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 집은 아버지가 지은 집이고 아버지는 그 집의 지하실에서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가족들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함께 장사지낸 셈입니다.

이야기는 1년 후로 이어집니다. 가족들은 각자의 길을 갑니다. 에이미는 취직을 했고 여동생은 엘렌은 전학을 했습니다. 길버트는 어니를 데리고 베키의 캠핑카를 타고 엔도라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걸로 영화를 끝납니다.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 주일에 이어갈 텐데 오늘은 여러분에게 생각할 거리 하나를 던져주고 끝내겠습니다. 이 영화에는 기억에 남는 장면과 대사가 많이 있는데 그 중 하나만 소개하겠습니다. 베키가 길버트에게 뭘 원하느냐고 묻자 길버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가족을 위한 새 집과 어니를 위한 새 두뇌와 어머니가 에어로빅 레슨을 받는 것과 여동생이 철이 들기를 원한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베키는 가족들 말고 길버트 자신이 원하는 게 뭐냐고 묻지요. 이에 길버트는 ‘좋은 사람’(a good person)이 되는 거라고 대답하고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합니다.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길버트는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용어를 썼는데 거기에 다양한 단어를 대입시킬 수 있겠습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좋은 아들, 좋은 딸, 좋은 사위, 좋은 며느리, 좋은 형/누가/언니, 좋은 동생 등등. 좋은 기독교인, 좋은 목사 등등도 가능하겠습니다. 대체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 겁니까? 사라는 좋은 사람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은? 하갈은 좋은 사람이었습니까? 또한 하느님은 좋은 하느님이었습니까? 이런 물음에 대해 정답이 있겠는가마는 어쨌든 다음 주일에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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