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만희] 지긋지긋한 새 계명
[박만희] 지긋지긋한 새 계명
  • 박만희
  • 승인 2019.06.14 06: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만희 전도사의 설교 - 요한복음 13장 31~35절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우리 모든 삶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민수기 끝 부분에는 특이한 사건이 하나 들어 있습니다. 슬로브핫이라는 사람의 딸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이 내용은 왜 들어있을까 싶은 이야기들이 많은데요. 슬로브핫의 딸들에 관한 내용도 그런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앞으로 살아갈 땅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땅을 약속합니다. 바로 가나안이죠. 하지만 거저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던 다른 민족들과 싸워서 얻어야 했습니다. 그 과정을 여호수아가 담아내고 있죠. 그때 나온 유명한 표현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갈렙의 간구입니다. 우역곡절 끝에 그들은 땅을 얻습니다. 땅을 얻은 다음 해야 할 일은 뭘까요. 땅 분배입니다. 땅을 나누는 일이죠. 어떻게 나누면 될까요? 땅을 얻는데 큰 공을 세운 가문에게 더 많은 토지를 주면 될까요? 조선왕조를 다룬 사극에서 하는 것처럼, 여호수아나 갈렙 같은 일등 공신들을 중심으로 분배하는 게 가장 합리적일까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얻은 땅을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주도록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땅은 필수조건이기 때문입니다. 편안하게 누울 집과 먹을 음식을 내는 밭이야 말로 누구도 저당 잡을 수 없는 삶의 기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은 누구나 차별 없이 땅을 분배 받도록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율법은 땅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누구도 땅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적 소유가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성서는 알았던 겁니다. ‘베가본드’라는 일본 만화가 있는데요. 그 만화책에서도 이런 대목을 봤습니다. ‘땅은 모두의 것이다.’라는 말이었는데요. 땅은 모두의 것이라는 말과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은, 땅이 누군가의 사적 소유가 되면 안 된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같은 뜻이죠. 이처럼 성서에 있는 땅 분배 장면은, 성서가 인간 삶의 기본 조건에 얼마나 깊이 관심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성서가 적어도 수천 년 전 기록이라는 걸 생각할 때 저는 놀라운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인식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가부장 제도를 기본으로 합니다. 변명의 여지없이 남성 중심적이죠. 땅 분배 역시 남성을 중심으로 합니다. 먼저는 가족을 대표하는 아버지에게 땅을 줍니다. 혹 아버지가 전쟁이나 병 때문에 죽게 되면 아들이 땅을 이어 받습니다. 이게 율법입니다. 처음 받은 땅을 다른 사람이 빼앗지 못하게 하려는 겁니다. 이게 법입니다. 하나님 말씀인 동시에 일종의 재산 보호법인거죠. 그런데 변수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땅을 물려받을 아들이나, 다른 남자가 없는 경우가 생긴 겁니다. 그게 슬로브핫의 딸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죽었고, 집안에는 땅을 물려받을 다른 남자가 없습니다. 그러자 슬로브핫의 딸들은 모세를 찾아갑니다. 자신들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모세는 어떻게 대답할까요. 어떤 판결을 내릴까요. 이렇게 답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정은 딱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어길 수는 없다. 또한 이 세상에도 하나님이 정한 질서가 있으니 여자들만 있는 너희 집에는 땅을 분배해줄 수 없다. 안타깝지만 나로서는 딱히 방법이 없다. 기도해보자.’라고 답했다고 상상해 봅시다. 환장할 일이죠. 지도자로써 얼마나 무책임하대답인가요. 다행히 모세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민수기 27장 7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한 말이 옳다. 그 아버지의 남자 친족들이 유산을 물려받을 때에, 너는 그들에게도 반드시 땅을 유산으로 주어라. 너는 그들의 아버지가 받을 유산이 그 딸들에게 돌아가게 하여라.”

이것이 모세의 판결입니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모세는 감히 율법에 손을 댑니다. 그는 잘못한 걸까요? 아닐 겁니다. 이 판결은 율법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아주 좋은 예가 됩니다. ‘왜 여기 들어가 있을까?’ 싶은 슬로브핫의 딸들의 이야기는 율법에 대한 변수가 있을 때, 율법이 무엇을 우선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모세의 판결은 율법 정신이 향하는 방향을 가리켜 줍니다. 율법이 율법 자체가 아니라, 삶을 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구약 전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는 게 무엇인지를, 우선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이야기입니다.

본문과는 거리가 먼 얘기로 이 시간을 시작했습니다. 왜 슬로보핫 딸들의 이야기로 서론을 시작했는지는 뒤에서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보시다시피 아주 짧은데요. 짧은 길이에 비해 본문은 저 같은 설교자에게는 아주 난감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3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34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어디부터 어떻게 얘기하면 좋을까요. 아니,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게 이해가 필요한 말씀이기는 할까요? 예수님이 주시는 새 계명이라는 데 못 보고, 못 들은 체 할 수도 없고 말입니다. 말하는 저로써도 곤란한 말씀이지만, 듣는 우리로서도 만만치 않은 말씀입니다. 그래도 조금 말을 보탠다면, 이 말씀은 예수님이 떠나시기 전 제자들에게 남긴 고별 설교 중 일부입니다. 고별 설교라는 소제목이 보여주듯, 예수님은 제자들은 남겨두고 떠나려고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은 곧 떠나실 예수님이, 이제 남아 있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 내용을 볼 때, 예수님이 남긴 마지막 유언이니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겠냐고 주의를 기울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잡히기 전 제자들과 함께한 마지막 자리였으니, 얼마나 엄중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렇게 읽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도 좋습니다.

한편으로는, 초점을 조금 옮겨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죽으러 가는 비장한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남겨질 자들에게 초점을 두고 읽는 겁니다. 최근에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성경은 왠지, 예수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고 말할 것 같은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떠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의외로 요한복음에서 그 점이 두드러집니다. ‘이제 너희가 따를 나는 없다. 치유와 축귀로 사람들을 회복할 나도 없다. 죄인과 창녀들을 차별 없이 식탁에 초대해 함께 식사할 나도 없다. 이제 남는 것은 너희다.’라고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그럼에도 예수가 우리와 함께 한다면, 호위천사 같은 방식으로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의 말이 우리 안에 또아리를 틀어 자리를 잡는 방식으로 거하는 겁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 우리 안에 깊게 새겨지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럼 문제는 다시 우리겠죠. 우리의 말과 몸이 예수의 그것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요한복음은 남겨진 예수의 공동체, 즉 ‘교회’에 대해 말합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철저하게 남겨진 공동체를 향합니다.

그렇다면 남은 이들이 기억해야 할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게 뭘까요. 단 하나 명심해야 할 것 말입니다. 그게 예수의 후예들이 이 땅에 남겨진 이유일 텐데 말입니다. 교회가 예수의 몸이라고 불리는 까닭일 텐데 말입니다. 혹시, 의리 아닐까요. 같은 교인들끼리 밀어 주고 당겨주며 덮어 놓고 덮어 주는 그거 말입니다. 동향 사람끼리는 돕고, 동문끼리는 서로 당겨주고, 결정적일 땐 피붙이만 챙기게 되는 그런거 말입니다. 근데 그거 가끔은 의리 아닌가요. ‘남자는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고 조직 폭력배들이 말하곤 하는 그거 말입니다. 가끔은, 예수님이 주신 새계명이 교인들끼리는 의리를 지키라는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질서는 어떤가요. 성서에 기록된 내용을 하나님이 정해놓은 불변의 질서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질서가 뒤바뀌는 일을 견디지 못합니다. 질서하면 떠오르는 것들, 이를테면 나이, 성별, 가족 등의 관한 가치가 바뀌면 그것을 악이라고 지탄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정해놓은 질서라고 말하면서도, 자연 질서,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환경을 망가뜨리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무심한 걸 보면, ‘질서 뭘까’ 싶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무엇을 기억하고 명심하며 살고 있는 걸까요.

사실 우리는 그 답을 압니다. 사랑이죠. 예수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저는 이렇게 읽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다 잊더라도, 다 안하더라도, 단 하나 기억하고 명심할 게 있다면, 남은 너희가 할 일은 사랑이다. 내가 없더라도 그거 해라. 사랑이 내가 너희와 함께 하는 방법이다.’라고 말입니다. 35절은 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질문이 해결 되지는 않습니다. 그럼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의리를 지키는 게 사랑이 아니라면, 혈연 지연 학연을 고수하는 게 의리에 불과하다면, 사랑은 뭘까요. 뭘 어쩌면 될까요. 밑도 끝도 없는 많은 이야기가 가능하겠지만, 오늘은 같은 교회력 본문인 사도행전으로 설명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본문은 베드로가 환상을 본 장면입니다. 환상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늘에서 바구니가 내려왔는데, 그 안을 보니 율법이 부정하다고 지정한 온갖 짐승이 들어 있는 겁니다. 그 장면만 보았다면 ‘부정한 것을 조심하라는 뜻인가’ 정도로 해석했을 텐데, 내려오는 바구니와 함께 음성도 들립니다. ‘잡아 먹어라’는 음성이었죠. 깜짝 놀란 베드로는 고개를 크게 가로저으며 대답합니다. ‘율법이 부정하다고 말한 것을 먹을 수 없다’며 그 명령을 거부합니다. 베드로의 그런 반응에 다시 하늘의 음성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말한 것을, 네가 더럽다고 하지 말라’는 충격적이면서도 엄중한 음성입니다. 이 환상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본 후, 베드로는 외국인 고넬료에게 세례를 주게 됩니다. 외국인이 세례를 받은 첫 번째 사건입니다. 유명한 이야기죠. 그런데 이 사건을 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과 함께 읽도록 해놓았을까요.

두 이야기를 왜 붙여 놓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베드로가 본 환상은 앞에서 말한 슬로브핫의 딸들 이야기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두 사건 모두 절대 손대면 안 될 것 같은 율법을 바꾸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모세와 베드로가 크게 착각한 게 아니라면, 그들이 바꾸고 넘어선 그 일은, 하나님의 뜻일 겁니다. 율법을 바꾸어서라도 슬로브핫의 딸들이 살아가도록 하는 게 율법의 정신인 것을 모세는 알았을 겁니다. 그 일이 하나님의 속내에 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던 겁니다. 그 새로운 법은 또다시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다른 딸들을 껴안는데, 좋은 모범이 되었을 겁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하나님의 회중에서 자신들이 제외되지 않게 해달라고 떳떳하고 당차게 요구했고, 모세는 그 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 계명을 다시 읽고 새롭게 했던 겁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 역시 그렇습니다. 흔히 선교를 위해 사용되는 이 본문은, 해외 선교를 위한 복음 전도에만 머무르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베드로의 환상은 하나님의 범주가 이미 달랐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나님과 달랐던 베드로의 범위를 바꾸고 넓힙니다. 더럽다고 여기던 무언가를, 그렇지 않다고 여기게 된 첫 사건입니다. 음식에 관해 절대적이었던 계명이 뒤집힌 사건입니다. 새로워진 계명은 새로운 사건을 불러옵니다. 그것은 언제나 사람을 향합니다. 고넬료와 그의 가족을 하나님의 사랑에 포함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하나님에게 원래 그랬던 일을, 이제야 베드로도 알게 된 겁니다. 하나님에게 더러운 사람인 적 없던 사람들을, 베드로도 이제야 부정하지 않다고 말하게 된 겁니다. 부정함에 관한 새로운 계명 덕분에, 사랑의 범위를 알게 되었고, 사랑하게 된 겁니다.

혹자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제자 공동체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제한합니다. 맞는 지적인지도 모릅니다. ‘서로’라는 표현을 봐도 그렇고, 고별 설교를 듣는 이들도 제자들에 한정되는 게 맞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엄밀하게 보면, 교회 공동체 안에 하신 말씀으로 읽는 게 맞다는 겁니다. 틀린 읽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최근 교회 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분열이나 갈등을 생각하면, 교회 공동체 내부를 향한 말씀으로 읽는 게 인지상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공동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의 수취인을 우리에게만 제한해도 충분히 빡셀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무엇을 하면 될까요. 사랑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실천하면 될까요. 서로 사랑하라는 데 뭘 하면 될까요. 여기서 '서로'는 누구를 뜻하는 건가요. 상황이 비슷한 사람인가요. 마음이 맞는 사람인가요. 비슷한 또래인가요.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는 게 새로운 계명을 지키는 일인가요. 의리 아니구요? 그렇다면 어차피 우리 안에도 ‘서로’가 아닌 ‘바깥’이 있는 겁니다. 땅에서 배제될 위기에 놓인 슬르브핫의 딸들이, 더럽다고 판단 받은 고넬료가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수취인을 공동체로 두는 일과, 그 범위를 바깥으로 넓히는 일은 결국 다르지 않습니다.

슬로브핫 딸들이 겪은 구체적인 이야기와 고넬료가 받은 세례 이야기를,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과 함께 생각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역시 계명을 새로 읽는 겁니다. 우리가 가진 내적 율법의 범위를 넓히는 겁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배제되지 않도록 내적인 땅을 내어주고, 하나님이 깨끗하다 하신 삶을 더럽다고 결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포함을 넘어 '함께'하고, 관용을 넘어 환대하는 겁니다. 서로 사랑하는 말씀의 범위를 ‘특정한 서로’에 가두지 않고, 넓히는 겁니다. 율법의 범위를 넓히는 일은 단순히 혜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율법이 바뀐 덕분에 슬로브핫의 딸들이 얻은 건 땅이라는 혜택에 그치지 않습니다. 부정함에 대한 계명이 바뀌어서, 고넬료에게 좋은 건 세례라는 행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배제되지 않는 일이죠. 예수의 몸과 함께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게 된 일입니다.

Henry Davenport Northrop, Treasures of the Bible , 1894.
Henry Davenport Northrop, Treasures of the Bible , 1894.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서로 사랑하라’는 단 하나의 계명에 관한 완전한 설명은 아닐겁니다. 오늘 설교에 사랑이 전부 포섭되지 않으니 물어야죠. 새로운 계명을 우리는 다시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단 하나의 계명이 있다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맞는지, 그게 맞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지 끈덕지고 복잡하게 묻고, 해보는 게 우리 일 일겁니다. 제자들을 남겨두고 가시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먼 과거에 한 번만 행해진 고리타분한 교훈이 아닙니다. 그 분은 오늘도 남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겁니다. ‘새로운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