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이택환]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 이택환
  • 승인 2019.07.02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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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사도행전 16:6~10

오늘 말씀에는 특이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먼저 6절,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다음은 7절,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는 지라” 그리고 10절,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 인정함이러라.”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오늘 말씀에 성령-예수님-하나님의 순서로 나옵니다. 원래 바울은 바리새 정통 유대교인으로서 유일신 사상에 위배되는 삼위일체 하나님 개념이 아예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신학이 달라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과 늘 함께하는 사람이 되었지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깊이 연구한 학자들은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 관계는 지배-종속이 아닌, 서로 안에 서로가 거하며,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관계, 신학적 용어로 ‘상호내주’, ‘상호침투’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사귐’과 ‘교제’지요. 그런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들 역시, 관계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간다는 것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과 교제의 삶을 일상 속에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 가득할 때에는 누구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요. 하지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리스도인이라도 관계가 삐걱거립니다. 내재된 갈등이 드러나면서 가족들이 다투기도 하고, 교회 공동체가 갈라지기도 합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는 원래 안디옥교회에서 처음 선교 사역을 할 때부터 바나바와 동역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바나바가 아닌 실라와 동역합니다. 사도행전 15장 끝부분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요한을 선교지에 데려가는 문제로 심히 다툰 끝에 밤빌리아에서 서로 갈라섭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조카 마가요한과 함께 남쪽 구브로 섬으로 내려가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북쪽 더베, 루스드라 쪽으로 올라갑니다.

아무리 위대한 바울, 훌륭한 바나바라 해도, 이건 삼위일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갈라질 때, 스스로 합리화하기 위해 종종 이 사건을 이용합니다. 교회가 분열하면서 부흥한다는 것이지요. 아예 한국교회 부흥의 원인이, 활발한 핵분열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이 바나바와 갈라진 후, 승승장구했거든요? 루스드라에서는 신실한 청년 디모데를 만나 선교 팀에 합류시킵니다. 그리고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믿는 사람들의 수가 날마다 늘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예외적인 은혜지, 결코 싸우고 갈라져야 부흥한다는 논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때 성령이 더 이상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왜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아시아”는 오늘날의 아시아 대륙이 아니라, 터키 중서부의 로마 행정구역을 말합니다. 거기서 성령이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금하시고 막으셨다는 것인데, 어쩌면 바울이나 혹은 누군가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우리-구문’이라는 게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되던 사도행전이, 16장 10절 부터 종종 ‘우리’라는 1인칭 복수 시점으로 서술됩니다.

“10a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를 두고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바로 이 때 바울과 합류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선교 팀 가운데 누군가 병에 걸렸기에, 의사 누가가 합류했다는 것입니다. 혹은 선교 팀에 재정적인 어려움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로마제국이나 유대인들의 강력한 박해나 자연재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을 급히 통과합니다(pass through). 그들이 아시아 서쪽 무시아에 도착하자 비로소 안심되었는지, 다시 동북쪽 비두니아로 가려고 애를 씁니다(페이라조). 이를 위해 바울이 이런 저런 시도를 해 보고, 시험도 해 보았지만,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이것은 성령의 뜻이고 저것은 예수님의 뜻이다” 우리가 명확하게 하나님을 뜻을 알아내는 방법이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당시 바울 역시, 오늘날 우리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항상 들었다면, 불필요한 시도는 하지 않았겠지요.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몇 가지 예를 들면, 1998년에 장신대 교수 한 분이, 당시 북한 김정일이 5년 안에 실각하고 살해당한다는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실각 하지 않았고, 13년 뒤에 자연사합니다.

2007년 6월에는 데이빗 오워라는 예언자가 한국 교회를 순회하며, 3개월 안에 한반도에 전쟁이 난다고 선포했습니다. 2014년 3월에는 홍혜선이라는 전도사가 그해 12월 14일에 전쟁이 난다고 예언했지요. 그들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수시로 듣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요동하고, 심지어 일부는 해외 집단 도피까지 했는데,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2017년 말에는 누가 아들 낳을지 딸 낳을지, 어느 동네로 이사 가면 좋을지,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목사가 있다고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 할까요?

사실 대부분 평상시엔 하나님의 뜻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언제 관심이 생기는가? 대학갈 때, 이직 할 때, 결혼할 때, 집 사고 팔 때 등입니다. 모두 중요한 결정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 때에는 성경을 읽지 않던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며 갑자기 성경을 읽고, 새벽에 일어나지도 않던 사람이, 하나님 음성을 듣겠다며 스스로 새벽기도를 나갑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솔직히 진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하는 열망보다, 중요한 결정을 잘못해서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결코 손해 보면 안 된다는 욕망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확실하게 보장된 탄탄대로를 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제럴드 싯처는 이런 것들이 실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미래를 통제하고자 하는 일종의 하나님 놀이(Playing God) 아닐까요? 사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미래보다 우리의 현재와 더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것, 이게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면, 무엇을 하든, 무엇을 하지 않은 아무 것도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우리 아이를 “하나님 뜻대로 연대에 보내야 성공하는데, 고대에 보내서 망했다?” 그런 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무조건 성공하고, 뜻을 거스르면 무조건 실패한다?” 그런 등식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도 망할 수 있구요,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보물찾기하시듯, 우리의 미래에 대한 당신의 뜻을 찾기 힘든 성경 구절 속이나, 100일 기도 끝에 꼭꼭 숨겨놓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과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미래에 대해 불필요하게 두려워할 게 없어요.

언더우드는 원래 인도 선교사를 꿈꾸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힌두어까지 배워두었습니다. 그런데 인도 선교의 길이 막히고, 조선 선교의 길이 열려서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주춧돌을 놓은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만약 언더우드가 인도로 갔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실패한 선교사가 되었을까요? 토머스 선교사는 중국 선교에 뜻을 두고 상하이로 파송 받았지만, 얼마 후 아내가 사망합니다. 이후에도 선교 사역이 잘 풀리지 않던 중,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의 통역자로 탑승해 대동강으로 들어갔다가, 평양 양란(1866) 때 순교합니다. 그렇다면 토머스 선교사는 처음부터 선교사가 되지 않는 게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당시 바울은 동쪽 아시아로 가는 길이 자꾸 막히자, 깊은 고민을 하던 중 드로아에서 밤에 꿈(호라마, 환상)을 꿉니다. 그 꿈속에서는 동쪽이 아닌 바다(에게해) 건너편 서쪽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바울에게 “이리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 서서(히스테미, 계속해서) 요청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아침에 실라와 디모데 등 선교팀원들과 함께, 자신이 밤에 본 환상에 대해 깊이 논의한 것 같습니다.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은 꿈의 의미를 공동체와 함께 해석했습니다. 그날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님이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으로 인정했다!”입니다. 인정하다, '쉼비바조'의 의미는 그들이 함께(쉼) 추론해서 함께 결론을 내렸다는 것입니다(비바조). 그들이 환상을 해석할 때, 그동안 경험했던 공동체의 경험(아시아에서 복음 전도의 길이 막힌 것 등)과 각자의 지/정/의를 총동원하여, 함께 결론 내렸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확신이라기보다 추정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바울 일행은 아시아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바다 건너 마게도냐로 가기를 힘씁니다(제테오, 열망하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환상을 무시하고 다시 아시아 쪽으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죄로 저주받았을까요? 역사의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꼭 그렇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아마 또 다른 길이 열렸겠지요. 마게도냐로 간 바울이 물론 훌륭한 선교사역을 감당했지만, 당장 첫 성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히는 곤혹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생의 마지막은 결국 로마 감옥에서 참수당하는 것으로 끝나지요.

많은 경우, 우리 앞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유일한 단 하나의 미래만을 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자유를 말합니다. 그 자유 안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우리의 경험과 사고를 총 동원하여, 하나님께서 현재 우리를 부르셨다고 인정하는 그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왕이면 개인 혼자의 결론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함께 결론 내리면 더 좋겠지요(쉼비바조!).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과 교제의 삶을 일상 속에 살아간다면 더욱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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