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삶
[김동환]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삶
  • 김동환
  • 승인 2019.06.1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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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목사의 설교 - 마가 1:14~15, 누가 11:2
JESUS MA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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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플루언서?

학교 수업을 하다 보면, 교실 안의 아이들 모습이 작은 사회의 모습과 같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저마다 다양한 아이들이 모여있는데요, 자기 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아이, 다른 친구들을 먼저 생각하고, 서로 싸우지 않게 조정해주는 아이, 언제든지 주인공이 되고 싶은 아이, 아무 컬러 없이 조용히 있는 아이,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 등등 다양한 모습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느 교실에나 반 분위기를 이끌고, 좀 더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영향력을 많이 끼치는 친구가 말괄량이 친구이면 수업할 때 에너지가 좀 더 들어요^^; 대신 분위기는 재밌습니다. 다 장단점이 있지요. 공부 분위기와는 별도로, 아이들끼리 말다툼이 생겼을 때 싸움을 부추기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중재하고 서로 화해하도록 돕는 아이가 있어요. 평화의 아이가 있으면 교실 분위기가 한결 좋아지는 걸 느껴요. 끝까지 그렇게 자라 갔으면 좋겠지만, 아이들은 나이 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하겠죠?

어떤 아이들이 모이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교사의 영향력도 큰 것 같아요. 어떤 아이들을 보면, ‘아, 어떤 선생님이 와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요, 어떤 반 수업을 들어가면, 여기는 선생님의 영향력이 엄청 크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질서 정연한 모습, 정돈된 학습 분위기. 꼭 그게 정답이고, 좋은 거다 할 수는 없겠지만, 선생님 스타일에 따라 반 분위기가 많이 바뀐다는 걸 체감하고 있어요. 일주일 동안 스무 반이 상을 다니다 보니까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속한 모임들이 있을 텐데요, 각각의 모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나요? 가정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여러분이 그 공동체에 끼지는 영향은 어떤 것인가요? 또 우리 길섶 교회 공동체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요?

‘인플루언서’(Influenc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보다 여러분이 더 잘 아실 텐데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 등등으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마케터들을 부르는 말이죠? 저도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습니다. 꼭 마케팅하는 사람은 아니어도, 우리는 어디에서나 특정한 영향력을 흘려보내고 있어요. 좀 튀는 사람이 있고, 덜 튀는 사람이 있지만요. 어떤 모임이 좋은 모임인지 아닌지는 각각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영향력이 서로에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보면 될 것 같아요! 특히 신앙공동체, 교회에서는 더 그런 것 같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똑같이 소중하다는 게 신앙공동체의 핵심이니까요. 개성은 다 다르지만, 가치는 무한으로 똑같이 여기는 모임. 목사, 회장, 임원, 등등 어떤 직급의 몇몇이 탁월한 영향을 끼치기보다는 서로가 유기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모임이 되길 소망합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영향을 미치다 보니 좀 더 영향을 미칠 수는 있는데요, 저도 제 컬러로만 우리 모임이 끌려가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그래서 더 기대가 돼요, 그래도 한 달에 한 명, 두 명은 저희 모임에 새로 오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향으로 저희 모임이 늘 새로워질 거라는 기대가 되거든요. 물론 모임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향력이 있기를 소망해야겠지요?

 

2. 하나님 나라?

오늘은 짧은 두 개의 본문을 읽었는데요, 공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있죠?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 앞서 이야기한 단어로 하면 인플루언스, 하나님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 곳이 될 수 있겠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 수준이 여러분의 신앙의 성숙도를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일 수 있어요. 그만큼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개념이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조금 생소하다면, 오늘 잘 정리를 하시면 좋겠고요, 익숙하신 분은 좀 더 세련되게 정리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생소하시다면, 이 단어보다는 ‘천국’이란 말이 더 익숙하실 거예요. 하나님 나라와 천국은 같은 말일까요, 다른 말일까요? 같은 말입니다. 마태복음에서만 하나님 나라를 하늘나라(=천국)이라고 했어요. 마태복음이 유대인 공동체에게 예수님을 증언하는 책인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란 말을 거룩한 말로 생각해서 쓰질 않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하늘나라로 사용했고, 한잣말로 줄이면 천국이 됩니다. 마가복음 1장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시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더불어 함께 읽은 주기도문 본문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 오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올 것으로 기도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향력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더욱 강하게 임하길 기도하는 거예요. 사실, 하나님의 영향력이 없었던 시간, 없는 공간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없는 곳이 없으시며, 모든 역사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예수님꼐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심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영향, 통치가 그 전에는 없었는데 이제 시작되었다는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없었던 적이 없었고, 그 분의 권능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직접 인간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던 사건 만큼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하게 사람에게 드러나 보인적은 없었지요. 하나님의 영향이 이토록 선명한 적이 없었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이 세상에 더욱 드러나 보이길 소원하게 합니다. 때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고, 때로는 완전히 망한 것 같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이 안계신 것 처럼 보일 거에요. 그럴 때는 탄식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소서 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놀라운 사건들로 인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우리 눈에 보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구원의 손길로 새 힘을 얻을 때, 절망 중에 새로운 빛을 보고 희망을 갖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 그래서 신앙인의 마음은 하늘에서 땅을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 하늘의 영향력이 이 땅으로 내려오길 소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몸을 입고 땅으로 오셨듯이, 그런 선한 영향력이 계속해서 내려오길 소망하고, 그 소망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3. 천국과 지옥

그런데 이 중요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 교회에 제대로 울려퍼진 것은 1800년대 중반 이후에야 시작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교회는 사람들애 땅을 쳐다보지 않고 하늘만 보게 가르쳤습니다. 죽어서 새로운 어떤 공간으로 떠날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하는 거에요. 물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바르게 가르친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교회는 하나님의 영향력이 땅으로 내려오길 바라는게 아니라, 우리가 올라가길 바라는 소원성취의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성당을 보면 건물이 하늘을 향해 높고 뾰족하게 올라가지요? 교회의 가르침의 방향이 하늘로 향해 있었던 거예요. 물론 오늘날의 교회의 건물도 그렇게 짓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땅에서 사람들과 자연과 어떻게 어울려야 할지를 고민하는 건축이 아니라, 그냥 하늘로만 치솟기를 바라는 건물들, 그건 우리의 이웃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가 높아만 지고 싶어 하는 욕심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천국에 간다’는 표현은 그래서 성경적인 표현은 아닙니다. 부활 신앙을 한국에 있는 어르신들에게 와 닿게 표현하기 위한 문화적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사용하는 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낸 분들에게는 고인이 천국에 가셨을 것이라고 말하는 게 좋겠습니다. 다만, 천국에 갔다는 말의 내용을 이렇게 이해하면 될 것 같은데요, ‘세상 마지막 날, 새로운 몸을 입고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 다시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따라서 천국을 다녀왔다, 지옥에 다녀왔다는 간증은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저도 신학교 가서야 배웠어요, 그런 간증들이 이단적인 내용이라는 것을요. 신학교 가기 전에는 천국 지옥 간증을 엄청 좋아했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자극도 되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확실하게 됐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동기부여를 하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해도 기독교 아니면 아닌 겁니다.

우선 기독교 신앙은 ‘사람이 아무 대가 없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었다’는 걸 말합니다. 우리의 착함으로, 어떤 자격으로 새 생명을 얻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나의 어떤 노력으로 천국을 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을 갖는 것 자체를 선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내용을 믿었으니까 천국을 간다, 이렇게 하거나, 내가 어떤 선한 행동을 했으니까 천국에 더 많은 보화를 쌓았다고 말하거나, 누군가 나쁜 행동을 했으니까 지옥에서 어떤 벌을 받을 것이다, 이런 식의 생각을 하는 건 이미 공로 주의를 말하는 겁니다. 내가 뭔가 했으니까 구원받은 것이다, 내가 무엇을 했으니까 상을 받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우선 기독교 신앙은 ‘사람이 아무 대가 없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었다’는 걸 말합니다. 우리의 착함으로, 어떤 자격으로 새 생명을 얻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나의 어떤 노력으로 천국을 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을 갖는 것 자체를 선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내용을 믿었으니까 천국을 간다, 이렇게 하거나, 내가 어떤 선한 행동을 했으니까 천국에 더 많은 보화를 쌓았다고 말하거나, 누군가 나쁜 행동을 했으니까 지옥에서 어떤 벌을 받을 것이다, 이런 식의 생각을 하는 건 이미 공로 주의를 말하는 겁니다. 내가 뭔가 했으니까 구원받은 것이다, 내가 무엇을 했으니까 상을 받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본질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사고방식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생명을 받을 자격이 없고, 그럴 능력도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무조건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이것을 머리로만 받아들이는데서 가슴으로 인정하고 행동으로 반응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게 신앙의 성숙입니다. 천국에다 뭐 쫌 쌓아놔야지 하는 생각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헌금을 하고 이렇게 한다면 그건 무속신앙이 되고 맙니다. 지옥은 신약성경에서 몇 번 안 나오는데, 게헨나라는 신약시대의 구렁텅이 지역을 번역하면서 땅의 감옥, 지옥이라고 번역할 때 나온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적 생각 중에, 죽으면 염라대왕에게 끌려가서 자신의 죗값에 따라 어떤 벌을 받게 된다, 이런 내용들이 있지요? 이걸 기독교 언어로 탈바꿈한 게 지옥 간증입니다. 지옥에 갔더니 이순신 장군도 봤고, 석가도 봤고 그들이 어떤 벌을 받고 있고 이런 내용들…

지옥의 공포로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게 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말 본인도 그렇게 믿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성도들을 움직이기 쉽게, 공포정치를 하고 싶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요, 그런 건 중세시대의 소설에 나오는 내용이지 성경의 내용은 아닙니다. 온 세계에, 온 우주에 하나님의 통치가 없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세상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이 있은 후에도 하나님의 통치가 없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상상은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돌아서는 영혼들이 있을 수 있을 것을요. 예수님의 사랑인 진실이었다는 것을 끝까지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부활 후에도 하나님을 멀리하는 존재들의 삶의 자리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 보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마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정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서는 할 수 없는 나쁜 행동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존재들의 공간을 굳이 말하자면 지옥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 공간이 어떤 공간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에서 지옥이란 말이 언제 어떻게 쓰였는지는 다음에 그 본문들을 다루며 다시 짚어보겠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내용을 좀 더 깊이 생각해볼게요. 오늘 기억해두셔야 할 부분은, 우리가 하늘로 가는 걸 소망하는 게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영향이 우리가 발 딛는 현실로, 이 세계로 좀 더 강하게 드러나길 소망하는 게 기독교!라는 점입니다.

 

4. 하나님 나라를 발굴한 신학자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중세 소설들, 중세 판타지들이 근대시대 이후, 과학시대 이후에는 전혀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늘 위에는 천국의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층권이 있고, 오존층이 있고, 그 위에는 광활한 우주가 펼쳐져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성경의 핵심 메시지가 죽음 이후의 문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가 이 땅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보게 하는 눈, 이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보게 하고 또 갈망하게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1800년대 중반 이후부터 논의가 독일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쓸데없는 교리들과 가르침들을 벗겨내고 벗겨내고, 신앙의 본질, 알맹이가 무엇이냐를 파고들었더니 ‘하나님 나라’가 나온 것입니다.

독일의 교리 신학자들이 이 작업을 시작할 때, 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신(새로운) 개신교라고 불렀습니다. 내 세지 향적이며 세상에는 무관심한 딴소리를 하는 기독교 아니라, 성경의 핵심 내용을 추적해나가고, 그 내용을 가지고 세상과 대화하려는 일련의 신학자들, 그래서 문화 개신교라고도 불렀습니다. 물론 그 시대의 그 신학자들은 자기들을 그렇게 부르지 않았지요, 새로운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본래 신앙의 핵심을 짚고 싶었던 것이니까요. 1900년대 중반까지 100년의 독일 역사 가운데, 이 하나님 나라를 발견해낸 신학자들이 후배의 신앙인들에게 주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만드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인데요, 당시 독일 상황을 좀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를 처음 이야기한 신학자들, 그러니까 ‘새로운 개신교’라고 불린 사람들 중에는 사회민주주의 운동가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구한말에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새롭게 만들어갈 대안(동학 이후)으로 떠오른 게 기독교와 공산주의 운동이었거든요. 공산주의 운동은 평등을 좀 더 문자적으로 실현하려 했습니다. 땅이라든지 공장 같은 것들을 모두 국유화하는 방법으로 말이죠. 이것을 처음 이야기한 마르크스는 이런 상태는 사회의 마지막 단계에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을 좀 더 빠르게, 그리고 인위적으로, 필요하다면 폭력도 사용해서 이루자는 급진적 공산주의자들이 생겨나게 되고 이 그룹이 러시아 혁명을 일으키게 되죠.

마르크스가 독일 사람이기도 해서 그런지, 독일에서는 이미 풍부한 토론들이 일어납니다. 공산주의는 너무 급진적으로 사회를 바꾸는 거라, 자유민주주의에서 수정 보완된,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한계를 보완해주는 민주주의, 개인과 공동체 간의 조화를 지향하는 수정된 민주주의 운동이 생겨났는데, 이를 사회민주주의 운동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비스마르크가 이런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금지시키기도 하고 그랬는데요,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해방 후에는 전부 공산주의로 몰려서 사회민주주의 정당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문제는 신학자들, 그러니까 처음에는 목사들이 사회민주주의자로 활동을 하고, 노조운동을 같이 하거나 오히려 주도를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운동이 변질되는 상황도 있었고, 때로는 폭력적인 운동이 생겨나기도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노조는 1987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약간 노조-이기주의가 생기다 보니 결과가 안 좋게 되었는데요, 노조가 건강하게 자리 잡은 대표적인 국가가 독일이죠. 하지만 1800년대 후반부터 100년의 역사를 보면 정말 많이 싸우고 투쟁해온 결과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아무튼, 그래서 신학자들 목회자들 중에. 사회의 상황에 따라 때로는 사회민주주의 그룹과, 때로는 노조와 힘을 합칠 수는 있지만, 정치와 신앙이 같다는 건 아니다는 것을 정확히 짚습니다. 때로는 같이 힘써왔던 세상의 공동체를 건강하게 비판하기도 하고, 견제하기도 해야 하는 게 신앙공동체라는 거죠. 이 정도 이야기하면 왜 신개신교라고 말했는지 느낌이 오죠? 그전에는 사회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어떻게 되는지를 가르치고, 어떻게 하면 죽음 이후의 세계의 구원을 좀 더 확실하고 안전하게(?)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중심이었던 거예요. 그러다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향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 영향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 곧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고 예수님의 사역을 가르치게 되면서 교회가 현실의 문제에 눈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5. 하늘의 신비와 땅의 현실 사이에서

저희는 예배를 마칠 때마다 주기도문을 드립니다. 주기도문을 드릴 때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를 드리는데요, 오늘의 말씀을 떠올리며 기도하셨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의 통치, 영향력은 이것이다!’라고 확신을 했는데 그 확신이 무너질 수 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던 2000년 전의 유대인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여러 확신들이 있었느데요, 분파마다 달랐어요. 본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구절을 오늘 설교에서 하나 더 넣으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져서 뻈습니다. 다음에 설교 달력을 수정해서 이어서 나눔을 할게요!

오늘 기억해야 할 것은, 신앙의 중심에는 하나님 나라가 있다! 그리고 처음 이 ‘하나님 나라’의 의미와 가치를 발굴했던 독일 목사님들이 사회운동을 하는 가운데 실수하고, 또 보완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려고 노력했듯이, 하나님의 통치, 영향력은 이것이다! 하고 단언하기보다는 겸손하고 신중하게 찾아가는 여행을 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어렵게 생각하면 밑도 끝도 없이 어렵겠지만, 예수님이 사랑을 기준으로 잡는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 대가 없이 우리에게 다가온 예수님, 그리고 사람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모두를 품으시고 살리시려는 신비한 사랑. 그 사랑의 활동이 이 세계를 어떻게 존재하게 했고, 또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기도이고 영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그 사랑이 이 땅에서 펼쳐지는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의 열정에 우리의 영혼을 던지는 것.

신앙은 우리의 영혼, 우리의 마음을 하늘에서 땅을 향하게 합니다. 하늘의 신비를 품고 이 땅을 보게 합니다. 절망밖에 없는 세계에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을 품고 사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와 차가운 현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신앙의 중심을 붙잡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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