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청년들은 왜 교회를 떠났을까?
[김동환] 청년들은 왜 교회를 떠났을까?
  • 김동환
  • 승인 2019.05.20 07: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동환 목사의 설교 - 사도행전 15:1~11
렘브란트, 스데반의 순교(1625)
렘브란트, 스데반의 순교(1625)

1. 청년들은 왜 교회를 떠났을까?

오늘은 5월 18일 청년 주일입니다! 나름 청년사역을 오래 했고, 또 저도 청년인지라 오늘 설교 준비가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요, 솔직히 고백하건대 오늘 설교 준비가 가장 어려웠어요. 일주일 동안 고민하고, 정했던 본문 바꾸고, 혼자 씨름하면서 살았습니다. 약간 수명이 줄어들었습니다. 미리 죄송한 말씀을 드리지만, 오늘 설교는 좀 길고 강의 같은 설교가 될 것 같아요. 저번에 교단에 관한 강의를 부탁받았는데요, 설교와 강의를 두 개 하면 저도 힘들고 여러분도 힘들 것 같아 하나로 합쳤습니다. 다음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고민을 하다가 설교와 강의를 합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바로 이 질문이었습니다.

“청년들은 왜 교회를 떠났을까?”

이 질문에 딱 막혔어요. 며칠 전 통계를 보니까 한국 장로회 교회에 청년 비율이 5%라고 하더라고요. 저희는 청년교회니까 덜 와 닿을 수 있겠는데요, 제가 서울에서 지내면서 여러 교회를 돌아보면 교회 내에 젊은 청년들의 비율이 너무 적어서 놀란적이 많아요. 아무리 대형교회라고 해도, 실제적으로 공동체 활동을 하는 친구들은 생각보다 적고요. 제일 아쉬운 건, 건강한 신학의 방향 아래 하나 돼서 모인 청년공동체를 찾아보고 있는데 많지 않아요, 저도 보고 배우고 싶어서 알아보고 있거든요. 어제 미리 이 질문을 여러분에게 드렸지요? 예배 후 각자의 생각을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서울에 와서 신학을 몇 년 공부하고 사역하며, 또 친구 목사님들과 만나면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바로는, 청년들의 젊은 마인드를 교회가 따라가지 못하는 게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교회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있는데, 제 생각에는 빨리 회개하고 돌아서면 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안 변하는 점들이 좀 있거든요.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의 스타일로 그대로 교회를 운영하려는 어른들의 마인드가 변하지 않으면 청년들은 계속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겠다는 걱정이 들어요. 저도 제가 잘한다고 생각한다거나, 우리 교회가 그런 새로운 교회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고요, 저희 교회가 앞으로 자라나 갈 방향을 정하기 전에, 이 문제를 말씀 가운데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는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2. 거룩한 공교회

먼저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절에서 11절까지를 함께 읽었는데요,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의 리더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장면입니다. 15장 앞부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제자들이 생겨나는 가운데, 유대교 지도자들의 핍박이 커졌습니다. 그 가운데 스데반이 죽게 되지요. 큰 핍박의 바람이 일자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전 지역으로 흩어져요. 흩어져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핍박이 오히려 선교의 열풍을 가져온 거예요.

그런데 스데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유대교 지도자 바울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바나바라는 사람과 함께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요. 유대인들은 배신한 바울을 죽이고자 쫓아다녔습니다. 또 유대인 중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도 바울을 좋게 보지 않았어요. 외국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도 와 닿지 않았고요, 자신들만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게다가 그들이 평생 지켜왔던 율법을 바울이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아 보였나 봅니다. “외국인도 예수님을 믿게 되면 당시의 성경말씀, 그러니까 구약의 말씀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 말로만 예수님 믿겠다고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 하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따졌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모여서 처음으로 전체 교회의 공식회의가 진행된 거예요.

긴 토론 끝에, 하나님의 사랑은 외국인들에게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려요. 그리고 그들이 유대인들의 율법인 할례를 할 필요는 없고, 다만 당시 이방 종교에서 했던 제사에 참석한다던지, 그 음식을 먹는 것, 음행의 문제 같은 것들을 따르지 않도록 하자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 회의를 통해서 바울은 더욱 외국인들의 선교사역에 힘을 쏟습니다. 본질이 아닌 문제를 내려놓고, 온 열정을 복음을 전하는데 쓰게 된 거예요. 복음은 교회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한 공동체를 만들어요. 그리고 그 제자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게 되어서 다양한 세상의 가치관과 복음이 만나게 될 때 교회는 거룩한 회의를 필요로 하게 되어요. 무엇에 타협할 수 없고, 무엇에 타협해도 될지를 의논하는 거예요. 세속적 가치로부터, 그리고 다른 종교와 이단으로부터 복음을 지켜내기 위해서 말이죠.

이런 거룩한 회의야말로 사도신경에서 우리고 고백하는 거룩한 공교회가 됩니다. 작은 개개의 교회만이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연합 자체도 교회가 되는 거예요. 교회 간의 연합은 그래서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교회 간의 연합이 오늘 읽은 말씀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인 인원이 크면 클수록 심각한 이익집단, 권력집단이 되어버립니다. 교회 인원과 물적 능력으로 교회 대표자의 권위가 달라지게 되고요, 복음의 목소리가 아닌 정치의 목소리를 내게 되겠지요? 저는 청년들이 한국교회를 떠난 이유 중의 하나를 ‘거룩한 공교회 정신’을 잃어버림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 때문에 모였다가 여러 사건으로 중심이 흔들릴 수 있지요.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서서 모임의 중심이 예수님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일이 많았던 것 같아요.

 

3. 개신교 교단은 왜 이렇게 많을까?

사도행전 15장 20절을 보면 할례를 시킬 필요는 없지만 우상에 바쳐진 음식과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는 멀리하도록 가르치자고 합의를 봅니다. 당시 이방 종교의 예전과 관련된 것들이라고 보시면 되어요. 다시 말해서, 당시 시대적, 사회적 맥락에서 ‘이것은 세상과 타협하면 안 된다!’ 하는 것들이었어요. 고백을 하나 하자면, 사실 신학교 M.Div를 하고, 신학석사를 하기까지 사실 우리나라 역사나, 교회사에 크게 관심이 없었어요. 좋아하는 신학자들도 독일 히틀러 시대 때의 천재 같은 신학자들이어서 그 당시의 사상들, 철학들, 교회의 분열 이런 것들을 주로 살펴봤는데요, 우리나라의 역사, 특히 현대사. 그리고 교회사에 관한 부분은 저도 최근에야 공부를 하고 있어요.

이 공의회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교단의 역사에 대해 좀 설명을 드리려 해요. 저도 장로회 통합 측 교단이지만, 사실 모교회 목사님이 이쪽 신학교를 가라고 해서 간 거지, 특별한 뜻이 있어서 이 교단을 선택한 건 아니에요. 아마 대다수의 성도들도 그럴 것 같고요. 제가 대학생 때, 새 학기가 시작되어서 동아리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앞에서 기독교 동아리 IVF를 소개하고 들어갔었어요. 그리고 다른 기독교 동아리 대표가 나와서 소개를 했는데, 기독교 동아리가 여러 개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서로 묻더라고요, 아니 교회 동아리는 왜 이렇게 종류가 많아야 되는 거야? 하고 말이죠. 교단도 똑같죠, 교단이 너무 많아서, 솔직히 저도 다 모르겠어요. 오늘은 장로회 교단 중심으로 설명을 할 텐데요, 장로회 교단 안에서도 나눠진 교단이 엄청 많아서 저도 다 파악이 안 될 정도예요.

1) 1952 고신 - 친일 회개 문제 : 첫 번째 큰 분열은 신사 참배 문제와 관련이 있어요. 일제 시대 때 종교탄압이 들어서면서 교회는 신사 참배를 강요당해요. 1938년 9월에 장로회가 공식적으로 신사 참배를 지지하게 되어요. 소수의 사람들은 끝까지 거절을 해서 고문을 당하기도 했죠. 타협을 하는 사람들은 종교적인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의식이니까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 신사 참배 이후로 교회는 일본에 더 적극적인 친일 행동을 했어요. 나중에 해방이 되고 나서 문제가 터진 거예요. 대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신사 참배를 했고, 당시 끝까지 버티고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갔던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소수잖아요? 그래서 교회의 회의 가운데 분란이 생긴 거예요. 교회가 정확히 회개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주도권 싸움을 했던 거죠.

신사 참배를 거부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좀 더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신학교(고려)를 새로 새웠는데 인정을 받지 못하자 교단을 새로 만들었고, 오늘의 고신 교단이에요. 지방에서 오신 분들 중에 아마 주일에 돈을 쓰면 안 되고, 시험을 보면 안 되도록 배워왔던 분들 있을 텐데, 고신교회에 그런 교회가 많아요. 저희 찬양인도자님 이제는 영어에서 자유로워졌지만, 자주 토익시험 보러 주일에 다녀왔잖아요? 그러면 이제 변절이 되는 거죠. 교대 다닐 때 제 친구는 임용고시를 안 봤어요… 신사 참배에 대한 트라우마가 교단 성격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물론 주일에 음식점, 편의점 안 가는 건 조금 과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주요 교단의 교회가 친일문제를 정확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건 너무 아쉬운 일이죠.

2) 1954 기(독교)장(로회) - 신학 : 그리고 2년 후에 또 장로회의 분열이 생겨나요. 이번엔 신학 문제인데요. 구한 말부터 선교사들이 북쪽에서 많이 오다 보니 북쪽의 개신교 비중이 높았어요. 서북쪽은 미국 장로회 선교사들이, 동북쪽은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들이 주로 선교를 했는데요, 서북쪽의 선교사들의 신학이 좀 더 보수적이었어요. 그래서 서북쪽 장로회의 영향을 받은 장로회신학교와 동북쪽 장로회의 영향을 받은 조선신학교의 갈등이 생겼어요. 당시에 주류였던 장로회신학교 측이 조선신학교의 신학이 너무 진보적이다 하여 인정을 하지 않아 조선신학교 쪽을 지지하는 600여 개의 교회가 나와버렸어요. 기독교장로회라는 이름이라 ‘기장’이라고 부르는데요, 이것도 너무 아쉬운 일이죠. 70년 전의 장로회의 신학이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문자 주의적인 신앙만이 진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편협함이 있어서 이런 일이 생겼다고 봐요.

3) 1959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합동 - WCC : 남아있던 장로회도 이 신학의 문제 또 한 번 크게 분열을 합니다. 장로회 통합과 장로회 합동으로요. 좀 복잡하죠? 제 소속은 장로회 통합입니다. 가장 큰 안건은 WCC 가입인데요, WCC는 World Council Churches의 약자예요. 세계 교회 협의회라는 뜻입니다.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의 모든 교회들이 모여서 함께 서로를 알아가고 함께 일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가는 협의기구입니다. 이 WCC 가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합동이고 찬성하는 쪽이 통합에요. 세계교회협의 기구에 가입하는 게 교단이 갈라질만한 일인가? 하면… 사실 와 닿진 않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WCC에 가입하지 않은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많지 않고요, 신학적 이유로 가입하지 않는 다면, 가장 보수, 극우에 가까운 교회라고 보면 되어요. '가톨릭, 정교회 모두 교회 아니다, 이단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교단들이 그렇습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정말 극소수인데, 우리나라에는 좀 많아요.

이제 교단이 갈릴만한 일이 된 게, 미국에서는 국제 기독교 협의(ICCC)라는 극우 개신교가 있었어요. 문자 주의와 반공사상이 중심인 단체인데, 너무 극우 경향이 강해서 나온 그룹이 복음주의 협의회(NAE)에요. 빌리 그레이험 목사가 NAE 쪽이고요. 우리나라에는 NAE선교사님 영향을 받았지만 생각은 ICCC 쪽인 목사님들이 많아요. 그래서 WCC를 공산주의를 따르는 단체라고 공격하는 운동이 일어났거든요. 광화문 같은데 가보면 요한계시록 구절로 WCC 공격하는 사람들 보일 거예요.

그런데 이게 교회사가 아닌 현대사를 공부하다 보니 이해가 되었어요. 뭐냐면, 1950년에 6.25 전쟁이 터지잖아요? 그전까지는 장로회가 이승만 전 대통령과 아주 깊은 관계를 맺었어요. 그런데 6.25 때 갈등이 생기게 되거든요. 중국의 개입으로 전쟁이 빨리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죽어가는 미군이 많아지자, 미국 교회, WCC 쪽에서 휴전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어요. 전쟁의 방법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평화의 방법을 찾자는 거였고, 그게 미국 여론을 움직였어요. 그런데 이승만 전 대통령은 끝까지 전쟁을 해서 통일을 하고 싶었어요. WCC와 연결되어있던 장로회에 배신감을 느끼고, 고신파 쪽 교회와 연대를 해요. 그러면서 WCC와 장로회를 용공(공산주의 편이다)이라고 공격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고신파 쪽 교회는 WCC를 공산주의를 따르는 곳이라고 공격을 하고 있어요.

WCC에 대한 공격이 오늘날까지 효력이 있는 게, WCC 10차 총회 회의가 2013년에 부산에서 열렸어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였는데요, 전국적으로 통합 교단에 큰 폭풍이 났었어요, WCC를 이단처럼 생각하는 통합 교단의 성도들이 의외로 많았고, 이 여파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제가 사역하던 교회에서도 성도들이 많이 물어봤었요. 그만큼 교단에 대한 이해, 세계교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현실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봐요.

3. 개신교가 회개해야 할 것

감리고, 성결교, 침례교는 생략 할게요. 시간상도 그렇고, 합동 교단만 해도 한 100개로 또 쪼개졌으니, 너무 숫자가 많거든요. 설명을 들으시면 아시겠지만, 정말 쪼개질만한 이유로 쪼개진 게 별로 없어요. 그게 한국교회 저희 모두가 회개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정확히는 교회의 리더십이 회개해야 할 일이죠. 좀 전에 이승만 전 대통령과 장로회를 이야기할 때, 장로회 대표로 활동했던 분이 한경직 목사님이세요. 장로회의 상징과 같은 분이시죠. 참고로 장로회신학교 예배당 이름이 한경직 기념예배당이에요. 사실, 예배당 이름에 목사의 이름을 넣는 게 좋아 보이진 않아요. 어느 분에게나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마 영락교회에서 후원해서 지어진 예배당이라 그런 것 같은데, 그냥 신학적 의미를 담은 이름을 지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해요.

한경직 목사님은 북한에서 월남하신 목사님이시고, 아까 이야기한 서북지역 장로회의 대표자예요. 구한말 전체 개신교의 40퍼센트가 서북지역에 있었다고 하니 개신교의 핵심이었다고 봐도 될 것 같아요. 구한말의 서북지역은 상공업이 발달해서 우리나라의 어떤 지역보다 부가 쌓였던 곳이래요. 그리고 선교사들이 일찍 들어오면서 신식 교육이 앞섰어요. 대신 신분제 사회의 한계 때문에 정치권에는 가지 못했는데, 그러다 보니 유럽의 중산층이 자본주의 사상으로 신분제와 싸웠던 것처럼 근대적 정치사상을 먼저 갖게 되었어요. 구한말의 사회-경제적 상황이 너무 안 좋다 보니 동학운동이 일어났었잖아요? 몇 주전에 3.1 운동의 핵심 주도세력이 사실은 동학운동을 뿌리로 한 천도교였다고 했었는데 기억나시나요? 이 동학운동을 고종황제가 외국 세력의 도움을 받아서 저지해요. 그러면서 사람들은 현실의 한계 속에서 새로운 정치사상을 꿈꿨는데,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이 그런 생각에 앞서 나갔어요. 일제시대 때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이 쪽 출신이었고요.

참고로 저희가 예배드리는 곳이 함석헌연구소인데, 함석헌 선생님도 이쪽 출신이세요, 오산학교 출신이더라고요. 3.1 운동 후에 임시정부가 공화정을 공표하잖아요? 황제의 나라가 아닌 공화제를 바로 발표했던 건 이미 그 고민이 누적돼 온 이유가 있었어요. 문제는 광복 후예요. 우리나라가 분단된 채로 각자 정부를 수립하면서 북쪽이 소련-공산주의 영향을 받게 되잖아요? 당시 자주-독립의 기치를 내걸었던 서북의 개신교인들은 소련 입장에서 적으로 보였어요. 그래서 토지개혁정책으로 서북 개신교인들의 재산을 몰수했어요. 서북 개신교인들은 깊은 상처를 입고 남으로 내려오는데 이게 반공의 뿌리가 되어요. 피해자이니까요. 월남한 개신교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경직 목사님이 하셨고, 그래서 영락교회가 시작되어요.

북한-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피해의식이 투철한 반공의식을 가져오는데, 이게 종교적 열심과 합쳐지게 되어요. 그래서 공산당, 공산국가,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사탄으로 가르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요, 그 급진적 효과가 4.3 사건, 여순사건 등등에서 나타나요. 영락교회 청년 중심으로 모인 서북청년단이 4.3 때 제주도민을 토벌하는데 앞장섰거든요.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이지만, 영락교회가 공식적인 사과문을 아직도 발표하지 않는 게 유감스러운 일이에요. 앞서 이야기한 WCC 문제로 첫 정권과 서북 개신교가 갈등이 생겼잖아요? 그런데 박정희 군부정권이 들어설 때 다시 정권의 중심에 들어서게 되어요. 반공사상과 기독교 신앙을 거의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게 되니까, 이승만 정권을 경찰국가라고, 너무 과격하다던 비판도 잊고 박정희 정권을 도와요. 미국이 군사쿠데타를 좋게 보지 않는 분위기였는데,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장로교목회자들이 미국에 가서 순회공연을 하면서 설득시키거든요.

NCCK(한국기독교협의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개신교 교회 협의기구인데요, 박정희 정권이 들어설 때 공식적으로 환영 입장을 말해요. 장로회가 중심이었거든요.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헌법을 고쳐가면서 재선을 하려는 삼선개헌을 시도하자, 그때는 이건 안된다는 반대 입장을 발표해요. 그 당시 교회 안에 너무 친독재정권으로 개신교가 움직였다는 데에 대한 자성 운동이 있었거든요. 함석헌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부터 반대하셨고요. NCCK(교회협)가 입장이 바뀌자 장로교 합동 교단이 중심이 돼서 대한 기독교연합회가 만들어져요. 조용기 목사나 CCC를 만든 김준곤 목사 같은 분들이 중심이었고요, 이분들은 끝까지 박정희 정권을 응원하면서 NCCK에게 정치에 나서지 말라고 하면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강조해요. 그러니까 자신들은 정치참여를 하면서 반대 입장을 내는 사람들에게는 교회가 나서면 안 된다는 이상한 논리가 되어버린 거죠? NCCK는 1988년에 이런 성명서를 내요. “남한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신념처럼 우상화였다” 이런 회개의 성명서를 내는데, 이에 반발해서 89년에 은퇴한 한경직 목사가 영락교회 수련관으로 사람들을 모아요. 그래서 만들어진 게 한국기독교 총 연합회(한기총)이랍니다. 한기총이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는 아마 들어보셨을 거예요! '누구 안 찍으면 천국 못 간다’, 이렇게 설교하는 목사님들 있는 곳이죠.

1980년 조찬기도회
1980년 8월 6일 조찬기도회

주류 개신교는 군부독재정권 때 항상 정부의 편을 들었던 잘못을 회개해야 합니다. 종교적 양심을 가지고 잘한 건 잘했다고, 못한 건 못했다고 해야 하는데, 중립적 위치에서 비판자의 자세를 갖지는 못했죠. 개신교가 급작스럽게 규모가 커진 건 박정희 정권 때였어요. 경제개발 정책과 함께 좋은 신앙을 가지면 복을 받는다는 종교적 입장이 잘 어울려서 개신교 규모가 커질 수 있었습니다. 대형교회들의 부흥이 이때 일어났고요, 가톨릭은 이런 정책방향이나 종교적 방향을 처음부터 비판했었어요. 유물론적 사고에 빠지면 안 된다고 말이죠. 물론 가난의 무서움을 저도 알고 있고, 또 우리 나까 해방 전후로 미국 교회, 정부의 원조를 엄청나게 받은 건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받은 도움을 가지고 건강한 신앙공동체로 확장시키지 못한 건, 오늘날 대형교회들이 축적된 부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보면 알 것 같아요. 수백억의 부동산 자산들을 이상하게 사용하니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볼 때는 부패한 집단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 거죠.

어제가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이었죠? 며칠 사이 나오는 뉴스들을 보면 정말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광주를 직접 다녀 갔다 건가, 사살명령을 내렸다거나, 헬기 사격을 했다거나, 군인들을 사복을 입혀서 시위대 속에 집어넣다거나, 신무기를 실험했다거나… 더 진실이 밝혀져야겠는데요, 1980년에 5.18일 일어난 후 그 해 8월에 전두환 씨를 위해 교계 지도자들이 모여 기도회를 했어요. 여호수아처럼 치켜세우고 기도할 때, 한경직 목사님도 있었는데요, 교회가 이런 사회적 상황에서 했던 행동과 기도들이 중립적이지도 않고, 문제가 많았던 거예요. 그리고 그 해에 여의도에서 빌리 그레함 목사의 부흥집회가 있었는데요, 그분이 오실 때는 거의 100만의 성도들이 모였죠. 유신체제에서 함석헌 선생님 같은 분들이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요, 외국에서 한국이 종교탄압을 많이 한다는 여론이 있었는데, 정부가 이런 부흥집회를 허락하고 지원하면서 그런 여론을 잠재우려 했다고 해요.

 

4. 뒤를 보고, 앞을 보며, 한 걸음씩.

한국교회사 100년을 왔다 갔다 했네요! 전체적인 흐름을 알려드리고자 조금 무리를 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보이는 문제점들이 갑자기 생긴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인 뿌리가 있다는 걸 기억해야겠습니다. 왜 우리나라의 깨어있는 청년들이 교회를 떠났는지, 언제부터 떠났는지를 추적하려면 이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어요. 너무 한쪽의 이야기만 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는데요, 한국교회사 안에서 교회가 해온 많은 섬김들이 있어요. 사회적 공헌도 많이 있고요. 저도 그런 분들의 수고 가운데 회심하고 신앙을 얻은 사람이니까요. 교회의 공의회적 본질을 잃어버린 역사를 말하려다 보니 어두운 이야기가 많았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요, 이런 부분들에 대한 이해와 반성 위에 우리들의 이야기를 써나갔으면 좋겠어요.

한국교회가 청년들을 잃얼 버린 이유. 이렇게 돼버린 이유? 저는 나쁜 정치를 하는 교회 리더들. 그리고 침묵하는 목사들. 거기에 아무 생각 없는 성도들의 합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시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교회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반대의 것을 해야겠죠. 성경을 보고 고민하고, 교회의 신앙을 보고 고민하고, 과거의 잘못을 되돌아보고, 현재의 상황 속에 복음을 증언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나쁜 정치를 하지 않고, 침묵하지 않는 것. 한꺼번에 하면 체하니까,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하나씩 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 속에 나온 교회 간의 회의 모습.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무엇은 타협할 수 있고, 무엇은 타협할 수 없을지에 대한 진지한 토론. 때로는 잘못을 시인하고, 교회를 위해 새롭게 헌신하는 모습. 이런 모습을 먼저 우리 안에서 복원시킵시다. 어떻게 보면, 세상 속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전도자라는 의미에서는 오늘 말씀 속의 바울이나, 바나바, 야고보와 같은 리더들과 같은 전도자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올 수 있는 교회, 뜻이 있는 젊은 이들이 편하게 모일 수 있고, 또 힘을 얻고, 위로받을 수 있는 교회, 그런 교회가 많아지기를 기도합시다. 저희도 부족하지만 조금씩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