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만희]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다
[박만희]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다
  • 박만희
  • 승인 2019.05.20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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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희 전도사의 설교 - 요한복음 10장 22-30절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우리 모든 삶에 가득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가끔 성경 속 빽빽한 글자 사이에서 읽을 때는 별 감흥이 없다가도, 성경 밖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날 때는 묘한 감동을 주거나, 기대치 않은 위로를 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제게는 한 소설에서 만났던 로마서의 한 구절, ‘사랑받지 못하던 자를 사랑하는 자라 부르리라’는 말씀이 그렇고, 운동 중 팟캐스트에서 우연히 들었던 ‘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라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문장이 그렇습니다. 왜 그런지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주제를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이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Mary Flannery O'Connor, The Lame Shall Enter First

다만 앞서 언급한 두 문장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내용 모두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배어 있다는 점입니다. 전 영어를 잘 모르지만 shall이 들어가면 그런 어감을 준다고 하더군요. 참고로 앞에서 말씀드린 ‘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 역시 한 단편 소설의 제목인데요. 원제가 『The Lame Shall Enter First』라고 합니다. 플래너리 오코너(Mary Flannery O'Connor, 1925~1964)가 지은 것입니다. 성서에는 비슷한 어감을 담은 구절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라는 요한계시록 말씀이 그렇고,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로마서 말씀도 그렇습니다. 이런 구절들은 훗날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라기보다는, 지금 믿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며, 그리스도인의 고백일 겁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도 비슷한 어감을 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익숙하면서도 유명한 본문에 속해서 잘 드러나지 않던 구절인데요. 오늘은 이미 친숙한 본문을 조금 낯설게 읽어보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앞서 언급한 두 내용이 제게 새롭게 다가온 까닭은, 익숙한 내용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낯선 방식으로 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에 앞서 누군가가 성서를 낯설게 읽고 새롭게 말한 덕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설교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믿고 사랑하되, 늘 같은 방식으로가 아니라, 정성스레 낯설게 읽고 새롭게 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부활절 이후 3주 동안, 빈 무덤과 제자들에 관한 내용을 읽어오다가 오늘은 요한복음의 한복판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조금 느닷없지만 본문은 다시 성전 한 가운데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왜 그런지는 궁금하시겠지만, 그 문제는 뒤로 미루어 놓고 본문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성전 안에서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오고 간 질문과 대답을 다룹니다. 성전 안을 거닐던 예수님에게 유대인들이 묻습니다. 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4 그 때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분명하게 말해 달라.’ 이것이 유대인들의 요청입니다. 24절만 놓고 보면 속 꽤나 끓였던 것 같습니다. 나름 긴 시간 예수님을 관찰해왔고, 따라도 다녀봤는데 분명하게 말을 안 하는 겁니다. 자신이 메시아면 메시아라고 정확하게 말하면 될 텐데, 거기에 관해서는 입을 닫아 버리는 겁니다. 가르치는 말과 행동을 보고 있자면,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 언저리쯤에 있는 듯도 한데, 그 주변을 맴돌 뿐 자신이 바로 메시아라고 공언하지를 않는 겁니다. 분위기를 보니, 예수가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놓고 이미 자기들끼리 언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본문 바로 앞 장인 9장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놓고 옥신각신, 우왕좌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친 사건 때문에 일어난 상황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눈 먼 사람을 고친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큰 파장을 가져왔고,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자신들끼리 논쟁을 하는 것은 물론, 눈 뜬 사람의 부모를 찾아가 겁박하듯 묻기도 하고, 눈을 떠 보게 된 사람을 직접 찾아가 추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답은커녕 망신을 당하죠. 결국 그들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직접 묻기로 한 겁니다. 늘 하던 대로 쉽게 생각하면, 유대인들이 하는 짓이 답답하기도 합니다. 메시아를 눈앞에 두고도 모르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이 안타깝고 한심할 뿐입니다. 라고 흔히들 본문을 설명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너무 게으른 읽기 같습니다. 정답을 미리 훔쳐본 사람이, 문제를 틀린 사람에게 ‘넌 그것도 모르냐’고 타박하는 경우와 다르지 않으니까요. 정답을 미리 안다고 해서 문제를 제대로 이해한 건 아닌데 말이죠. 많은 경우 우리는 답을 미리 정해두고 성경을 읽습니다만, 좋은 읽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도 좀 답답합니다. 그냥 ‘너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나다’라고 한 마디만 해주시면 될 텐데, 그걸 왜 안 해주실까요. 듣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들에게, 듣고 싶은 말 해주면 좋은 거 아닌가요. 은혜로우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면 될 텐데 말이죠. 솔직하게 말해, 우리들 역시 분명하고 정확한 거 좋아하는 사람들 아닌가요. 예수님이 누군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게 뭔지, 한 문장 한 단어로 정리하는 게 우리가 잘하는 일 아니었나요. 예수 여기 있고, 여기 있는 예수 믿으면 된다고, 껌 씹듯이 확언하는 게 우리가 해온 일 아닌가요. 기독교인들처럼 분명한 거 좋아하는 이들이 또 있을까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경전을 기준으로 선을 긋는 게 우리 특기 아닌가요. ‘예면 예, 아니요 면 아니요’라고 분명하게 답하라는 독기서린 압박이 이곳저곳에 넘쳐나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분명하게 정하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입니다. 자신들의 입장을 정하기 위해 분명하게 말해달라는 유대인의 요청과, 기독교가 쉬이 드러내는 확신이 어떻게 다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짜증 섞인 그들의 요구에 예수님은 어떻게 답하실까요.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

곱게 대답해 주실 리가 없죠. 늘 그렇듯 예수님은 질문에 걸맞은 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도리어 ‘몇 번이나 말해야 하느냐고, 얼마나 더 보여주어야’ 하느냐고 그들을 책망합니다. 예수님은 질문에 답하기를 거절합니다. 왜 답해주지 않으실까요. 메시아 맞잖습니까.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왜 말을 안 해주실까요. 여러 이야기가 가능하겠습니다만, 한 가지만 말해보자면 그들이 입에 담은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말로 내뱉지 않은 그리스도가 같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의 예상과 기대가 그리스도를 포섭할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이 내린 정의가 그리스도를 붙잡아 둘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스도는 결코 분명히 하려는 자들에게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말로 그를 정의하려고 하면 그는 언제나 미끄러져 나갈 것이고, 빠져나간 그곳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올 겁니다. 그 곳이 어디라도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건 말이 아니라, 그 분이 하신 일이니 말입니다. 뜨끔한 말씀입니다만 우리도 함께 고민해야 할 내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내용만으로도 생각할 내용이 많지만, 오늘은 지나가겠습니다.

유대인들을 향한 은근한 책망과 거절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은 한 발 더 나아갑니다. 26절부터 28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26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단순히 거절하실 뿐만 아니라, 선을 확 긋습니다. ‘자꾸 물으면서도 믿지 않는 까닭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차갑다 못해 얼음장 같은 말씀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믿을 사람과 믿지 않을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기라도 하다는 걸까요. 이어지는 말씀은 더 알쏭달쏭 합니다. 28절부터 30절까지를 읽어보겠습니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도 더 크시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설교를 준비하려고 혼자 본문을 읽었을 때 28절부터 30절까지를 저는 좀 느닷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는 ‘왜 너희는 나를 못 알아보니. 왜 나를 안 믿니.’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28절부터는 갑자기 ‘빼앗기지 않겠다.’는 내용이 나오니까요. 그래도 28절은 양에 관한 이야기니까 연결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만, 29절과 30절은 그야말로 생뚱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30절은 왠지 중요할 것 같은 익숙한 한 마디이지만, 맥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싶었습니다. ‘어쩌라는 거지.’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본문을 이해하려면 한 가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가진 네 권의 복음서 중 요한복음은 가장 늦게 쓰인 책입니다. 학자들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만, 주후 70년대에 기록됐다는 의견부터, 90년대에 쓰였다는 주장, 혹은 100년 이후라는 주장까지 다양하죠. 어느 의견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가장 늦게 쓰인 책이라는 사실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이런 사실은 생각할 거리를 안겨줍니다. 이미 복음서가 세 권이나 있는데도 굳이 다른 기록을 또 남겼다는 뜻이니까요. 누가 기록했는지, 왜 남겼는지, 어떤 이들을 위해 쓴 것인지 등을 묻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물어 봅시다. 오늘은 다른 질문들을 제쳐두고 어떤 이들을 위해 썼는지를 물어보려고 합니다. 다소 뭉뚱그려 말하자면, 아마도 요한 공동체를 위해 썼을 겁니다. 당시 주류 유대교가 아니었던 공동체 말입니다. 때로는 이단 소리를 듣기도 하고, 다수로부터 압박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던 소수 공동체 말입니다. 사회의 일부이면서도 멀쩡한 집단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초기 교회를 위해 요한복음은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내 양이다.’, ‘나는 그들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단호한 목소리를 담아서 말이죠. 다수가 자신들을 밀어내려고 해도, 예수가 자신들을 껴안는다고 믿는 겁니다.

어쩌면 그리스도교 교회가 유대교와 점차 분리되는 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을 겁니다. 유대교 입장에서는 야훼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는 이상한 소수집단이 그리스도파였을 테고, 자연스럽게 갖은 핍박이 뒤따랐을지도 모릅니다. 비난과 멸시와 혐오, 그리고 박해가 그들을 따라다녔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오늘 말씀을 함께 읽는 겁니다. ‘그들은 내 양이다.’ ‘나는 그들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 말입니다. ‘그들은 내 양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을 따라, 그들 역시 하나님을 빼앗기지 않고 모임 중에 말씀을 함께 봉독하는 겁니다. 그는 우리를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만유보다, 즉 모든 있음보다 더 크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결코 빼앗기지 않으리라’고 그들은 믿고 고백했던 겁니다.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하리라’는 고백은 28절과 29절에 반복됩니다. 아주 애달픈 반복이 아니었을까요. ‘너희는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도 너희를 버렸어’라는 비난과 조롱이 익숙해진 이들에게, 박해가 자신들을 위협하는 이들에게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하리라’ 애달픈 예수의 선언은, 얼마나 마음 깊이 그들을 위로 했을까요. 얼마나 가슴 깊게 저미는 그들의 신앙 고백이었을까요.

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문학동네, 2014년

빼앗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합니다. 최근에 제가 설교에서 자주 언급하는 책이 있는데, 『빌러비드』라는 소설입니다. 흑인들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역사를 다룬 책입니다. 제가 너무 좋아하는 책인데요. 그 소설에는 아이를 낳아도 사랑할 수 없는 엄마의 이야기가, 태어나도 엄마를 가질 수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늘 빼앗기고, 늘 팔려가니까요. 엄마는 노동력을 낳는 값비싼 공장이고, 태어난 아이는 노동력에 불과하니까요. 사랑 받아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사랑해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설은 도망한 노예인 한 여인이, 자신을 잡으러 온 백인들에게 아이를 빼앗길 까봐 아이를 죽이는 비극적 실화를 다룹니다. 어떻게 보면 그 소설은 빼앗긴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랑받고 사랑 할 권리마저도 빼앗긴 사람들의 이야기이죠. 그런데 그 책의 가장 앞 장에 있는 발문은, 설교 서두에 제가 인용한 로마서 말씀을 인용합니다. “사랑받지 못하던 자를, 사랑하는 자라 부르리라” 라는 짧은 구절 말입니다. 놀라운 발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경 구절이라서가 아니라, 그 구절을 누가 인용했는지를, 어떤 이야기와 그 구절을 연결시켰는지를, 소설을 다 읽었을 때 다시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자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이죠.

그렇게 말씀은 인생을 살아가는 특정한 삶에 살아서 개입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그 말씀은 약속이자, 우리의 믿음이고 또 간절한 씨름입니다. 우리는 계속 간절할 것이고, 믿을 것이며, 고백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느닷없는 30절을 새롭게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생뚱맞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는 말씀은 보통 삼위일체 교리를 위해 사용되는 본문입니다. “이거 봐. 성경이 직접 예수와 하나님이 하나라고 말하고 있잖아”라는 방식으로 소환되는 삼위일체 증거 구절 중 하나죠. 오늘은 이렇게 읽어보면 어떨까요. ‘하나님에게서 양들을 빼앗지 못하듯, 내게서도 빼앗을 수 없다.’라는 뜻으로 읽는 겁니다. ‘나도 그와 마찬가지다. 나도 하나님과 같이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구절을, 좀 어려운 말로는 존재론적으로 읽지 않고, 나도 그럴 것이다. 라는 뜻으로 읽어보는 겁니다. ‘아버지에게서 양들을 빼앗을 수 없듯, 내게서도 결코 빼앗을 수 없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를 빼앗기지 않을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결코 우리를 빼앗기지 않을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따라, 우리도 결코 빼앗기지 않을 씨름을 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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