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가운데 믿음을 가지고 집으로
상실 가운데 믿음을 가지고 집으로
  • 김영웅
  • 승인 2019.05.12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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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 얀 마텔, 포르투갈의 높은 산, 작가정신, 2017년
얀 마텔, 포르투갈의 높은 산, 작가정신, 2017년
얀 마텔, 포르투갈의 높은 산, 작가정신, 2017년

단 일주일 만에 토마스는 어린 아들과 아내, 아버지를 차례대로 잃는다. 이후 그는 세상을 등지고 신을 등지고 뒤로 걷기 시작한다.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반발하기 위해서다.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긴 마당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반발밖에 없었다. 박물관에서 보조로 일하는 토마스는 어느 날 박물관에 기증된 유물들의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성공회 기록 보관소로 파견된다. 거기서 그는 리스트에서 누락된 얇은 책을 발견한다. ‘율리시스’라는 신부가 쓴 일기였다. 그는 그 일기장에 곧 빠져들었고, 율리시스 신부가 포르투갈의 식민지 섬, '상투메'에 머물 당시 쓴 글에 매료된다. “이곳이 집이다. 이곳이 집이다.” 이 짧은 문장은 여러 페이지에 걸쳐 빼곡히 적혀 있었다. 다른 페이지에서는 독특한 스케치도 발견한다. 어떤 얼굴을 그린 것 같았는데, 몇 분만에 그는 그 눈에 깃든 슬픔에 빠져든다. 토마스 역시 커다란 상실감에 젖어있었기 때문일까. 어떤 공감대를 느껴서일까. 그는 그 일기를 몰래 숨겨서 가지고 나온다.

아내가 죽을 당시 손에 꼬옥 들고 있었던 것은 십자고상이었다. 토마스는 그것을 빼내려고 했지만, 사지가 경직된 이후였기에 그럴 수 없었다. 상실로 인해 신앙적으로 표류하고 있던 그는 분노가 일었다. 십자고상을 노려보며 다음과 같이 내뱉었다. “당신! 당신 말이야! 내가 당신을 상대해주지. 두고 보라고!” 그렇다. 그는 신에게 반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토마스는 율리시스 신부의 일기에서 신부가 만든 어떤 종교적 조각품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것의 흔적을 좇는다. 그 조각품은 스케치에서 본 눈을 가진 십자고상이 분명했고, 노예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사제였던 율리시스 신부가 노예들이 당하는 인권유린의 현장 속에서 인간의 잔학함과 악함을 보고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각품이었다. 기독교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한 십자고상이었다. 그 조각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위치한 어느 교회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토마스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그것을 찾아서 신이 자신에게 한 짓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숙부의 도움으로 자동차를 이용해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자동차가 희귀했던 시절, 토마스는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자동차를 몰며 별의별 고생을 다한 끝에 (죽을 위기도 넘긴다. 이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부분에는 코믹한 부분도 나오고 깊은 생각을 요구하는 부분도 나온다), 겨우겨우 목적지에 다다른다. 불행히도 예상했던 교회에서는 그가 찾던 십자고상을 볼 수 없었다. 낙담하던 찰나, 차를 운전하던 중 그는 어린 남자아이가 차 앞에 장난 삼아 매달려있는 줄도 모르고 출발하다가 그만 아이를 치고야 만다. 아이는 죽었다. 토마스는 뺑소니를 친다. 그는 아이를 죽였다는 이유 때문인지, 뺑소니를 쳐서 양심에 가책을 느꼈기 때문인지, 몸의 상태가 지극히 나빠진다. 구토가 쉴새 없이 나오려 한다. 어느 작은 교회를 우연찮게 들르게 되는데, 그곳에서 토마스는 그렇게 찾길 원했던 십자고상을 발견한다.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신의 아들은 사람이 아닌 침팬지였던 것이다!

작가는 1부를 이루는 토마스의 이야기를 여기에서 끝을 맺고 2부를 시작한다. 독립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지만, 1부를 읽었다면 공통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부에서 토마스가 죽인 아이의 엄마, 마리아가 최근에 죽은 남편의 시신을 들고 병리학자 에우제비우를 찾아와 부검을 요청하고, 실제로 부검이 진행되는 장면이 2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부검 결과, 놀랍게도 죽은 남편의 배 안에서는 한 마리의 침팬지와 죽은 아들이 들어있었다. 마리아는 그제서야 말한다.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그리고 그녀는 옷을 다 벗고 그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부탁해요.” 에우제비우는 그녀의 마지막 말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알아듣고 실과 바늘로, 부검이 끝나면 늘 그랬듯, 메스로 가른 시신의 모든 부분을 능숙하게 봉합한다.

에우제비우 역시 최근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그녀의 이름 역시 마리아였다. 사실, 죽은 아이의 엄마 마리아가 찾아오기 직전에 아내 마리아의 환영이 다녀갔었다. 늦은 밤 홀로 작업에 여전히 몰두해있는 그를 찾아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과 복음서의 비교를 통한 놀랄만한 해석을 늘어놓고 자리를 떠난 직후였다. 아내와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었을까. 어떤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에우제비우는 갑작스럽고 괴기스러운 부검 의뢰를 받고 계획에도 없던 일을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두 마리아 모두 환영이었을까? 어떻게 죽은 사람 몸 안에 침팬지와 아이가 들어있을 수 있으며, 어떻게 살아있는 여자가 그 안으로 들어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에우제비우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을까? 이런 온갖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같은 궁금증이 최고점에 오를 무렵, 작가는 슬그머니 2부를 끝내고 3부로 넘어간다. 3부 역시 연결점을 가진다. 3부의 주인공은 얼마 전 아내와 사별하고 캐나다에서 상원의원으로 일하는 피터라는 포르투갈인 1.5세 남자와 ‘오도’라는 이름을 가진 침팬지이다. 아내를 잃은 상실감 때문인지, 피터는 상원의원직이 그저 직분일 뿐이다. 어느 날 오클라호마로 출장을 갔을 때 우연찮게 만나게 된 한 마리의 침팬지를 구입하게 되고, 그는 안락한 모든 삶을 정리하고 오도와 함께 그가 태어난 고향인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좌충우돌하며 도착한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그는 오도와 함께 살 집을 하나 구하게 되는데, 그 집은 마침 2부에서 등장했던 마리아의 집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피터가 마리아의 남편 카스트로의 손주였던 것이다. 캐나다에서 걸려온 아들의 전화에서 그는 말한다. “이곳이 집이야. 이곳이 집이야.”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피터는 정말로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침팬지와 함께. 그리고 어느 날 오도와 함께 산책을 나갔을 때, 그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 전경이 다 보이는 높은 바위 위에서 오도와 함께 전설의 이베리아 코뿔소를 목격하고 조용히 최후를 맞이한다.

세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 죽은 아이와 그 집안, 그리고 침팬지와 침팬지의 십자고상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공통점 두 가지가 더 있으니, 그것은 바로 ‘상실’과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1부의 토마스도, 2부의 마리아도, 3부의 피터도 한결같이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그들 모두 상실로 인한 빈자리를 메우려는 듯, 어떤 믿음에 의지하여 무언가를 찾아 나섰다. 그것을 작가는 이 작품에서 ‘집’이라고 표현한 게 아닐까 한다. 세 가지 이야기의 제목에서 ‘집’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은 (1부: 집을 잃다. 2부: 집으로. 3부: 집) 이를 뒷받침하며, 작가가 이 책을 통하여 말하고 싶었던 것이 ‘집’이라는 단어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믿음’을 통한 구원과도 같은, 어떤 바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모두 상실로 인해 생겨난 빈 공간을 각자의 독특하고 다른 모양의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다다름으로써 메워가는 여정으로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상실은 여러 모양으로 발현되는 법이다. 토마스에게서는 신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으로, 마리아에게서는 죽은 아들과 남편과의 재회를 바라는 마음으로, 피터에게서는 아내의 부재에도 여전히 쫓기는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픈 마음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발현은 모두 일차적으로는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보인다. 토마스는 결국 십자고상을 찾아내고야 말았고, 마리아는 원하던 재회를 맞이했으며, 피터는 오도와의 단순하고 원시적인 삶 속에서 평화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 상실감이 과연 메워졌을지는 끝까지 의문으로 남는다. 피터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어린아이를 죽임으로써 타자에게 큰 상실을 안겨준 결과를 낳았고, 마리아는 결국 죽음을 맞이했으며, 피터 역시 아들과 누이를 남기고 먼 땅에서 마지막 숨을 쉬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선 작가는 세 가지의 서로 다른 변주를 들려주었지만, 결국은 하나의 곡을 연주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작가가 상실을 개념화하거나 공식화하여 상실을 겪는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상실 그 자체에 대해서 함부로 규정짓지 않으려고 하는, 최소한의 예의를 표하고 싶었던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실이란,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으며, 그것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는 또 다른 상실을 낳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이야기가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시기는 다르지만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집이라는 단어의 추상화로 인해 인간이란 언제나 무언가를 상실하고 또 그 빈 공간을 메우려고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잃고 메우고, 그러다가 또 잃고 또 그것을 메우려고 하고... 이러한 윤회적인 운명 속에 인간이 놓여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아니었을까. 추측해 보건대, 만약 네 번째 이야기가 존재했다면, 제목은 1부의 제목과 같이 ‘집을 잃다’이지 않을까. 마치 돌고 도는 고리처럼.

우리 모두 언젠가는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일 것이다. 나는 이 판타지적이고 미스터리하면서도 아름다운 책을 통해, 희미하지만 하나의 묵직한 메시지를 건져본다. 상실과 그에 반응하는 인간, 그리고 그 상실을 메우려고 본능적으로 어떤 형태의 믿음을 통해서든지 그것을 메우려고 발버둥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러다가 또 다른 상실을 맞이하고야 마는 존재, 결국 상실을 늘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또한, 상실이 각 사람에게서 다른 모습으로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통해서, 내 주위에 상실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조금은 더 넉넉하게 바라보고 공감하며 위로를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무엇보다, 그래도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구원을 기대하는 것을 난 끝내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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