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부활을 부활시키다 2
[곽건용] 부활을 부활시키다 2
  • 곽건용
  • 승인 2019.05.12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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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의 설교 - 누가복음 24:28~35

두 개의 터닝 포인트

지난주일 예배 후에 많은 분들이 설교에 대해 얘기하시더군요. 이어질 다음 주일 설교가 기대된다고 말입니다. 설교에 대해 언급하는 일이 매우 드문 제 아내도 비슷한 얘기를 하기도 했고요.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이거 기대만 잔뜩 하게 해놓고 실망하게 만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어 부담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대에 부응하겠답시고 없는 얘기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 일이니 기왕에 하려던 얘기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일에 한 얘기와 오늘 하려는 얘기의 핵심부분은 제 생각입니다. 곧 남에게 검증받은 적이 없는 ‘제 얘기’입니다. 제가 이와 관련된 주제를 다룬 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의 글을 모두 섭렵하지는 않았으므로(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른 누군가가 제가 하려는 것과 비슷한 얘길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한 이렇게 얘기한 사람은 없으므로 ‘제 얘기’라고 생각하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렇게 듣기 바랍니다.

지난주에 저는 기독교 역사에 두 번의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바울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마복음서를 남긴 영지주의 공동체에 의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복음을 그리스-로마세계에 전파하는 걸 삶의 목적으로 삼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에게는 친숙하지만 로마인들에게는 낯선 개념들과 사건들은 때로는 생략하거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재해석’해서 그리스-로마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야 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유대적인 성격이 짙은 예수의 복음을 그리스-로마세계에 뿌리내리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이에 관한 몇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하느님나라운동에서 중요한 한 측면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하겠다고 예고했습니다.

도마복음서를 남긴 영지주의 기독교 공동체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마태, 마가, 누가 등에 의해 전해진 복음이 지나치게 피상적이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정수를 전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당시 널리 알려져 있고 자기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끼친 영지주의 사상에 비추어서 새롭게 해석했다고 보입니다. 오강남 교수의 말을 빌리면 표층적으로만 표현됐던 복음을 심층적으로 재해석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바울에게 벌어졌던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하나의 측면을 여기서도 상실했다는 겁니다. 제게는 이게 중요한 측면인데 이 방면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여기에 주목하는 학자들이 많지 않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예수운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그 얘기를 하려는 겁니다.

 

솔로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삶을 돌아보면 그분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고 귀신을 내쫓았으며 아주 적은 양의 음식으로 많은 사람을 먹였고 죽은 사람을 되살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들을 잘 읽어보면 매우 흥미로운데 사람들이 간과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 두 주일 동안 오병이어 기적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군중이 하루 종일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날이 저물고 밥 때가 됐습니다. 그런데 들판 어디서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구하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서 스스로 알아서 식사문제를 해결하게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이 군중의 먹을 걸 해결하라는 겁니다. 이에 가진 게 없는 제자들은 자기들이 무슨 수로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겠냐고 불만을 털어놓았지요. 이때 한 어린아이가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았고 예수님은 그걸로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열두 광주리 분은 남기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어떤 점이 기적입니까? 사람들은 오병이어라는 작은 분량의 음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데만 집중합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유랑했을 때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와 한두 번도 아니고 ‘매일’ 그 많은 사람들이 먹었다는 사건보다 오병이어 사건이 더 인상적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기꺼해야 한 번 일어난 일회성 사건이고 만나사건은 오랫동안 매일 일어난 사건인데 말입니다. 만나사건은 백성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하늘에서 절로 만나가 내려온 사건이지만 오병이어 사건은 그게 아닙니다. 오병이어 사건에는 한 아이의 협조와 도움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2백 데나리온이 없어서 그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없다고 부정적으로 반응했지만 한 아이는 수줍게 자기가 갖고 있던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았고 예수님은 그걸로 기적을 일으키셨던 겁니다. 예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도 않았고 돌로 떡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는 한 어린아이의 도움이 있었던 겁니다. 기적은 혼자서 독단적으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솔로가 아니라 적어도 듀엣이거나 트리오나 콰르텟, 또는 합창이나 오케스트라였던 겁니다.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왔을 때 제자들은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아이를 고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께 와서 “하실 수 있으면....”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요. 믿는 사람에게는 능치 못 할 일이 없소.”라고 말씀하시고는 아이를 고쳐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이 아버지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마치 그게 없으면 당신이 기적을 행할 수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상대방의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이 기적을 행할 수 없었던 것 같다는 제 얘기에 고개를 갸우뚱 할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럼 이 얘기는 어떻습니까. 마가복음 6장에는 예수님 일행이 예수님의 고향에 갔을 때 벌어진 일이 전해집니다. 예수님이 한 안식일에 고향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고향사람들은 놀라며 “이 자가 어디서 이런 지혜를 얻었는가? 그는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라고 수근하리면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예언자는 자기 고향 밖에서는 존경받지 않는 법이 없다.”고 말씀하고는 거기에서는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신 것 밖에는 아무 기적도 일으킬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제게는 예수님의 기적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저를 더 놀라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든 사건은 왜 여기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겁니다. 왜 예수님은 고향에서는 이처럼 무력했을까요? 왜 거기서는 기적을 행하지 못했을까요? 저는 이 얘기에 주목한 설교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 얘기를 궁금하게 생각하고 질문한 교인도 못 봤습니다. 이 얘기는 고작해야 목사들 세계에서 특수한 경우에나 통용되어왔습니다. 목사들 세계에서는 자기가 자란 교회에는 목회자로 가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목회를 잘 해도 어렸을 때 같이 자라난 기억 때문에 목회를 잘 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교인들이 목사를 너무 잘 안다는 것이죠. 또한 부목사로 일했던 교회도 가지 말라고 말들 합니다. 거기 담임목사로 가면 아무리 잘 해도 부목사 취급 밖에 못 받는다면서 말입니다. 이 얘기는 기꺼해야 이런 경우에나 인용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제게 이 얘기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는 대체 왜 고향에서 이토록 무력했을까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한 가지를 더 지적해야겠습니다. 본문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도 당신이 고향에서 이렇게 ‘푸대접’을 받을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날지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럴 줄 몰랐습니다. 고향에서는 이상하게 안 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당황하셨던 모양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답은 고향 사람들이 한 말에 있습니다. 이 녀석, 마리아의 아들 목수 녀석 아냐?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의 형 아닌가 말이다. 이까짓 녀석이 뭘 한다고……. 거기에는 예수님 앞으로 수줍게 걸어 나와 품에서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생선 두 마리를 내놓은 어린아이가 없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요!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소.”라고 말씀했을 때 “예, 제가 믿습니다!”라며 간절히 응답한 사람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예수님은 독창을 해야 했습니다. 듀엣이나 합창을 해야 했는데 같이 연주할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의 고향에는 서로 교감하고 공감하고 소통하고 연대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기력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말, 연대

‘연대’라는 말, 세상이 이 말보다 더 아름다운 말이 있을까요. 사람과 사람이 교감하고 공감하여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일처럼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의 하느님나라 운동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운동’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하느님나라 복음은 이론이나 학설이 아닙니다. 교리는 더욱 아니고요. 그것은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람이 연대해서 이루어나가는 ‘운동’입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연대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란 얘기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예수님의 언행을 돌아보면 많은 것이 이해됩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임을 극구 부인했을까요? 마가복음에 따르면 베드로가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함구 명령을 내렸지요. 왜 그랬을까요? 학자들은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이 고대하던 메시아, 곧 유대민족을 로마제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줄 구세주로 여기는 데 생각을 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합니다. 저도 거기 동의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다른 면도 있다고 보는 겁니다. 메시아는 일종의 ‘영웅’입니다. 아이언맨이나 어벤저스 같은 영웅입니다. 영웅은 뭔가를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치 않습니다. 혼자 모든 걸 해치우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하느님나라 운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지들과 신뢰를 바탕으로 연대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영웅 메시아가 되어주기를 바랬습니다. 하느님나라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임을 극구 부인하셨던 겁니다.

예수님에게 필요한 사람은 당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떠받드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을 ‘주님’으로 부르지 말라고, 주님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 한 분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신 당신을 ‘친구’로 여겨 달라고 말씀하셨지요. 이 역시 당신이 이루려는 하느님나라가 신뢰를 바탕으로 교감과 공감을 통해 동지들과 연대해야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 때 베드로가 발 씻김을 거절했을 때 예수님은 만일 당신이 그의 발을 씻을 수 없다면 베드로는 당신과 무관하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예수님에게는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나라 운동을 함께 이끌어갈 동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분에게는 ‘주님, 주님...’ 하며 굽실거리는 노예나 부하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분의 말씀에 복종 일변도인 비서가 예수에게는 필요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필요했던 존재는 연대할 수 있는 친구요 동지였습니다. 하느님나라 복음을 함께 펼치고 실천할 동지, 예수운동을 신뢰와 연대 속에서 함께 전개해나갈 벗이 필요했고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그런 존재가 되어주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부활을 부활시킬 사람은 누구?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얘기입니다. 우리는 부활이 경천동지할 놀라운 사건이었을 거라고 추측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리스-로마사회에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광범위하게 존재했습니다. 현대인처럼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다만,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부활은 영웅들에게나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나 부활하는 게 아니란 얘기입니다. 나사렛 촌구석에서 태어난 하찮은 목수 출신의 시골뜨기에게는 가당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로마사회의 믿음과는 달리 나사렛 촌구석 출신인 예수는 부활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소식이 순식간에 온 세상에 퍼지지 않았습니다. 그따위 미미한 존재가 부활했다고 하더라도 그걸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그게 실제로 일어났다 하더라도 잠시 얘기되다가 금방 따뜻한 햇살에 눈 녹듯이 사라져버릴 소식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게 예수님 한 개인의 부활이었다면 그분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로마와 유대 권력자들로서는 어렵지 않게 잠재울 수 있었을 겁니다. 가짜뉴스라고 퍼뜨리면 그만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이들이 혹시 예수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간 다음에 다시 살아났다고 떠들고 다닐지 모르지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논의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예수의 부활은 한 구석에서 벌어진 해프닝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와 더불어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도 급속도로 전파됐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었을까요?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그것은 제자들 덕분이었다고 말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부활’하지 않았더라면, 곧 다락방에 숨어서 덜덜 떨고만 있거나 뿔뿔이 흩어져버렸다면 예수 부활은 미미한 해프닝으로 끝났을 겁니다. 그들도 부활했습니다! 다시 살아난 겁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거나 감화를 주어서 믿게 만들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그냥 부활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사셨던 삶을 그들도 살았습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얼마간 살다가 죽었겠지요. 자칫하면 예수의 부활도 그런 꼴로 끝날 뻔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부활을 부활시켰습니다. 다시 죽을 뻔했던 부활을 되살려놓은 것은 하느님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닌 제자들이었던 겁니다. 이는 부활한 예수님과 끈끈한 연대가 만들어낸 기적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이것이 없습니다. 아주 없다고 말하면 지나친 얘기일 수 있지만 있다고 해도 매우 미미합니다. 바울에게 이방인은 선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교회들은, 물론 그들과의 연대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그것 같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한편 도마복음을 남긴 영지주의 공동체에게는 그런 연대의식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점이 바로 두 개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낸 바울과 영지주의 공동체가 잃어버린, 예수운동의 중요한 측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의 교회를 생각해보면 희망과 기대보다는 실망과 좌절이 앞서는 게 사실입니다. 양적으로 교회는 엄청나게 성장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쇠퇴의 길을 걷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교회는 사람들로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 넘치도록 많은 교회들이 정말 교회인가?’ 나 잘났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교회면 교회다워야 하는데, 이건 교회인지 기업인지 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교회는 예수의 길을 따라서 부활을 삶을 살겠다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현재 교회는 그런 공동체라기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채울 수 없는 욕망을 하느님의 힘을 빌려 채우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님이 추구했던 하느님나라 운동을 이어가려는 사람을 가리키고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하고 친교하며 연대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첫 교회 시대에 미미한 사건이었던 예수의 부활을 온 세상을 뒤집어놓는 엄청난 사건으로 만든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토록 친구요 동지를 원했던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해서 부활한 그분과 연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그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은 다름 아닌 우리들입니다. 오늘 부활을 부활시킬 사람들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합니다. 부활은 주장이나 학설이 아닙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영적 체험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활은 2천 년 전에 일어난 예수의 부활을 오늘날 우리가 부활시킴으로써, 곧 매일의 삶을 부활의 삶으로써 살 때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굳이 부활을 믿으라고 말로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을 믿으라고 입으로 떠들 필요도 없습니다. 삶이 곧 말이 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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