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신앙의 선생’으로 자라나기 위해 필요한 것들 
[김동환] '신앙의 선생’으로 자라나기 위해 필요한 것들 
  • 김동환
  • 승인 2019.05.12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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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목사의 설교 - 디모데전서 1:12~20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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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교교육의 문제

어제, 오늘은 길섶교회 첫 엠티가 있었습니다. 서로를 알아가고, 또 교회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정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나요? 엠티의 마지막 순서로 주일 오전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인데요, 저희 중에는 어린이는 없잖아요? 그래서 ‘신앙 교육’에 관한 고민을 함께 나눠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길섶 교회가 시작된 지 9개월 차에 들어가고 있고요, 따라서 저도 학교에서 아이들을 8개월 정도 가르쳤어요. 폭풍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일단, 아이들은 정말 활기차요! 뭔가 하고 싶은 게 많고요! 모든 아이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런 것 같아요.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모두 이 ‘어린이’ 시절을 보냈잖아요? 그런데 그 ‘활기’, ‘에너지’가 어디로 간 걸까요? 물론 사람이 하루 종일 에너지 넘칠 수는 없죠! 제가 말하는 건,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 배우고 싶은 마음, 무언가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싶은 열정, 새로운 무언가를 보고 느끼는 경탄! 그런 거 말하는 거예요, 어른들이 잃어버린 무언가, 말이죠. 지난주에 아이들에게 제가 그린 그림을 보여줬어요. 약간 인정을 받았습니다. 저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서 저를 더 잘 따라줄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전혀 없었고요, 자기 얼굴들을 그려내라고 하더라고요. 노동착취를 당할 뻔했습니다.

3-4학년 아이들에게 물어봤더니, 절반 이상이 미술학원을 다녀요. 그리고 그림 그리자, 하면 대부분 좋아해요. 그런데 6학년 아이들에게 물어봤더니, 미술학원 다니는 애들이 없는 거예요. 전부 수학학원이나 영어학원 이런델 다녀요. 그림은 어렸을 때 좋아하다가 끝나는 거예요. 그게 좀 안타까운 것 같아요. 물론 그림이 싫은 사람은 안 하면 되지만, 이렇게 획일적이 다니! 하는 아쉬움이 드는 거예요. 어렸을 때는 전부가 피아노 학원, 미술학원을 다니고, 5학년쯤부터는 전부 영어학원 수학학원을 다녀야 하는 거예요. 자기가 좋아하는 걸 더 파고들 수 있는 여유, 자기가 열정을 쏟고 싶은 곳에 열정을 쏟을 자유가 없는 거예요. 우리나라 학교 교육이 조금씩 바뀌어가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어린이날에 모든 어른들이 반성하고, 교육을 정말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으로 바꾸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의논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2. 교회교육의 문제

교회의 신앙교육은 어떤가요? 정말 난감하죠, 적어도 학교는 체계적인 커리큘럼이란 게 있어요. 물론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초등학교 때는 이런 것을,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이런 걸 배운다라는 계획표 같은 게 있잖아요? 교회는 어떤가요? 그냥 각자도생(各自圖生)이에요. 목회자가 알아서 가르치며 돼요. 문제는 보통의 교육부서의 목회자는 2년 간격을 두고 바뀌거든요, 그래서 교회의 어린이들은 한 선생님을 만나서 신앙에 대해 쭉 배우게 되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작은 교회는 그게 가능하긴 한데, 문제는 작은 교회일수록 아이들이 없다는 거죠.

그리고 정말 이상한 가르침이 많은 게 문제죠. 제가 청소년 사역을 할 때, 마땅한 성경공부 교재가 없었어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요. 총회 교재가 그래도 괜찮았는데, 거기에도 창조과학 내용이 들어가 있었어요. 신학교수들의 감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아요. 일개 전도사가 이건 아니라고 해도, 교인들은 교재에 나와있는 내용들 더 신뢰할 거예요. 아이들은 중학교에 올라가서 우주의 역사를 배우고, 공룡을 배우는 데, 교회에서는 노아 방주를 가르쳐요. 중학교 1학년이 되는 순간 혼란이 일어나는 거예요. 독일에서는 교회에서 창세기 앞부분을 문자적으로 가르치는 걸 금하고 있는데요, 한국은 아무런 논의가 없어요. 세습 문제 하나 정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신앙의 어른들이 신학적인 토론을 먼저 하고,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치질 지를 고민해야 하는데 거기까지 나아가질 못하는 것 같아요. 교회가 어린이 주일을 전후로 해야 할 일은, 전반적인 신앙교육에 대한 재검토, 그리고 좋은 교재들을 만들어내는 일을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3. 이 시대의 ‘신앙의 선생’은 누구인가?

저희는 이제 20대, 30대니까, 어떻게 보면 어린이보다 선생님에 가까운 나이예요. 비록 여러분들이 교회학교 교사는 아니더라도, 여러분보다 어린 친구들에게는 신앙의 선배이고, 선생이 될 수 있는 거겠죠? 여러분의 조카가 있을 수도 있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은근히 학교에 아이들이 자기 교회 다닌다고 하는 애들이 있어요. 초성 퀴즈 같은 거 내는데, ㄱㅎ 해서 교회 이렇게 내는 애들도 있거든요. 그럴 때면, 저도 ‘와, 선생님도 교회 다니는데!’ 하고 좋아해 줘요. 그러고 나면, 저는 학교 교사이지만, 이제는 신앙의 선배, 신앙의 선생이기도 한 거예요. 믿음의 길을 먼저 가는 사람으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는 거죠.

여러분에게 ‘신앙의 선생’은 누가 있나요? 선생, 먼저 삶. 누군가 신앙으로 사는 삶을 보고, 와 멋지다, 나도 저런 모습 본받고 싶다 하는 그런 ‘선생’ 말이에요. 저도 여러분에게 그런 ‘선생’이 되고 싶은데, 아직은 선생의 포인트보다는 예배를 돕는 사람, 성경해석을 돕는 사람 이런 느낌이 더 쏀거 같아요. ‘뭔가 떳떳하게 제가 이런 걸 더 실천했습니다!’ 하는 게 저도 많이 떠오르진 않거든요. 좋은 선생과 제자의 관계로 신약에서는 바울과 디모데가 가장 먼저 떠오를 거예요. 좋은 신앙의 선생으로 우리 모두가 자라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디모데전서 1장 말씀을 살펴보면서 찾아보기로 해요!

 

4. 자기반성

12절, 13절을 새번역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12 나는 나에게 능력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나에게 이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기 전에, 이 내용이 선생이 제자에게 쓴 편지라는 걸 먼저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정확히 짚는 거에요, 자신의 과거, 자신의 연약함을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의 살인사건에 적극 가담한 그 실수를 바울은 평생 잊지 못했을 거에요. 그래서 자신이 교회 공동체 안의 ‘선생’ 이 될 자격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거에요. 그것을 가장 사랑하는 제자에게까지도, 이렇게 고백하는 거에요.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이 세워준 사람이다!’ 저는 누군가가 신앙 공동체의 리더, 선생이 되려면 첫 번째로 필요한 덕목이 자기반성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세상에서 스승과 제자는 가장 권력관계가 선명한 관계잖아요? 물론 한국에서 말입니다. 선생의 말에 끔뻑 죽어야 하는 게 한국의 선생, 제자 관계인데, 선생이 자기의 한계, 실수를 잘 말 안 하잖아요. 그것부터 고칠 수 있어야, 신앙의 리더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될 것 같아요.

참 재밌는 게, 그래서 저도, 이런 이런 거는 잘 모릅니다, 이런 부분은 저도 약점이에요,라고 성도에게 이야기한 적이 몇 번 있는데요, 이거를 또 싫어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지금까지 내가 만난 목사들은 안 그랬는데, 당신은 왜 이런 솔직한 이야기를 해서 시험에 들게 하느냐? 이거예요. 흠, 목사와 솔직한 대화는 하지 않고, 물론 목사가 먼저 진심을 말하지 않는 문제도 있겠지만, 거리를 두고는 설교만 들으면서 상상 속의 ‘목사’를 만들어 놓고는, 불가능한 목표를 세워두고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살아온 성도 입장에서는 자기의 판타지가 깨지는 이야기가 충격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 하지만 건강한 신앙교육을 위해서 판타지는 빨리 깨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없으니까요.

 

5. 예수님-중심적 사유

이어서 14절부터 16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14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끝없이 참아 주심의 한 사례를 먼저 나에게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반성이 가능했던 이유는 예수님-중심으로 모든 걸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학력, 바리새파 율법 교사가 되기까지의 수많은 시간의 공부들, 그리고 명성들은 예수님 앞에서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신앙. 그것은 세상적인 모든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힘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부끄럼 없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의 사랑이 자신의 활력, 에너지의 중심이 된 사람. 그래서 하고 싶은 일, 열정을 쏟고 싶은 일, 자신의 삶의 방향에 예수님의 사랑에 영향을 받는 사람! 신앙의 선생인 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중심에는 이 예수님-중심적 사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중심적 사유가 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생’의 길을 가게 될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이 제자를 기르는 일이었잖아요? 나중에 제자도에 관해 또 고민을 해보는 시간을 가질 텐데요. 그것은 제자도에 관한 책을 읽거나,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간다는 건, 세상 속에서 누군가에게 신앙의 선생이 된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사랑이 나의 꿈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예수님의 사랑을 나는 세상 속에서 얼마나 표현하고 싶어 하는지, 실제로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되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다면,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이번 주에 치과치료를 받으면서 느끼는 게, 아무런 통증 없이 병이 진행되는 게 제일 무서운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기는 그런 면에서 정말 괜찮은 거죠. 증상이 확 오니까요. 그런데 충치는 느낌이 없어요. 통증이 있을 때는 이미 엄청 진행된 상태잖아요? 신앙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것 같아요. 아, 내가 신앙적인 열정이 완전히 떨어진 것 같다. 그냥 친구 만나러, 외로워서 하나님을 찾고, 사람을 찾는 것 같다고, 스스로 느껴질 때면 이미 진도가 많이 나간 상태예요. 자신의 열정이 흐르는 방향을 평소에 체크하는 성실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6. 선한 싸움

마지막으로 18절에서 20절까지를 다 함께 읽겠습니다.

18 아들 된 디모데여, 이전에 그대에 관하여 내린 예언을 따라 내가 이 명령을 그대에게 내립니다. 그대는 그 예언대로 선한 싸움을 싸우고, 19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선한 양심을 버리고, 그 신앙 생활에 파선을 당하였습니다. 20 그렇게 된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 바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입니다. 나는 그들을 사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들을 응징해서, 다시는 하나님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자기반성의 능력, 예수님-중심적 사유만 해도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해야 할 게 있습니다. 바로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키느라 겪게 되는 ‘선한 싸움’입니다. 저는 싸움을 별로 안 좋아해요. 싸움은 영화로 보는 것만 좋아합니다^^; 화는 보통 사람만큼은 있는 것 같은데 가능하면 화를 잘 안 내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종종 물어봐요, 선생님은 왜 그렇게 화를 안내냐고. 교육자로서 노력하는 건 정말 화가 날 때는 화를 안 내려고 하고요, 화가 안 났지만 화를 낸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가 있어서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만 화를 내려해요. 기본적으로 싸움을 좋아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선한 싸움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어요. 이 세상이 그렇잖아요? 동료 목사들을 만나면 저보고 실천력이 좋다고 하는데요, 저는 글을 100번 쓰고, 말을 100번 해야 한번 실천하는 편이에요, ‘실천력’ 엄청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정말 양심 때문에 싸움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어요. 무언가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들이 있거든요. 그럴 때에도 침묵하고, 아무 말하지 않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건, 믿음이 좋은 게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 없는 거죠. 물론 어떤 싸움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해요. 가능하면 갈등이 없는 게 좋죠.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니까요. 그런데 누군가 세상 속에서, 교회에서 거짓된 일을 하고 있고, 부당하게 권력을 휘두르고 있고, 누군가를 괴롭히고 있다면, 선한 양심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음의 싸움을 해야죠, 몸으로 싸우라는 말이 아니고요, 어떤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도덕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보여준 영상 중에 재밌는 게 있었어요. 인디언들에게 전해져 오는 이야기였는데요, 사람은 가슴에 삼각형을 품고 태어난데요. 그래서 나쁜 말, 나쁜 행동을 하고 나면 그 삼각형이 돌면서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쁜 말, 나쁜 행동을 오래 하면 그 삼각형이 무뎌져서 더 이상 마음을 찌르지 않게 된데요. 양심이 사라지는 거죠.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으면 불편한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끼지 않고 싶은 일에 끼게 되고요, 어쩔 수 없는 오지랖으로 손해를 볼 수도 있어요. 교회나 학교, 직장에서 보이는 무수한 불의들과 부딪힐 수밖에 없어요. 만약 모든 신앙인들이 이런 선한 싸움을 했다면 교회, 학교, 사회가 이렇게까지 많은 문제를 보이진 않았을 거예요.

바울의 선한 싸움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 싸움의 삶을 보고 권면을 받은 디모데가 없었다면, 오늘의 교회는 없었을 거예요. 물론 매일 싸우며 살 수는 없죠. 하지만 침묵하고 눈을 감는 시간이 하루, 하루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신앙의 삼각형은 무뎌지게 될 거예요. 선한 싸움이란 없는, 회색빛의 믿음이 될 거고요,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도 신앙의 선생이라고 불러주지도 않을 거예요. 20절에 보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가 등장합니다. 바울이 대놓고 사탄에 넘겨주었다고 표현하고 있죠? '이 사람들과는 도저히 교회로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마음을 '사탄에 넘겨주었다!'고 표현한 것 같아요. 어떤 문제를 일으켰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후메내오는 디모데후서 2장 17절에 한번 더 나와요. 거기서는 사탄 대신 악성 종양으로 묘사됩니다. 화끈하죠?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면서 당시 교회의 믿음을 흔들었던 사람이라고만 표현되어있어요.

더 자세한 내용은 편지를 주고받은 바울과 디모데만 알 수 있는 상황이라 구체적인 내용은 추측만 가능할 것 같아요. 하지만 분명한 점은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교회를 세웠지만, 세상과,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와 싸우고 다니라는 말은 아니고요! 정말 싸워야 할 때, 타협하지 않아야 할 때,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목소리를 내야 할 때는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신앙의 선생이 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선생이란 말이 부담스럽더라도, 적어도 이런 생각은 하고 살아야 해요. 신앙을 품고 사는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믿음의 후배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까? 그저 소리 없이, 죽은 듯이, 없는 듯이 사는 모습을 보여줄지, 무언가 본받고 싶은 모습을 심어줄지 말입니다. 물론 누구가에게 보여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건 아닌데요, 믿음의 어린아이들, 신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를 롤모델로 삼고 살아가야 할지를 먼저 신앙을 하는 우리들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이제 엠티를 마치고, 각자의 삶의 자리로 다시 돌아나갈 텐데요. 바울 선생님이 디모데에게 준 메시지를 마음에 품고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중심적으로 생각하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나갈 수 있는 길섶 교회의 모든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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