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 어떤 신앙입니까?
[장일] 어떤 신앙입니까?
  • 장일
  • 승인 2019.05.12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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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 목사의 야고보서 강해 설교 5 - 야고보서 1:12~18
집사부일체
ⓒ집사부일체 ⓒSBS

오늘은 야고보서 강해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주에 서울을 다녀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한 예능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집사부일체’라는 SBS 방송의 예능 프로그램인데 매 주일 저녁에 방영되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네 명의 젊은 MC들이 사부 곧 멘토를 초청해서 하루 동안 인생과외를 받는 내용입니다. 그동안 배우 최불암, 가수 이문세, 축구선수 박지성 등이 사부로 출연했습니다. 지난 주에는 매우 특별한 사부가 등장했습니다. 혹시 보신 분 계시나요? 바로 각종 화재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소방관들이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이날 방송은 지난 5월 4일 세계 소방관의 날을 맞아 특별히 기획됐습니다. MC들도 경기도에 위치한 소방학교를 찾아 직접 소방훈련을 체험했습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소방훈련은 처음부터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산소호흡기를 포함한 소방복의 무게만 무려 27킬로그램에 달했습니다. 이 상태로 9층 계단을 오른 이승기씨는 결국 땅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는 “맨몸으로 올라오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매번 이러한 수고를 감당하느냐”며 소방관들의 노고에 감탄했습니다. 실제로 소방관들은 아파트 화재의 경우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유일한 이동통로는 오직 계단뿐입니다. 게다가 밤새 진압을 하게 되면 무거운 장비까지 들고 수없이 계단을 오르내려야합니다. 그렇기에 평소에도 끊임없는 체력훈련과 긴장을 놓칠 수 없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지난 달 강원도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이번 산불은 국가재난사태가 선포될 만큼 매우 심각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의 소방관들이 지역을 가리지 않고 즉시 현장으로 달려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밤새 진화작업에 매달린 결과, 자칫 대형참사로 번질 수 있는 산불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시험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흩어진 교회가 당면한 시험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소 소방관들의 소중함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 불이 났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언제 우리 신앙의 본 모습 즉 민낯이 드러나는지 아시나요? 바로 불같은 시험을 만났을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시험 앞에서 상반된 두 모습의 신앙이 나옵니다. 이 모습들을 통해 ‘나는 어떤 신앙인가?’ 우리 신앙의 현 주소를 발견하며, 인내하는 자에게 주시는 영광에 참여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1. 인내하는 신앙

어떤 신앙입니까? 첫 번째는, ‘인내하는 신앙’입니다.

12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앞서 야고보는 2-4절 말씀에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며 한차례 권면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인내의 가치와 그 결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참고로 오늘 시험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시련’ 또는 ‘테스트’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먼저 인내의 가치를 살펴보겠습니다. 야고보는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에게 무엇이 있다고 말합니까? ‘복’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언뜻 보면 시험과 복은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야고보는 왜 인내하는 신앙을 복이라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내가 가져오는 결과 때문입니다. 이어서 나오죠. 시험을 참고 견디어 그 믿음이 입증된 자에게 무엇이 주어집니까? 바로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당시 면류관은 월계수 잎으로 만든 월계관을 의미합니다. 이는 올림픽에서 승리한 자만이 쓸 수 있는 명예와 영광을 상징합니다. 오늘날은 금메달이나 트로피가 되겠죠. 그런데 야고보가 말하는 면류관은 이러한 면류관이 아닙니다. 생명의 면류관이란 잠시 있다 사라질 영광이 아닌 영원히 썩지 아니할 영광을 상징합니다.

이광기
CBS '실화극장 새롭게 하소서' 1회 이광기편 동영상 갈무리 ⓒCBS

다음은 탤런트 이광기씨의 간증입니다. 중견배우인 이광기씨는 태조왕건, 정도전 등 주로 사극을 통해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런 그에게 2009년 11월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시험이 찾아옵니다. 바로 일곱 살 된 아들을 신종플루로 잃게 된 사건입니다. 전날까지 멀쩡하던 아이였기에 그 죽음이 더 믿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하필 내 가정에, 왜 하필 내 아이였을까?” 당시에는 갖은 원망이 쏟아져 나왔고 그저 목 놓아 통곡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광기씨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인내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는 이러한 고백을 드리게 됩니다. “아들을 잃은 아픔 속에서 세상 이웃들의 아픔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고백은 말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몇 달 뒤 아이티에서 사상 최악의 지진이 발생합니다. 이때 이광기씨가 어떻게 했을까요? 주저하지 않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족을 잃은 그들의 아픔을 돌아볼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내하는 신앙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입니까?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험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분명 괴롭고 고통스러우며 솔직히 피해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험을 견디고 통과한 자가 얻게 될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은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머리에 쓸 수도 없습니다. 오직 인내의 신앙을 지킨 자만이 믿음의 경주 끝에 받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주께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영광을 당신의 백성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오늘도 우리가 시험 앞에서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5)” 이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 공동체의 믿음 또한 인내하는 신앙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원망하는 신앙 

어떤 신앙입니까? 두 번째는, ‘원망하는 신앙’입니다. 

13 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 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14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5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여러 종류의 시험을 만나게 됩니다. 가령 사업이 부도를 맞거나, 건강하던 사람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인간관계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또한 이러한 시험은 우리를 실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때 교회 안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집사님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가봐, 이때일수록 흔들리지 말고 믿음으로 서야 돼” 여러분 어떻습니까? 매우 익숙한 멘트지요? 그런데 오늘 야고보는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한다” 이렇게 말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흩어진 교회 안에는 시험의 원인을 하나님께 책임 전가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기에 야고보는 하나님의 속성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시험하지도 않으신다” 그런데 이상하죠? 우리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이나 욥에게 주신 여러 고난들 말입니다.

그러나 먼저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무도 시험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악한 유혹으로 실족하게 만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식으로 우리를 시험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때론 증명을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계획과 섭리 안에서 그 뜻을 이뤄가시는 분이십니다. 시험을 만났을 때 우리를 실족하게 만드는 원인은 따로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14절에 ‘욕심’입니다. 이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자라서 죽음을 낳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매우 유명한 구절입니다. 우리를 실족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욕심이지 결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희 가정도 목회자 가정이지만 부부싸움을 할까요? 안할까요? 가끔 할까요? 자주 할까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보다는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본능처럼 튀어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바로 상대방을 향한 원망입니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 이게 아니라 뭐가 먼저 나옵니까? “당신이 잘못해서 아니 니가 잘못해서 이 모양 이 꼴이 아니야?” 다들 동의하시나요?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잘못이나 책임을 남에게 전하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특별히 시험 중에 있을 때에는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게 우리 신앙의 민낯이며 여전히 우리는 옛 사람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구약만 봐도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한 마디로 원망의 역사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지도자를 원망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표면적으로는 모세와 아론에 대한 원망이지만 실제는 누구에 대한 원망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원망입니다. 결국 이 원망 때문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1세대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여전히 원망하는 신앙은 살아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이 있는데 뭔지 아세요? 시험을 만나거나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 책임을 돌립니다. 목회자와 교회 공동체를 원망합니다. 아니 자기 욕심으로 사업의 손해를 보고, 자기 욕심으로 자식 농사에 실패했는데 그게 왜 하나님 책임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원망하는 신앙은 본인 뿐 아니라 공동체에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힙니다. 제 아무리 욕심을 포장하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화살을 돌려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결국 이 욕심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이르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시험의 상황에서 원망하는 신앙이 아닌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3. 신뢰하는 신앙 

어떤 신앙입니까? 마지막은, ‘신뢰하는 신앙’입니다.

17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18 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야고보는 앞서 시험의 원인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욕심에 있음을 밝혔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악한 유혹으로 실족시키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합니다. 17절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한마디로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를 주십니다. 여기서 ‘선물’과 ‘은사’는 원어로 보면 모두 ‘선물’을 의미합니다. 18절을 보면 이 선물의 의미를 더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며,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 곧 복음으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낳으셨습니다. 첫 열매라는 표현 또한 구원받은 성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 곧 하나님 나라 백성의 지위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지난 주에도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이를 두고 여러 평가들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보수 야당은 미사일 발사를 계기로 대북정책의 실패가 확인됐다며, 남북군사합의의 전면 폐기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은 단거리이므로 전혀 신뢰위반이 아님을 밝혔습니다. 이렇듯 국가나 개인에게 있어서 신뢰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특별히 앞이 보이지 않는 시험 중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을까요? 야고보는 그 근거를 ‘하나님의 불변성’에 두고 있습니다. 17절 하반부를 함께 읽겠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늘 아버지는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보면 카멜레온처럼 기분에 따라 변하는 분들이 계시죠? 정말 함께 있으면 얼마나 피곤한지 모릅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은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이러저러한 변함이 결코 없으십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열두 번 변하지만 하나님은 늘 그 자리에 계십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 신실하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시험 중에 있더라도, 우리 삶의 뿌리가 흔들리는 일이 있더라도, 변함없으신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신뢰하는 신앙입니다.

 

결 론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야고보서 강해 다섯 번째 시간으로 ‘어떤 신앙입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성도는 시험을 만났을 때 그 신앙의 본 모습이 드러납니다. 시험 앞에 인내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원망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묵묵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질병의 치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질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입니다.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공동체는 그리고 그 안에 속한 나는 어떤 신앙입니까? 인내하는 신앙입니까? 신뢰하는 신앙입니까? 아니면 원망하는 신앙입니까?

말씀을 집중하여 잘 들으셨다면 분명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마음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진중하게 잘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한 주간 그 감동을 따라 살아가시기를 권면 드립니다. 끝으로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신실하심이 팔로우 공동체에 함께 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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