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그대는 어떤 부활을 믿습니까?
[곽건용] 그대는 어떤 부활을 믿습니까?
  • 곽건용
  • 승인 2019.05.0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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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의 설교 - 요한복음 11:17~27

내가 기억하는 죽음

얼마 전에 제가 특정 의도를 갖고 한 행동 중에 기억하는 가장 오래 된 일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바이올린이 배우기 싫어서 땅바닥에 패대기쳐서 부숴버린 일이란 얘기를 했습니다. 그 얘길 듣고 많은 분들이 재미있어 하더군요. 제게도 한편으로는 재미있는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는 사건입니다. 우선 그 어린 나이에 그런 ‘무모한’ 짓을 했다는 사실이 그렇고 또 그 사건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결국 제가 연주할 줄 아는 악기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키며 지냈습니다. 고난주간은 예수님이 악의 세력들에 대해 벌인 저항과 그로 인해 당한 고난과 죽음을 명상하며 지낸 기간이었습니다. 성금요일은 그런 저항과 고난의 정점인 십자가 처형이 벌어진 날입니다. 그날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난주간 중에 제 기억에 남아 있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목사이므로 보통사람보다는 죽음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그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애도한 사람의 죽음도 있었고 반대로 애도하는 사람도 하나 없이 쓸쓸하게 이 세상을 떠난 죽음도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노숙자가 죽었을 때 장례를 치러주는 선교사의 부탁을 받아 한 노숙자의 장례를 집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장례식은 말 그대로 저와 그 선교사, 두 사람만이 참석한 장례식이었습니다. 고인에게 연고자가 없는지, 아니면 있는데도 연락이 닿지 않았거나 연락이 됐는데도 참석하지 않은 것인지는 저도 모르지만 좌우간 딱 두 사람만 참석한 장례식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저는 제가 경험한 많은 죽음들 가운데 오래 전에 있었던 두 사람의 죽음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던 1982년 처음으로 파트타임 교육전도사를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제가 가르치던 초등학교 6학년 여자 아이 하나가 주일 어린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예배 시간 전까지 친구들과 줄넘기 등을 하며 놀다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뇌의 혈관이 터졌다는 겁니다. 그 아이는 다음날인가에 죽었습니다. 저는 연락을 받고 같은 학년 아이들 몇 명과 죽은 아이 시신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 곳은 시설을 갖춘 영안실이 아니라 어떤 용도의 방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지하실 같은 곳이었습니다. 아이 사진도 없고 그저 촛불 두 자루만 켜져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의 친구들이 펑펑 우는 가운데 짧은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슬피 우는데 이상하게도 저는 눈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멍했습니다. 이게 뭔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어째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생각만 들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제가 여구 스물세 살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는 생각이 나중에는 들었습니다. 죽은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키도 크고 예쁘장하고 깨끗한 아이였습니다. 그때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깨끗하게 씻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교회가 위치한 곳이 부유한 동네가 아니었으므로 더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유난히 깨끗하게 씻고 다녀서 저는 가정형편이 좀 나은 집 아이인줄 알았는데 그 집에 가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상당히 가난하고 아이는 많은 집이었던 겁니다.

저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습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늘 이 죽음을 생각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가끔 문득 문득 떠오를 때마다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하느님은 왜 그 아이를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을까, 하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그로부터 2년 후의 일입니다. 그때는 제가 고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2학년 남학생 하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말도 없고 조용하고 내성적이어서 있는지 없는지도 드러나지 않는 아이였는데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겁니다. 그 아이의 죽음은 일이 벌어진지 며칠 지난 후에야 어찌어찌 교회 친구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그때는 이미 모든 장례절차가 끝난 후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라도 그 아이 집에 가서 가족들이라고 만나려 했지만 가족들이 원치 않기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교회 아이들을 모아놓고 그 아이에 대해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이들이 겪은 충격을 그렇게라도 치유해 보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도 그 아이에 대해 잘 아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새로 나온 친구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이 아이의 죽음이 제 기억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아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눈곱만큼도 몰랐다는 사실 때문에 계속해서 가책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의 통계를 들을 때마다 저는 맘이 편치 않습니다. 예를 들면 올해 교통사고로 몇 명이 죽었다느니 암으로 몇 명이 죽었다느니 하는 통계 말입니다. 죽은 사람 하나하나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생명인데, 그 사람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겐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요 하나의 작은 우주인데 그걸 숫자로 표현하는 게 맘이 편치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명 두 명 하고 사람 숫자를 셀 때 그 ‘명’자를 ‘이름 명’자를 쓰지 말고 ‘목숨 명’자를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생명을 좀 더 소중히 여기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5년 전에 세월호에서는 304명의 생명이 ‘떼죽음’ 당한 게 아니라 304명 하나하나가 개별적으로 죽은 것이고 따라서 304개의 작은 우주가 블랙홀 같은 곳으로 사라져버린 겁니다.

 

요한 공동체가 기억하는 한 죽음과 소생

오늘 우리는 요한 공동체가 기억하는 한 사람의 죽음과 소생에 대한 얘기를 읽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이 전하는 나사로의 죽음과 그의 누이 마르다 얘기가 그것입니다. 마르다에게 오라비 나사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심각한 병에 걸려 앓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하나의 작은 우주가 소멸하려는 시점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은 너무도 느긋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앓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도 태연하게 그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시고는 이틀이나 시간을 지체했습니다. 마치 그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잠든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말씀한 다음 길을 나섰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정말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뜻으로 알아듣고 “주님, 그가 잠들었으면 낫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얘기를 읽으면서 오래 전에 재미있게 봤던 TV 예능프로인 ‘봉숭아학당’ 생각이 났습니다. 최근에 한 것 말고 오래 전에 방송한 것 말입니다. 저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눈 대화와 예수님과 마르다가 나는 대화를 읽으면서 세상에 맹구도 이런 맹구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하면 서로 만나는 지점이 있어야 하는데 이들 대화에는 만나는 지점이 없고 서로 어긋나기만 하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틀이 지난 후 길을 나서면서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잠들었다면 ‘낫게 될 거’라고, ‘깨우면’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씀했는데 제자들은 말 그대로 ‘잠들었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던 것이죠.

예수님 일행이 나사로의 집에 와보니 그는 이미 죽어 무덤 속에 있은 지가 벌써 나흘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오라비를 잃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와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서 맞으러 뛰쳐나갔습니다. 우리 같으면 ‘버선발로’ 뛰어나갔다고 썼겠지요. 저도 이번에 백기완 선생님 책을 읽고 알았는데 ‘버선발’이란 말은 버선을 신었다는 뜻이 아니라 ‘맨발’이란 뜻이라네요. 그러니까 버선발로 뛰어나갔다면 버선을 신고 나간 게 아니라 맨발로 뛰어나갔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마르다는 예수께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나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뒷부분에 대해서 저는 고개가 갸우뚱거려집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가 해서 말입니다. 그 말은 지금이라도 예수가 원하시면 나사로를 다시 살릴 수 있다는 뜻이었을까요? 아니면 별 뜻 없이 인사로 한 말일까요? 그도 아니면 또 다른 어떤 뜻이 있는 말일까요?

 

서로 어긋나기만 한 대화

이에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그대의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이미 썩기 시작한 시체가 다시 살아날 것이란 말입니다. 마르다는 그렇게 믿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라고 대답했으니 말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과는 초점이 빗나간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말날에 나사로가 어떻게 되리라고 얘기하신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다시 살아날 거라고 말씀하셨으니 말입니다. 이 역시 동문서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봉숭아학당 수준이죠.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마르다가 마지막 날이 부활 운운하자 예수님은 훗날 길이 남을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대가 이것을 믿습니까?” 많은 기독교인이 암송하는 이 말씀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초점이 어긋나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여전히 봉숭아학당에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대답 아닌 대답을 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셨습니까? 당신은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을 믿느냐는 물음에 대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고 하느님의 아들이란 대답이 웬 말입니까. 봉숭아학당의 맹구나 오서방도 이런 대답은 안 할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지만 마르다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나 그분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니, 대체 누가 그 말씀을 즉각적으로 이해하겠는가 말입니다. 그때는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경험하기 전이었습니다. 저라도 그런 얘기는 믿지 못했을 겁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다른 사건 하나를 얘기하겠습니다. 이른바 오병이어 사건이 그것입니다. 군중이 하루 종일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날이 저물고 밥 때가 됐습니다.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거나 아니면 스스로 알아서 식사문제를 해결하게 하려 했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이 군중의 먹을 걸 해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진 게 없는 제자들은 불만 섞인 어조로 자기들이 무슨 수로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겠냐고 말하지요. 이때 한 어린아이가 자기가 갖고 있던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습니다. 예수님은 그걸로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열두 광주리 분은 남기셨다는 겁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진정한 의미

이를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오병이어가 기적을 일으킨 게 아니라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겁니다. 여기서 뭐가 기적입니까? 사건 가운데 어떤 부분이 기적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남자 어른만 오천 명을 먹일 정도로 양적으로 불어난 것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유랑했을 때처럼 하늘에서 ‘만나’(manna)를 내리게 하신 게 아니란 사실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돌로 빵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한 어린아이가 갖고 있던 떡과 물고기를 나누었더니 그걸로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가복음 성서공부 시간에 얘기했듯이 오병이어 사건의 요점은 기적적으로 빵이 불어났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눌 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에도 있습니다. 나눔이 기적을 만든다는 겁니다. 물질세계 안에서 벌어진 일에만 매몰될 게 아니란 얘기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반복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이 일으키신 오병이어의 기적이 오늘날에도 반복된다고 믿습니까?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대체 ‘누가’ 그걸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못합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유의 기적을 일으킨다는 유명한 부흥사가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프란시스코 교황이 할 수 있습니까? 저는 모두 아니라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대신 우리 모두가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이 있는데 ‘나눔’이 가져오는 기적이 그것입니다. 나눔이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아니, 오늘날 같이 각박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세상에서는 그런 흐름을 거스르는 나눔 그 자체가 이미 기적입니다.

작년 부활절에 이미 저는 얘기했습니다. 오늘날 부활을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심지어 기독교인 중에도 부활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부활을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부활을 믿는 게 뭘 의미하느냐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기독교인 숫자도 작지 않다고, 부활이 뭐냐고 물으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입니다.

 

부활은 믿기로 선택하는 것

다시 말씀합니다. 부활은 ‘믿어져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는다.’라는 말보다는 ‘부활을 믿겠다.’라고, 더 정확하게는 ‘부활을 믿기로 작정/선택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부활을 믿기로 작정했다는 말은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충만한 생명의 삶을 누리며 살겠다는 뜻입니다. 부활은 ‘믿어져서’ 믿는 게 아니라 믿기로 ‘선택’하는 겁니다. 부활이 나사로처럼 소생하는 것이라면 저는 그런 부활은 믿지 않습니다. 나사로처럼 생물학적인 육체가 되살아나는 것이 부활이라면 저는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죽었다가 살아나서 두 번 살고 싶지 않습니다. 한 번 열심히 살고 죽을 때가 되면 할 만큼 했다는 생각에 만족해서 하느님에게로 가겠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열심히 살지 않았다고 꾸중하시더라도 또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단순히 빵과 물고기라는 물질이 뻥튀기 된 거라면 저는 그 사건을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건 일회성 기적일 뿐이지 반복될 것은 아니겠기 때문입니다. 일회성에 불과한 기적은 아무리 대단한 것처럼 보여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진정한 의미에서 기적인 까닭은 그것이 ‘나눔’이라고 하는, 우리의 영혼이 하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반복할 수 있는 나눔이라는 기적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그런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사람의 부활의 첫 열매였다고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은 부활을 믿었을 뿐 아니라 부활을 살았습니다. 부활의 삶을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았던 겁니다. 저는 부활 믿음이 부활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허무한 것일 따름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부활이 육체부활이냐 영혼의 부활이냐를 두고 지난 2천 년 동안 벌였던 교리논쟁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부활과 관련해서 제게 중요한 유일한 진실은 ‘너는 부활을 믿어서 뭐가 어떻게 달라졌느냐?’ 하는 겁니다. 나의 부활신앙은 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느냐,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느냐, 이것이 제 유일한 관심사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여러분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습니까? 여러분으로 하여금 부활의 삶을 살도록 여러분을 바꿔놓았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물질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믿음이 없다 하더라도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 삶이 바로 부활을 사는 삶입니다. Happy E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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