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부활절 주님의 평강이
[이택환] 부활절 주님의 평강이
  • 이택환
  • 승인 2019.04.30 01: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택환 목사의 설교 - 요한복음 20:19~23
Caravaggio(1601–1602)
Caravaggio(1571~1610),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1601–1602)

지난주일은 부활절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부활절 저녁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는 박** 목사님 가족과 저녁식사를 하고, 목사님 댁에 가서 맛있는 곶감과 목사님이 갈아 내려 주신 커피를 마시며, 즐거운 심방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스리랑카에서 발생한 테러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지난 3월 15일, 50명이 사망한 뉴질랜드 이슬람 사원 총기난사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스리랑카 성당과 교회에서 부활절 예배를 하던 기독교인 등 350여 명이 살해되었습니다. 이후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스리랑카 곳곳에서 성난 기독교인들이 이번에는 무슬림들을 향해 크고 작은 재 보복 행위를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종교 갈등을 겪고 있는 나라에서는 이와 유사한 일들이 언제 발생할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슬림이건 기독교인이건 평안하게 살기 어렵고, 특히 기독교인들은 앞으로 부활절이나 성탄절에 예배하는 것이 더욱 위험한 일이 될 것입니다. 최근 미국 등 여러 나라가 스리랑카를 여행하는 자국 국민들에게 예배 장소를 피하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그 전에 스리랑카 가톨릭교회도 당분간 전국의 모든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비단 스리랑카뿐 아니라, 요즘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예배 시 안전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나라 교회는 정말 복 받은 경우입니다.

평화로운 부활절 날,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겠지만, 사실 첫 번째 부활절부터 최초의 교회 공동체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이 첫 번째 부활절, 최초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가 겪은 일들을 묘사합니다. 그때 제자들은 두려움이 가득한 채, 예루살렘의 한 은밀한 장소에 모여 있었습니다. 4일 전 유대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체포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겼지요. 다음날 예수님은 백성을 미혹케 하고 로마에 항거하는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유대 당국은 언제든지 제자들도 잡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일부는 흩어졌고 남은 제자들은 사도들을 중심으로 은신처에 모여 문을 굳게 잠근 채 두문불출했습니다.

사흘이 지난 안식 후 첫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아마도 제자들과 상의하지 않고 갔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알았다면 말렸겠지요. 유대인들이 그녀를 미행해서 제자들이 있는 곳에 갑자가 들이닥칠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을 다녀온 막달라 마리아가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큰 위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당국이 예수님의 시신을 숨기고, 제자들이 “예수가 부활했다!”는 거짓말을 퍼뜨린 것으로 뒤집어씌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은 제자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만든 그들의 덫일 가능성이 매우 컸습니다.

혹시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잘 못 찾아간 것은 아니었을까요? 베드로와 요한이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가서 확인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 와중에 뒤늦게 돌아온 막달라 마리아가 이상한 말을 합니다. 자신이 무덤 밖에서 울고 있다가 무덤 안을 보니, 두 명의 천사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자, 동산지기 같은 사람이 서 있는데 알고 보니 그가 예수님이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하나님께 올라가지 아니하였으니 붙들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과연 제자들이 그 말을 믿었을까요?

누가 들어도 횡설수설입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가운데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문을 꼭꼭 잠그고 주위를 경계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야음을 틈 타 예루살렘을 빠져나가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굳게 닫힌 문들(복수형)을 통과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 한가운데 서셨습니다. 본문에는 그 순간 제자들이 얼마나 경악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어요.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 외에는 모두가 비명을 지지르고 기절초풍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셨음에도, 역시 막달라 마리아 외에는 아무에게도 평강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때 그 두려움과 의심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그분의 부활의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시자, 두 눈으로 모든 것을 똑똑히 확인한 제자들이, 비로소 십자가에서 죽었던 그들의 스승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깨닫고 기뻐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인사하십니다(21). 평강(샬롬)은 당시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에게 평범한 일상의 인사이지만, 그날 그 순간 제자들에겐 평강보다 더 간절한 게 없었습니다. 평강은 또한 오늘날 뉴질랜드에도 스리랑카에도, 그리고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 노후가 막막한 노인들과 미래가 어두운 젊은이들이 가득한 이 땅에도 꼭 필요한 단어입니다.

사람들은 요한복음이 영적인 복음서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없어요. 대신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적 기원이 강조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동시에 예수님이 친히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음을 증거합니다. 요한복음은 결코 예수님의 신성만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 이상으로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합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굳게 잠긴 문을 통과하실 수 있는 영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요한복음은 그 예수님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합니다(20절).

이러한 예수님의 몸의 부활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 뿐 아니라, 1세기 유대인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낯선 일이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통해 이 땅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여전히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세상의 나라 차원에 머물게 하거나, 단지 죽은 영혼이 들어가는 저 세상 나라 이야기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하지만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빈 무덤, 십자가, 예수님께 배웠던 모든 말씀과 숱한 기적들, 구약에 증거된 모든 일들이 그들의 삶 속에 하나하나 제 자리를 찾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1b...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제자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위대한 유대인의 나라를 세울, 위대한 유대 메시야의 제자로 부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산산조각 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꿈이 다시 살아났는데, 이제 그 꿈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꿈으로 수정되고 변형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나라는 단지 유대인의 나라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나라를 위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던 것처럼, 예수님이 제자들을 온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 그들에게 필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가끔 성령 집회에서 성령 사역을 하는 사람들 중에, 마이크로 ‘쉭쉭’ 거친 숨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이 사람들에게 들어가 방언도 하게하고, 질병도 치유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내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을 성령집회 분위기로 몰고 가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창세기 1:1-2절과 2:7절의 인용임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창세기 1장 1-2절은 천지 창조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묘사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수면 위를 운행하십니다. 성령을 뜻하는 ‘루아흐’라는 단어가 바람, 숨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 7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생기, 즉 하나님의 숨결이 사람의 코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가자 비로소 아담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당신의 숨결,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제자들에게 불어 넣으심으로, 세상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새로운 인류를 창조신 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후서 5:17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분 안에서 새로운 인류로 창조된 사람들, 그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 새 이스라엘, 하나님 나라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첫 번째 인류에게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사명을 주신 것처럼, 새로운 인류에게도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리스도인의 특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 죄 사함의 복음,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의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과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죄 사함의 메시지를 온 세상에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새로운 인류인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의로운 하나님 나라 복음을 통하여, 불의한 세상을 바로잡을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부활절 저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기 전까지, 최초의 교회 공동체 안에는 평강이 없었습니다. 오직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2019년 부활절을 맞이한 세계의 모든 교회 역시,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오시어,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샬롬을 선포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의 영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교회가 주님의 평강을 가득 안고,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이 뒤틀리고 불의한 세상을 바로잡기를 원합니다.

그 일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되었고,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성령을 통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부활절 주님의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