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일과 쉼을 선택할 자유 
[김동환] 일과 쉼을 선택할 자유 
  • 김동환
  • 승인 2019.05.06 12: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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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목사의 설교 - 출 20:8~11, 신 5:12~15
시리아 두라 유로포스(Dura Europos) 벽화중 출애굽 이야기
시리아 두라 유로포스(Dura Europos) 벽화중 출애굽 이야기

1. 노동주일을 맞이하며!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벌써 4월 마지막 주일이군요! 오늘은 ‘노동과 쉼’에 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통합 교단의 교회력으로, 오늘을 노동주일로 정했어요. 교단과 상관없이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가 모두 따르는 교회의 절기가 있고요, 개신교 안에 교단마다 조금씩 다른 기념주일이 있는데, 4월 마지막 주일을 노동주일로 지키는 건 저희 교단에서 2016년에 정했더라고요. 다른 교단에도 노동 주일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거기까지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다음 주 토, 일은 저희가 엠티를 하잖아요? 잠깐의 회의 시간이 있으면 좋겠어요, 하반기 설교 및 나눔 주제에 이런 주제를 다뤘으면 좋겠는 것이 있으면 미리 고민하고, 기도해서 나눠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반기 교회력에는 빈 여백이 좀 더 많아요! 그래서 공동체의 상황에 맞게 주제를 다룰 수 있는 공간이 더 많답니다. 설교의 주제로 다루기 어려운 주제는 나눔 시간에라도 다룰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여러분에게 ‘일, 노동’이란 무엇인가요? ‘일’ 하면 떠오르는 느낌은 어떤가요? 가슴 벅찬 설렘이 먼저 떠오르나요, 아니면 죽음의 월요일이 먼저 떠오르나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전공, 직업을 어떻게 선택하셨나요? 기독교 신앙은 그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우리나라에서 초중고를 나오고 대학을 가는 친구들은 사실, 일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해볼 여지가 많지 않죠. 중간고사, 기말고사, 수행평가와 수능이 있는데, 언제 고민을 하겠어요? 교육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학생들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다양하게 경험을 하면서 스스로 원하는 ‘일’을 찾아가야 하는데 말이죠? 오늘은 특별히 전자공학 교수님이 저희와 함께 하고 있으니 이러한 문제를 같이 의논해 볼 수 있겠어요!

 

2. 일을 설계할 자유

당장 취업이 힘든 우리의 현실은 현실이지만, 그래도 말씀 앞에서 자유롭게 상상해보면 좋겠어요! 오늘은 본문을 두 개 읽었지요? 둘 다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 그런데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에 대한 이유가 좀 다르죠.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께서도 6일간 창조하시고 하루를 쉬셨으니 너희도 쉬어라고 기록되어있고요, 신명기에서는 그 이유가 뭐라고 기록되어있나요? 이집트에서 노예였던 이스라엘 공동체를 해방시켜주었으니 안식일을 지키라고 되어있죠? 출애굽기에서는 창세기의 하나님 이야기를 근거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고 있고요, 신명기에서는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근거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어요!

십계명이라면, 율법의 헌법과 같은 건데, 그 핵심 율법에도 이렇게 두 가지 버전의 기록이 있다는 게 신기하죠? 요즘 뉴스에 헌법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참 생각할 거리가 많은 것 같아요^^;; 어쨌든, 구약성경을 편집할 때, 이스라엘의 서기관들은 두 가지 버전의 십계명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편집했어요. 어느 한 목소리를 삭제한 것이 아니고요. 그래서 오늘 저희도 두 가지 버전의 목소리를 함께 묵상해보도록 할게요. 먼저 신명기의 안식일 계명부터 생각해보아요.

신명기 5장 14절 15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14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나, 너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뿐만 아니라, 너희의 소나 나귀나, 그 밖에 모든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안에 머무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하여야 한다. 15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주 너희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

안식일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이 두 구절을 살펴보세요. 말씀의 뉘앙스가 어떠한가요? 안식, 그러니까 쉬어야 하는데, 누가 쉬게 하는데에 말씀의 강조점이 있는 것 같나요? 쉬는데, 네가 쉬는 것과 똑같이, 너의 아들, 딸, 종, 소, 나귀, 모든 손님들까지 쉬게 해라! 그러니까, 너만 쉬지 말고, 너의 ‘밑에 있는 사람들, 모든 존재들’도 너와 같은 수준으로 쉬게 하라! 는데 목소리의 방점이 있는 거예요.

그 이유를 신명기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 원래 노예였지? 종이 었지? 이집트의 노예였잖아, 그걸 내가 풀어줬지? 그래서 자유를 준거지? 그러니까 다시 명령한다. 너의 밑에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도 그런 자유를 베풀어라.” 종들에게 일을 주지 않는다는 건 자유를 준다는 거예요. 노예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죠. 주인이 하라는 일을 해야 해요. 땅 파라고 하면 땅 파고, 이웃 마을 가서 뭐 가지고 오라고 하면 가지고 오는 거죠? 이렇게 살다 보면 어떻게 되나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요. 꿈이 사라지죠. 그냥 주인이 하는 일을 그 날, 그 날 하면서 밥만 먹고살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런 존재를 노예라고 해요.

율법의 중심인 십계명, 그 십계명에서도 중심에 있는 안식일 계명은 인간이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고,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안전장치인 거예요. 종들에게 쉬는 날을 주어서, 그 날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죠.

이걸 보고, 아, 기독교 사회는 노예가 필요해, 그 노예에게는 하루만 쉬는 날을 주면 돼! 주 5일제도 과분하다! 설마 이렇게 해석할 사람은 없겠죠? 이 고대사회, 수천 년 전의 공동체의 핵심 명령이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하면, 이 법의 정신, 법의 철학이 가리키는 방향성을 생각해야 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 모든 존재를 자유롭게, 그 사람답게, 그 존재답게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는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우리나 고3 학생들은 어떤가요? 엄마가 풀라는 수학 문제집, 선생님이 외우라는 영어 단어책, 학원 선생님이 풀라는 국사 문제집… 아무튼 누군가가 시키는 것을 잘해야만 좋은 고3이 되어요. 그리고 그 과정이 끝났을 때, 정말 자유가 주어질 때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고, 그냥 점수에 맞춰서 진로를 정하게 되죠. 그건 노예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부모님이 원하는 데로, 사회가 원하는 데로의 괜찮은 삶을 살아가는 노예 말이죠.

막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떻게 살아할지 모르는 아노미 상태! 바로 그런 상태예요. 그런 혼란의 상태, 법적으로는 노예가 아니지만, 노예적 사유가 체질화되어있는 그들에게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룰로 주어진 게 율법이랍니다.

만인제사장, 직업 소명설,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죠? 개신교의 전통이에요. 종교개혁시대, 그리고 개신교가 성장하면서 생겨난 이야기이죠. 목사라고 특별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목사로 태어난 사람도 없고, 누구나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서 공동체의 인정을 받으면 목사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에요. 목사라고 특별히 다른 직업보다 성직이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는다는 거, 그런 거 없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목사가 더 거룩한 것 아니라는 말이에요. 이게 개신교의 정신이죠. 개신교에는 ‘성직’이란 말도, ‘성전’이란 말도 없는 거예요.

하지만 이게 더 부담되는 말일 수도 있어요. 성도들도 ‘목사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을 주는 말이니까요. 예수님의 제자로, 선교와 전도, 복음 전파, 그리고 그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시간과 소유, 에너지를 헌신해야 할 의무가 목사와 똑같이 부여된다는 점에서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때, 직업 소명설이 조금 와전되는 경향이 있었어요. 목사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것이 아니라,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거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인데, 그러니까 직업에 성역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귀천이 있는 게 아니다는 말로만 이해하면 문제가 없거든요?

그런데 네가 가진 직업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직업이고, 따라서 너는 다른 마음 품지 말고, 네 수준에 만족하며 모든 열심을 다 해라! 이렇게 가면 직업 소명설의 핵심에서 조금 벗어난 말이 돼요. 왜냐하면 다시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말이 되거든요. 너의 신분, 너의 직업, 너의 소득에 만족하고, 사회가 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 뭔가를 바꿀 마음은 꿈도 꾸지 마! 이렇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칼 맑스가 당시의 기독교를 아편과 같다고 한 게 예리한 지적이긴 했어요, 사회의 문제에 문제제기를 할 뿌리를 없애는 역할을 교회가 했거든요.

막스 베버가 개신교 정신이 자본주의와 맞다고 하는 결론도 비슷한 사유에서 나오는 건데요,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아주 맞는 말은 아니죠. 약간은 왜곡된 직업 소명설의 이해의 결론이 자본주의의 근거로 연결된 것이니까요. 참고로 자본주의가 문제는 많지만, 그럼에도 우리 현실사회에서는 최선의 경제시스템이라는 건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건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고 사견이지만, 저희 공동체의 특성에도 반영이 되는 부분이라 약간 말씀드리고 넘어갈게요!

아시겠지만, 자본주의 전에는 신분제, 계급사회였잖아요? 그때도 직업 소명설이 왜곡되는 것처럼 똑같이 적용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누구는 귀족으로, 누구는 노예로 살게 하셨다, 이렇게 하면 신분제에 종교적 정당성까지 더해지는 거니까요. 누구나 개인의 소유를 가질 수 있고, 그 소유에 따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건 이러한 신분제를 넘어서서 근대사회를 시작하게 한 매우 중요한 사유예요. 자유의 문제이고요.

저는 자유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요. 십계명의 중심, 안식일의 계명이 지향하는 것은 결국 ‘자유로운 삶’에 있다고 믿거든요. 원론적으로 정치에 비유를 한다면, 사실 보수주의의 정치이념에 맞다고 생각해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신뢰해주는 정치체재, 국가의 간섭은 최소한으로 해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확장시켜주는 것. 제가 생각하는 보수란 이런 거거든요. 막스 베버도 그렇고, 애덤 스미스도 그렇고 다만, 이게 가능하려면, 어느 정도의 도덕성, 개신교 신앙의 양심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저도 어느 정도 동의가 되고요.

하지만 현실정치 이념으로는, 우리나라 정치에 바로 접목할 수는 없겠지만, 북유럽의 복지국가, 그리고 독일과 같은 사회민주주의를 좋아해요. 개인의 자유를 확립하기 위해, 지금은 국가가 나서서 약간의 조율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런 거구요, 그 조율을 건강하게 확립한 국가들이 부럽더라고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바라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것을 보장해주기 위해 최소한의 간섭이 필요하다는, 약간은 복잡한 결론이 나와요.

토론거리가 되겠죠? 며칠 전에 읽은 기사에서 봤는데요, 캐나다에서 사는 친구가 한국 와서 놀란 게 급여차이래요. 캐나다에선 대학교수와 학교 청소부의 급여 차이가 크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수와 학생, 청소부가 친구가 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래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게 좀 어렵죠? 월급으로 보이지 않는 신분이 만들어진 분위기가 있으니까요.

독일 유학생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자기네는 고등학생 때 맑스를 배우고, 노조가 왜 필요한지를 배운다고. 이미 독일은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긴 토론을 거쳤고, 자본주의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합의가 이루어져서 국가 체제를 ‘사회민주주의’로 가져갔어요. 아시겠지만, 현실 공산주의 국가들은 공산주의 철학대로 국가를 운영한 게 아니라, 독재국가로 갔다가 다 망했잖아요?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맑스를 가르치고 노동의 문제를 다루고, 노조를 이야기하면 빨갱이 소리 듣기 딱 좋죠. 이제야 조금씩 사회가 바뀌는 분위기이지만 말이에요. 자본주의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건 그냥 교양이에요. 어느 정도의 수정이냐의 문제 차이뿐이죠. 그 부분에서는 정당에 따라, 개인에 따라, 신념에 따라 다양한 의견을 갖는 건 자유예요. 그런데 맑스를 읽었으니 북한을 따르는 사람이다, 체제를 바꾸려는 사람이다! 이렇게 공격하는 건, 교양이 없는 거고,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인 거죠. 이런 대화 불가능한 상태를 주도한 게 또 한국교회라는 게 뼈아픈 현실이에요. 교회가 앞장서서 회개해야 할 부분이죠. 

저는 교회 공동체를 운영하는 방식, 그리고 제가 학교에서 수업에 저의 신앙을 적용해요. 바로 각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맛보도록 도와주고, 이웃에 대한 배려 속에서 그 자유를 최대한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돕는 거예요. 한국의 현실에서는 국가가 살짝 개입해서 복지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라지만(개인의 사견이에요!, 복지문제를 다루는 이유도 개인의 자유를 확립하기 위해서죠.), 작은 공동체 단위에서는 자유를 중심에 두고 싶은 거예요.

수업을 할 때도, 반의 친구들에게 피해를 크게 주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주려고 노력해요. 하고 싶은 목소리를 최대한 경청하려고 노력하고요. 물론 아이들이니까, 다 큰 어른들보다는 약간의 통솔이 필요하긴 한데요, 자유를 경험하고, 그 자유를 책임감 있게 누리는 법을 어렸을 때부터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길섶 교회의 지향점의 중심에 저는 ‘자유’를 두고 싶어요. 여러분이 모두 동의한다면 말이죠. 오늘 주제로 따지자면, 여러분이 어떤 직업, 어떤 일에 헌신할지는 스스로가 고민해보는 거예요. 고민이 너무 어렵다면, 아직 그 자유가 낯설어서 그럴 수 있고요, 사회의 현실이 너무 각박해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너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어요. 둘 다의 문제일 수도 있고요.

노동에 있어서 자유도를 뺏는다면 이렇게 될 수 있겠죠, 목사가 기도를 해서 누구는 어떤 일을 하고, 누구는 어떤 일을 해라, 이렇게 할 일을 정해주는 거죠. 교회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소명 찾기 말이에요. 대부분은 목사, 선교사, 의사 이 셋 중에 정해질 거예요. 청소년들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자신들의 자유를 확립하지 못하게 하는 안 좋은 예라고 생각해요.

 

3. 쉼을 설계할 자유

이쯤에서 출애굽기의 안식일 계명을 살펴볼게요, 출애굽기 20장 10절, 11절입니다.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나,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11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출애굽기에서는 안식일 명령의 근거를 하나님의 ‘창조’에 두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도 6일간 창조활동하시고 하루를 쉬었듯이, 너희도 안식일을 지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개신교 신앙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신앙 고백합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뭔가를 만들었다는 우주의 재료에 관한 신앙고백보다는, 하나님의 자유에 관한 고백이에요. 그러니까 어떠한 외부의 강제라든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무언가를 얻고자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다! 는 고백인 거죠. 그러니까 피조물들이 피조물다워지는 것도, 그러한 하나님의 자유를 구현해내는 데에 있어요. ‘신에게 복종을 잘하는 피조물을 좋은 피조물이다~’ 고하는 건 기독교가 아닌 이방 종교의 이야기입니다.

창조활동을 하나님의 일, 노동이라고 상상해본다면, 그 일의 완성에 쉼이 있어요. 신의 창조 기사에 이러한 쉼이 있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어떠한 종교,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들어본 적은 없어요. 있어도 정말 극소수의 신화일 것 같은데요, 고대 신화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제가 들어본 문헌으로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독특한 신앙고백인 거죠,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요.

여러분은 언제, 어떻게 ‘쉼’을 누리나요? 구약의 출애굽 한 이스라엘 공동체처럼 하루를 문자적으로 쉬는 게 핵심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신 자유 안에서 무언가 창조적인 일, 노동을 한 후, 스스로 온전한 쉼을 누리는 게 신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일이란 거죠. 저는 여러분이 평생 동안 멋진 일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잘 쉬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식일 명령에는 어떻게 쉬라고는 안 나와있어요. 게임을 한 시간 하라든지, 축구를 두 시간 해야 한다든지, 산책을 하라든지, 그런 건 없죠. 그건 자유입니다. 저는 축구를 하면 쉼이 돼요. 못한 지 너무 오래돼서 축구게임이라도 하고 싶네요^^; 그런데 축구에 흥미가 없는 분들에게는 축구가 쉼이 아니겠죠?^^; 그래서 ‘쉼’에도 자유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각자 개인 안에서도 쉼의 방법이 나이대에 따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질 거예요! 하나님 안에서, 자기 영혼을 돌아보시고, 무엇이 나에게 정말 맞는 쉼인지 열심히 파악해보시고, 실천해 보시길 바라요.

요즘 뉴스에, 성문제, 마약문제와 같이 영화 같은 사건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이상하게 쉬려고 할 때 생겨나는 문제들이죠. 나의 쉼을 위해 누군가를 괴롭힌다면, 그건 창조질서에 맞는 쉼이 아니죠. 그냥 악일 뿐이에요. 안식일의 명령은 ‘함께 쉼’의 명령, 다 같이 모여서 쉬라는 것도 아니고, 각자가 원하는 브레이크 타임을 갖게 하는 자유의 쉼이거든요. 이 거룩한 쉼의 명령이 이웃들에게도 잘 적용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쉼에서 우리의 쉼으로 시선을 넓힐 수 있으면 좋겠어요. 누군가가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게 그 사람의 내면적 이유 때문이든, 외부의 다른 이유 때문이든, 그 상황을 살펴보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멋지게 쉼을 누리는 사람의 모습일 거예요.

그래서 결국 다시 노동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노동은 사람이 자신의 의미를 찾고 실현하는 수단으로, 창조의 활동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인데, 과한 노동의 상황으로 사람들이 쉼을 잃어버리고 있다면, 안식일의 명령을 받은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 상황을 바꾸기 위해 무언가 해야겠죠. 나만 잘 쉬라고 하는 게 안식일의 명령이 아니니까요. 공동체의 ‘쉼’을 살펴보고, 보살피고, 공동체의 사회적 합의를 재조정해나가려는 노력. 그게 구약의 안식일 명령을 계승하는 마음입니다. 유대교의 토요일 안식일 율법을 주일로 착각해서, 주일을 안 지키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처럼 가르치거나, 주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종교적 정죄를 한다면, 그건 성경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안식일의 정신에 맞는 것도 아니죠.

유대인들이 안식일 날 예배당에 모여서 말씀을 나누는 건, 십계명에 따른 건 아니에요, 십계명에는 오늘 읽었듯이, 쉼의 명령만 있으니까요. 하지만 말씀 안에서 살기 위해 경험적으로 그렇게 말씀을 읽는 전통을 만든 거죠. 그 의미를 기독교인들은 안식일 다음날인 주일로 가져왔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말이죠. 주일이 이상하게 다시 율법화 되어서 사람의 ‘쉼’을 방해하지는 않는지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주일의 우리 모임이 우리의 ‘쉼’ 중의 하나였으면 좋겠어요.

이제 2분간 침묵기도를 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또 나에게 맞는 일을 누리고 있는지, 아직 찾지 못했다면 그 일을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또 하나님 안에서 잘 쉬고 있는지, 또 이웃의 쉼에 어떤 관심을 가져야 할지를 생각하며 침묵 가운데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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