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 누가 백치인가?
[김영웅의책과일상] 누가 백치인가?
  • 김영웅
  • 승인 2019.04.30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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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백치, 열린책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백치, 열린책들

‘백치’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 지능이 아주 낮은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한영사전에선 ‘(informal) idiot, (offensive) moron, (offensive) imbecile’로 설명되어있다. 즉, ‘백치’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만약 누구든지 이 말을 듣게 된다면 충분히 모욕적일 거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설사 실제로 뇌에 의학적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이 단어는 의학용어가 아니기에, 결코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되는 단어인 셈이다. ‘죄와 벌’에 이어 이번에 읽은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소설 중 두 번째로 쓰여진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제목이 ‘백치’이다. 이 단어의 의미를 찾아본 나로선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왜 그는 굳이 이런 단어를 제목으로 사용했을까? (러시아어로 된 원제목 역시 같다)

그의 첫 장편소설인 ‘죄와 벌’의 경우, 책을 다 읽고 곰곰이 생각한 뒤에야 ‘죄’와 ‘벌’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말해 제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심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가 소설 전체에 깔려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많았다. 반면, 이 책 ‘백치’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소설의 초반부터 백치가 누구인지 공공연하게 드러나있을 뿐더러, 그 설정은, 다분히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새어버려 읽다가 자칫 길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한 책의 중간부분을 거치면서도 꿋꿋이, 심지어 반전 하나 없이 소설의 끝까지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치’가 ‘죄와 벌’보다 약 200페이지 더 길다.)

자정이 넘은 밤,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 숫자인 943 고지를 탈환한 뒤 책을 덮고, 나는 상하권 각각이 약 500페이지가 되는 묵직한 두 권의 책을 책상 위에 쌓아보았다. 한 손에 잡히지가 않는 이 두꺼운 책을 약 2주에 걸쳐 짬 날 때마다 읽어왔다. 무언가 해냈다는 약간의 뿌듯함도 느끼며, 모두 잠든 캄캄한 밤, 홀로 스탠드 불빛 아래 앉아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과연 도스토예프스키는 1,000페이지에 달하고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한 이 장편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가 백치라고 불리는 상황은, 내가 사전적 정의로부터 예측한 것처럼

그렇게 모욕적이진 않아 보였다.

소설에서 ‘백치’로 설정된 주인공의 이름은 레프 니꼴라예비치 미쉬낀. 그는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서, 나이 스물 일곱의 젊은 공작이다. 그가 백치라고 불리는 상황은 내가 사전적 정의로부터 예측한 것처럼 그렇게 모욕적이진 않아 보였다. 공작 스스로도 그 사실을 스스럼없이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는 간질병을 어릴 적부터 앓아왔다. 언제든 발작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릴 적 그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훌륭한 귀족이 공작을 돌봐주기 시작하면서 그는 간질병으로 인해 얻은 백치라는 딱지에서 조금씩 해방 받게 된다. 그는 최근 약 3년간 스위스에서 요양 겸 치료를 받다가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재정을 지원해줬던 귀족이 죽었기 때문이다), 반강제적으로 러시아로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이 소설은 그가 러시아로 돌아오는 길, 기차 안에서 시작된다.

이 ‘기차 안’이라는 공간은 소설의 도입부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비극적 결말을 가져오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는, ‘빠르펜 세묘노비치 로고진’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로고진은 공작과 같은 연령대였으나, 상인 집안 출신으로서 신분이나 교양, 혹은 배운 지식으로는 미쉬낀 공작과 비할 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 사는 눈치 만큼은 누구보다도 예리하고 빨랐으며, 어떠한 일도 저지를 수 있는 위험한 청년이었고, 게다가 곧 막대한 돈을 상속 받을 예정이었다.

남들 앞에서 내세워 보일 만한 건, 비록 몰락했지만, 그나마 귀족 출신이라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미쉬낀 공작과, 믿을 건 돈 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 같고 실제로 돈의 힘을 빌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살아가는 인간 로고진과의 대비는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책에서 의도한 중요한 설정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설정이 비록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할지라도, 이건 표면적이라고 봐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그러한 대비 이면에 더욱 중요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신분이나 돈의 유무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차이는 다름 아닌, 공작이 로고진과는 달리 ‘백치’라는 점에 있다.

그렇다. 저자인 도스토예프스키는 로고진이라는, 즉 공작과 대비되는 인물을 통해 '백치'에 씌어진 부정적인 의미를 해체하고, 대신 순수한 인간성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과정을 통해 '백치'의 역설적인 승화를 이루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공작이 가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 그 때묻지 않은 감성과 지성. 비록 바보처럼 어수룩하게 보여, 소위 시대의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경우'에 맞지 않는 말과 생각, 행동을 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상하다는 시선도 곧잘 받지만, 결국 사람들은 공작에게 찾아와 진심을 털어놓고 고민을 얘기하며, 공작이 사실은 전혀 백치가 아니라 오히려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임을 마음 속 깊이서부터 인정하게 되지 않았던가.

이 책을 읽고 어른들 (소위 상류계층의 사람들이나 지식인들을 모두 포함)의 지혜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다시 물어본다. 세상의 지혜는 그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나 온갖 미디어를 통하여 몇 수 앞을 내다보라고, 그래야만 남을 밟고 설 수 있다고 우리들을 부추긴다. 그러나 그 듣기 좋은 말들의 향연도 모두 이 세상이 피라미드 경쟁체제라는 대전제를 바탕으로 하여 살아남는 방법에 관한 것들이다. 내가 살기 위해선 누군가가 죽어야만 하는 시스템. 이런 피비린내 나는 시스템에서 살아남는 자가 과연 가장 강하거나 가장 지혜로운 자일까. 사람이 아프면 그것에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거나 아무 계산 없이 도와주려는 마음이 고작 유아적인 행동으로 치부되고 말아야만 하는 것일까.

철저한 이해타산적인 계산을 진행하여 나 이외의 모든 타자를 내가 중심인 체스판 위에 올려놓고 넘어서거나 제거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여기며, 또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면서 은밀하게 타자를 속여서 이윤을 얻어내는 것이 과연 지혜자의 모습일까. 과연 시대의 '어르신'들이 공들여 쌓아놓은 'norm'에 따라, 그것의 도덕적 가치나 정의로움을 따져보지도 않고, 맞춰 살아가는, 소위 '처세술'이 지혜의 다른 이름일까. 만약 그것이 지혜라면, 어찌 지혜의 열매가 타자를 배제하고 차별하며 살인까지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행위를 낳는단 말인가. 그래 놓고도 과연 그것이 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참지혜란 피라미드라는 사탄의 체제를 해체하고, 모함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며 나와 타자의 수직적인 위계를 무너뜨리는 나라에 있지 않을까. 이 시대에, 시대가 정의하고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겐 참 지혜가 필요하다. 그 지혜는 지혜롭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보 같다고 무시 받고 천대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 책의 '백치'처럼 말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로고진은 결국 '나스따시아 필리뽀브나 바라쉬꼬바'를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살인자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징역을 가게 된다. 주어진 로고진의 캐릭터를 고려할 때 그리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 뜻밖인 첫 번째 사건은 공작이 살인자인 로고진을 나무라지도 않고 죽은 몸이 된 나스따시아와 함께 로고진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이었다. 두 번째는 공작이 다시 백치가 되어 스위스로 보내지게 되는 부분이었다. 그는 스위스로 보내지기 훨씬 이전 상태로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다시 스위스에서 공작의 치료를 맡은 슈나이더 교수는 공작의 지능 조직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넌지시 알리기까지 했다.

첫 번째 사건은 공작의 순수함으로 설명이 대충 가능하다. 무리가 좀 있지만, 살인자까지도 품는 마음으로 해석도 가능하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어린애처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그냥 얼어버렸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사건은 내게 안타까움을 안겨주었다. 참지혜로 대변되는 백치가 결국엔 참지혜인 척하며 지혜의 자리에 앉은 어른들의 norm에 의해 결국엔 꺾여버린다는 의미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작은 예빤친 장군 가족들을 비롯한 여러 주위 사람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주었겠지만, 결국 공작은 희생당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공작의 백치가 모든 사람에게 전염이 되어 norm을 해체하길 바랐던 나의 소망은 굳이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 예수가 로마의 속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의 마음이나,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죽지 않고 뛰어내려 결정적인 순간에 상황을 단번에 전복시키길 기대했던 사람들의 바람과 한낱 같은 맥락이었을까.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인간을 좀 더 알아간다.

어떻게 인간 심리를 문학 작품에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진행시키다 보니, 처음에 내가 물었던 질문, "왜 저자는 백치라는 제목을 사용했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그래서 난 다시 묻는다. 과연 누가 백치였던가. 등장인물 소개에서도 버젓이 미쉬낀 공작이 백치라고 나와 있었지만, 어쩌면 그것이 저자 도스토예프스키가 파놓은 함정이 아니었을까. 공작이 아닌 나머지 모든 사람이 바로 진짜 백치 아니었을까. 인간 심리를 철학자나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들보다도 더 세밀하게 파악하여 그것을 소설에 모두 녹여낸 도스토예프스키. 그 유명한 철학자 니체도 그를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였다고 고백하지 않았었던가.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인간을 좀 더 알아간다. 어떻게 인간 심리를 문학 작품에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다. 그의 작품 중 읽을 책이 읽은 책보다 아직 훨씬 많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오히려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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