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만희] 그분은 여기에 없다
[박만희] 그분은 여기에 없다
  • 박만희
  • 승인 2019.04.22 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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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희 전도사의 설교 - 누가복음 24장 1-12절
김동문
김동문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말에 대해 조금 민감해지면서, 좋은 용어인데도 잘 쓰지 않게 된 말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를테면 긍정이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긍정의 힘』이라는 신앙서적이 나온 후로 저는 그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용어 자체는 나쁜 뜻이 아닌데 좋지 않은 방식으로 쓰일 때가 많아서 저는 잘 안 씁니다. 그런 단어가 최근에 하나 더 늘었습니다. ‘승리’라는 말입니다. 단어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만, 그 용어만 나오면 꼴도 보기 싫은 얼굴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사실 ‘승리’라는 말은 이 맘 때가 되면 교회에서 자주 언급하는 단어입니다. 부활절이기 때문인데요. 우리는 부활을 이렇게 설명하거나 이해합니다. 죽음을 ‘이긴’ 사건이라고 말이죠. ‘이김’을 근거로 우리는 ‘승리합시다.’라는 인사를 자주 나눕니다. 죽음을 이긴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을 이기며 살자는 격려이니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다만 ‘이기자’는 메시지가 부활과 관련한다면, 무엇을 이기자는 건지는 더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대관절 우리가 이기려는 세상은 뭘까요. 뭐가 됐든 이기기만 하면 그게 부활이 주는 승리인걸까요.

복음서가 각각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부활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부활 사건을 들려줍니다. 네 권의 복음서는 부활을 예수님이 살아난 모습을 보여주고 그것을 ‘진짜’라고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겼다는 메시지가 중앙에 자리 잡은 건 분명하지만, 복음서 기자들은 결코 그것은 손쉬운 승리나 영광스러운 빛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장 깜깜한 암흑과, 죽음의 공간인 무덤에서부터 조심스럽게 부활 이야기를 써내려갑니다. 무턱대고 승리나 기쁨으로 달려가지 않고 의심과 회의라는 어두움 속에서 서서히 빛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을 따라, 더듬거리더라도 손을 내밀어, 부활이 전해주는 소식을 만져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은 물론 예수님이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사건이지만, 그 이야기 주변을 들여다보면 여러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빈 무덤이었을까요? 사람들이 찾아온 바로 그때, 딱 살아나시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텐데, 왜 복음서들은 하나같이 무덤이 비어있었다고 말할까요. 부활이 사실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빈 무덤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복음서 기자들은 빈 무덤을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Van Eyck, Three Maries At The Tomb
Van Eyck, Three Maries At The Tomb(1420?)

왜 여인들이었을까요. 복음서는 부활의 첫 소식을 여인들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부활의 사실성 문제가 더 중요하다면 이 역시 좋은 방법이 아니죠. 왜냐하면 여인들의 말은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증거로써 효력이 없습니다. 구약성서에서부터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 ‘두 세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증인으로써의 효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두 세 사람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인들이 전한 소식을 제자들은 믿지 않습니다. 물론 여인들이라서가 아니라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믿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후대를 위해서라도 여인들을 첫 증인 삼은 일은 부활 증명에 불리할 건 뻔합니다. 그럼에도 복음서는 첫 번째 증인이 여인들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이 두 가지가 부활 사건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만, 3년 전에 나눈 적이 있어 우선은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 두 가지 말고도 질문은 아직 남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시신에 무덤에 간 여인들은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했을까요. 우리는 그들이 당연한 일을 하러 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생각해보십시오. 해가 뜨기 전 가장 깜깜한 시간에 무덤에 가는 겁니다. 죽은 지 사흘 지난 시신에 기름 바르러 가는 겁니다. 겁나지 않았을까요. 무엇보다 무덤을 가로막은 큰 바위는 어떻게 하려고 했을까요. 본문 2절은 무덤에 돌이 굴려져 있었다고 지나가듯 말합니다만, 마가복음에서 그들은 무덤으로 향하면서도 걱정하며 서로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돌을 치워줄까?’라고 말이죠. 아무런 대책도 없었던 겁니다. 막힌 줄 알면서도 가는 겁니다. 답을 모르는데도 가보는 겁니다. 이게 부활 사건의 시작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무덤을 가로막은 거대한 바위, 기름과 걱정을 품에 안고 무덤으로 향하는 비천한 여인들. 이게 부활의 첫 이미지입니다. 빈 무덤이라는 답을 미리 생각하지 않는다면 시선을 거두고 싶은 이미지입니다. 넘지 못할 거대한 장벽이 막아서고 있을 뿐이니까요. 무덤 앞을 막아서고 있을 큰 바위는 그 자체로 죽음을 뜻하는 은유일겁니다. 거기가 자기 자리인 듯이 버터고 섰을 큰 돌은 우리를 돌아서게 하는 거대한 벽을 뜻할 겁니다. 당신은 이 뒤로 넘어갈 수도 없으며, 궁금해 할 필요도 없으니 돌아가라는 무언의 압력일겁니다. 어쩌면 출발조차 못하게 하려는 막강한 이미지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그 큰 바위가 예수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고 은연 중 확신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이미 죽었고 우리는 그를 보거나 만질 수 없다는 회의를 품에 안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와 나 사이를 가로막은 거대한 바위 앞에서, 그가 우리에게 전한 말씀은 사실 아무런 힘도 의미도 없다고 이미 마음먹었는지도 모릅니다. 거대한 벽이 우리를 깔보고 조롱하며 허락한 인생만을 우리는 사는지도 모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돌을 굴려줄까요? 그런데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가 ‘나는 나의 길을 가야 하겠다.’고 말하듯, 어둡고 깜깜한 밤에 굳이 길을 나서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예수와 자신들 사이에 거대한 돌이 물샐 틈 없이 가로막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지 않을 수 없어 길을 나선 여인들이 있습니다. 여성 참석 불가인 줄 알면서도 마라톤에 참가했던 한 여인처럼 말입니다.

캐서린 스위쳐(Kathrine Switzer)라는 여성은 1967년 감독관 몰래 보스톤 마라톤에 참가합니다. 당시 여성은 마라톤 참가가 금지였기 때문입니다. 달리는 내내 그녀는 같이 뛰던 남성들로부터 따가운 시선과 방해를 받습니다. 급기야는 그녀가 여성이라는 걸 알게 된 감독관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번호표를 떼려고 하는 걸 뿌리치고, 캐서린 스위쳐는 42.195킬로미터를 끝까지 완주합니다. 출전 금지라는 장벽에도 불구하고, 목덜미를 잡아채는 감독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42.195킬로미터를 뛰었을 그녀의 심정을 저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남들 몰래 참가신청서를 내고, 출발 신호탄을 듣고 뛰기 시작한 그녀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새벽녘에 무덤을 향해 길을 나선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자신들 사이를 큰 돌이 가로막고 있으며,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길이 두려워 겁이 나면서도 기름을 품에 안고 무덤을 향해 가는, 비천한 이들이 있습니다. 어두움 속을 걷는 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예수를 향해 가는 그들을 위해 누가 돌을 치워줄까요. 아무쪼록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그들의 헛된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으며 ‘누가 우리를 위해 돌을 치워줄까’라고 말하며, 예수를 향해가는 대책 없는 바람과 쓸데없는 노력이, 부활의 빛을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돌문은 제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위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자리에 그것은 없었습니다. 꿈쩍 않고 닫혀있을 거라고 믿었던 돌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무덤에 대한 그들의 예상이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죽음에 대한 절망 섞인 앎에 균열이 생기는 겁니다. 부활은 어쩌면 어긋남이고 균열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여인들이 ‘부활’을 예상했던 건 아닙니다. 단지 숨이 끊어진 예수의 시신이라도 잘 보존하기를 바랐습니다. 무덤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 여인들은 부활을 떠올리지 않았을 겁니다. 당황하고 놀랐으며 두려웠을 겁니다. 혹,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훔쳐가거나 훼손했을지도 모르니 말이죠. 열린 문을 보고 황급히 무덤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더 당혹스러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예수의 시신이 사라진 겁니다. 그곳엔 시신 대신에 빛나는 옷을 입은 낯선 남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굳게 닫혀 있어야 할 돌문은 열려 있었고, 눕힌 채 세마포에 쌓여있어야 할 시신은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곳엔 죽은 자 대신 산 자가 있었고, 어두움 대신 빛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선생님 한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에도 인용한 적이 있는데 좋은 표현이라 다시 한 번 언급합니다. ‘있어야 할 것 없었고 없어야 할 것이 있었다.’고 말이죠. 닫혀 있어야 할 곳이 열려 있었고, 어둠 대신 빛이 있었으며, 죽음이 아닌 생명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무덤은 비어있었고 여인들의 예상은 뒤집혔습니다. 빈 무덤은 부활의 부실한 증거가 아닙니다. 빈 무덤은 말 그대로 무덤의 비어있음을 뜻하는 은유입니다. 부활은, 죽음이 자리하고 있어야 할 장소가 텅 비어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막강한 죽음에 대한 뒤집힌 예상, 죽음의 죽음, 희망의 갱신, 그것이 부활이 뜻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초청입니다. 굳게 잠긴 문이 열릴 테니 예수를 만나러 오지 않겠냐는, 그와 함께 장벽 너머로 가보지 않겠느냐는 초청입니다. 막힌 돌문이 열렸으니 들어오라는 목소리입니다. ‘돌아가라’는 장벽의 겁박에 굴하지 말라는 생생한 격려입니다.

미스터션샤인
미스터션샤인

쉬어가는 의미에서 드라마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제가 작년에 가장 재미있게 본 드라마가 있습니다. <미스터 션샤인> 인데요. 김태리는 물론이고 김민정, 변요한, 유연석 등이 맡은 역할이 다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드라마에 은근히 깔려있는 작가의 생각이었습니다. 로맨스나 민족주의로만 보기에는 아까운 섬세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는데요. 작가의 이전 작품인 <도깨비>에서부터 반복해 온 메시지가 있습니다. ‘살라’는 메시지입니다. 덧붙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라’는 내용입니다. <도깨비>에서는 드라마 후반부에 저승사자에게서 살짝 드러나는데,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에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그 주제가 한 번씩 반복될 때마다 은근하게 감동이 되는 까닭은 결코 삶을 만만하게 보고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살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라’고 말하죠. 우선 조심스러우면서도 짧고, 가볍지 않은 그 말이 주는 울림이 있습니다. 쉽고 값싼 희망을 말하지 않으니까요. 촌스러운 충고나 어줍지 않은 꼰대 질을 하지도 않습니다.

거기에 한 가지 태도가 더해집니다. 같은 작가가 쓴 <태양의 후예>에서 송혜교가 자신과 무관한 아이를 돕자, 송중기가 ‘뭐하러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그럼 세상이 바뀌느냐’고 묻자 송혜교가 이렇게 답하죠.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저 아이의 세상은 바뀌지 않겠느냐’고요. 그런 태도는 <도깨비>나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계속됩니다. 이병헌이 독립운동을 하는 김태리에게 ‘그런다고 조선이 빼앗기는 걸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묻자, 김태리는 이렇게 답합니다. ‘내가 조선이 망하는 걸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걸 뒤로 미룰 수는 있을 거라고’말입니다. 작가는 삶을 결코 낙관하지 않고, 깊은 절망감과 무력감을 잘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삶을 냉소하지도 않습니다. 비관에 빠지지 않으며, 반대로 쉽게 굴종하지도 않습니다. 작가는 각 인생을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세우고 끊임없이 질문하게 합니다. 사실 <미스터 션샤인>이야기만 해도 한참을 더 하고 싶지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본문에는 누가복음에만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무덤 안에서 만난 정체 모를 두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던지는 물음입니다. 5절 질문 부분만 읽어보겠습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다소 책망이 섞인 이 질문을 뒤집어 봅시다. 예수는 이제 여기 없다는 겁니다. 그는 무덤에 없습니다. 무덤이 망했습니다. 제 구실을 못하게 됐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부활은 일종의 선례입니다. 무덤이 장사를 헛칠 수도 있다는, 무덤이 망할 수도 있다는 선례입니다. 그것을 굳이 어려운 말로 하자면, 선취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의 갱신을, 죽음의 죽음을 한 걸음 앞서 몸으로 보여주신 사건이니까요.

그는 산 자들 중에, 삶 중에 있습니다. 이는 이상한 일이죠. 죽음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니까요. 그는 더 이상 시신 취급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시신이 어떻게 하면 더 잘 보존되고 깨끗하게 유지될지에 그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삶 중에 있습니다. 그는 ‘거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살자’고 말씀합니다. 나사로를 시신 취급하지 않으셨던 예수는 자신도 시신 취급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잘 닦이고 높임 받으며 축하받기를 바라지 않고,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배 끝에 부르는 노래처럼, 예수님은 삶이 어둡고 피곤에 지친 모든 이들에게 소식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의심과 절망으로 가득한 이들과 함께, 두려움과 괴로움 휩싸인 이들과 함께, 병들고 약해진 이들과 함께, 죽음에 이른 이들과 쇠잔은 이들과 함께, 다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오늘 함께 교독한 시편 말씀 중에도 비슷한 뉘앙스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산 자들 중에, 삶 중에 있습니다. 높고 높은 장벽이 우리에게 까불지 말고 ‘돌아가라’고 말할 때, 돌문이 우리를 가로막을 때, 그가 문을 밀어 열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요청하실 겁니다. 너희도 산 자들 중에 있어라. 그들 중에 있어, 너희도 누군가를 위해 돌문을 열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만을 기념하고 기뻐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철저하게 오늘, 우리를 향한 사건이고, 질문이며, 또 초대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더듬거리며 돌문 너머로 향하자는 초청이고, 이제 예수는 산 자들 중에 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자는 초대입니다. 더불어 이때 일어난 죽음의 죽음이, 망해버린 무덤의 소문이 누구에게, 어느 곳에 전해져야 하는지를 살펴보자는 독려입니다.

끝으로, 어제 설교를 마무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글을 읽고 마치려고 합니다. 미국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님의 글 중 일부입니다.

“부활절이 '연민과 연대의 절기'가 아니라, '승리주의적 절기'로만 칭송되고 기억되는 한, 부활절과 같은 기독교의 절기들은 예수 이름으로 예수정신과 삶을 배반하는 절기가 되어버릴 것이다. 예수는 장애를 지닌 사람들 곁에, 무슬림이라고 한국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배제당하고 있는 제주 난민들 곁에, 성소수자들 곁에, 거리의 노숙자들 곁에서 그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곁에 '함께 하는 존재'로서의 삶을 보여주었다. 예수가 보여준 희망의 근거는 '승리의 보장'이 아니라, 연민과 연대의 그 과정 자체속에 있다. 그 연민과 연대의 과정에서 설사 '실패'하여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말씀 마치겠습니다.

 

설교자 박만희는 신대원 졸업 후, 함께걷는교회를 개척하여 4년째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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