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 겸손해서?
예수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 겸손해서?
  • 김동문
  • 승인 2019.04.15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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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마지막 한 주 다시 읽기(1) -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
Louis Felix Leullier, The Entry Of Christ Into Jerusalem,
Louis Felix Leullier(1811-82), The Entry Of Christ Into Jerusalem,

종려주일, 거의 대부분의 교회나 많은 기독교인이 떠올리는 분문이 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입성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읽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익숙한 성경 읽기가 주는 아쉬운 대목입니다. 무엇이 아쉬운 점일까요? 먼저 성경 본문을 읽어봅니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21:2-3)...."

이르시되,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매여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11:2-3)

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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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30).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고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19:30, 31)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요한복음 12:14, 5)

 

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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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

여기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 또는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는 표현입니다.'매인 나귀', '매였다'는 것에() 주목하면 곤란합니다. 나귀 새끼의, '새끼'() 주목하는 것도 곤란합니다. 그것은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나귀는 집에서나 이동하지 않고 들에 머물 때, 양과 염소가 꼴을 여유롭게 뜯는 시간에,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매어두곤 합니다. 매인 나귀는 묶여 있는 나귀를 뜻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매인 나귀', 짐이나 사람을 싣고 다니는, 안장이 앉혀진 나귀입니다.

나귀 새끼는 물론 쉽게 생각하는 나귀의 새끼가 아닙니다. 나귀 새끼로 우리말로 풀이한 표현은 어릴 때는 한 살 많게는 4살 나귀까지를 일컫는 단어입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나귀 새끼는 새끼 나귀일 수도 있지만, 본문의 맥락이나 나귀의 얽힌 이해를 바탕으로 하면, 안장이 지워지지 않은 나귀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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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나 도시 안팎에서, 등에 안장을 지고, 짐이나 사람을 싣고 가는 나귀와 그 옆에 따라 가는 안장을 지지 않은 나귀를 볼 수 있습니다. '안장을 진 나귀''매인 나귀'를 뜻하고, 그 곁에 따르는 나귀, 어린 나귀는, 아직 사람이나 짐을 싣지 않은, 안장을 지지 않은 나귀를 뜻합니다. 나귀에 짐을 실거나 사람이 탈 때는 안장을 얹곤 합니다. 안장을 얹지 않고 나귀를 타는 것은 편하지 않고, 나귀를 탄 사람이 균형을 잡기도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 상황을 이해할 때, 안장을 얹지 않고 조랑말이나 말을 타는 것을 떠올려 봐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는 안장이 지워지지 않은 나귀를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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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을 진 나귀 곁에 안장을 얹지 않은 나귀를 곁에 따라 붙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나귀로 하여금 길을 익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전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매인 나귀 = 안장을 지운 나귀, 나귀 새끼 = 안장을 지우지 나귀로 다시 풀어볼 수 있습니다.

 

2. 권위, 권세, 나귀

고대 이집트 5왕조 Khuiwer 무덤 벽화(Erman, A. (1887) Ägypten und ägyptisches Leben im Altertum (Tübingen: Laupp). P.649.<br>
고대 이집트 5왕조 Khuiwer 무덤 벽화(Erman, A. (1887) Ägypten und ägyptisches Leben im Altertum (Tübingen: Laupp). P.649.

고대 이스라엘에서 나귀를 탄다는 것은 권위의 표현이었습니다. 왕이 즉위식을 하거나 행차를 할 때도 나귀를 탔습니다. 특별히 흰 나귀는 왕과 왕실의 소유였습니다. 마치 조선시대에 평민들이 가마를 타지 못하던 것처럼, 나귀는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바사(페르시아)의 황제조차도 나귀를 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황제 행차 시에 나귀를 타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마리의 나귀를 갖고 있는 경우는 수송 전용 나귀를 타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밭일도 하고 짐도 실고 사람도 태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태가 언급한 멍에 매는 짐승은 바로 이런 느낌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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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구약시대에, 고대 근동에서는 말은 아주 귀한 군수용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나 바벨론, 페르시아 같은 대제국이 아니면 말 자체를 소유하거나 일상생활에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왕이 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출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전쟁으로 돌아오는 길이 아니라면, 말을 타고 행차를 한다거나 즉위식을 치루는 풍경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겸손하여 나귀새끼를 타신 것이 아닌가?’ 이 질문을 저도 갖고 있었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유교, 동양문화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우리말 성경에는, '예수님이 겸손하다'는 것과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셨다'는 것이 인과관계, 상관관계가 있는 듯 적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일부 오해가 담긴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과 연결한 구약 본문은 스가랴 99절입니다. 이렇게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집트 중왕국 베니하싼 무덤 벽화 중 "이집트를 찾은 아시아계 민족" 이 나귀에 짐과 아이를 실고 있다.(P.E. Newberry(1893), Beni Hasan I. Archaeological Survey of Egypt (London: Kegan Paul)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신다! 1) 그는 공의로우시다. 2) (그는) 구원을 베푸실 수 있다. 3) (그는) 가난하시다. 4) (그는) ()나귀를 타신다, 5) ()나귀 새끼, 어린 ()나귀를 타신다." 3)4)는 인과관계 즉 가난하셔서, 겸손하셔서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이라고 보기보다, 상호 무관한 독립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조금은 더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의 인용 구절도 겸손’ + ‘나귀를 탐을 인과관계로 볼 수는 없습니다.

Carle Vernet, Detail of The Triumph of Aemilius Paulus(1789)
Carle Vernet(1758~1836), Detail of The Triumph of Aemilius Paulus(1789)

 

3. 황제의 입성과 예수의 입성

로마 황제가 그가 정복한 도시에 입성하는 장면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이 겹쳐집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은 황제의 입성식 따라하기, 코스프레에 해당합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이 기획한 것이기 보다, 예수를 맞이하는 무리의 연출인 듯합니다. 이것은 로마의 황제권에 도전하는 사회적 정치적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도시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 즉위했음을 백성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Pedro de Orrente(1580~1645),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162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은, 모든 것이 완전한 왕 즉위식, 자기의 땅에 입성하는 그림 언어로 가득합니다.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타고, 새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새 예루살렘의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로마 당국과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 권력자들이 느꼈을 긴장감과 분노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온 사방으로 유월절을 맞이하기 위해 몰려든 이스라엘 백성은 적잖이 흥분하고 설레었을 분위기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새끼 나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식의 본문 해석과 설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을 다소 유교적이거나 모호하게 풀이하는 것도 아쉬운 해석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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