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택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 이택환
  • 승인 2019.04.14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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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빌 2:5~11

몇 년 전 우리 교단 총회가 나름 강력하게 교회성장운동을 추진한 적이 있습니다. 예전처럼 개교회 중심 성장이 아닌, 큰 교회와 작은 교회, 대도시 교회와 농어촌 교회가 함께 성장하는 소위 ‘교회동반성장운동’입니다. 가령 큰 교회가 인력이 모자라는 작은 교회에 반주자, 교사, 사역자 등을 파송하고, 작은 교회의 낡은 시설들을 수리해 주고, 대형교회의 유휴공간을 작은 교회들이 활용할 수 있게 하는 등, 다양한 실천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도 흐르고 총회장도 바뀌어서 그런지, 요즘은 조용해진 감이 있습니다.

도널드 맥가브란, 교회성장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2017년
도널드 맥가브란, 교회성장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2017년

교회성장운동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성장 하면 먼저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nderson McGavran)의 교회성장학을 떠올리게 되는데, 맥가브란은 1923년부터 1954년까지 31년간 인도 선교사로 일하면서, 선교 현장의 사례와 경험을 통해 어떤 교회들이 성장하고 어떤 교회들이 그렇지 못한가를 연구했습니다. 1930년대에 그는 인도에서 80여 명의 선교사와 함께, 다섯 개의 병원, 여러 개의 학교, 그리고 나병환자촌 등을 두루 운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해의 기록을 보니까 수많은 선교비가 투입되었음에도, 겨우 교인 52명이 증가했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 맥가브란은 새로운 선교전략의 필요성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교회 성장과 관련된 실제적인 연구를 위해, 과거의 기록들과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고, 통계와 도표 사용하는 등, 사회학적 분석을 적용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교회성장의 성과를 거두었고, 그가 정리한 내용이 교회성장학이라는 하나의 체계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성장학의 아버지 하면, 다들 도날드 맥가브란을 거론합니다.

신대원 시절 목회 실습 강사로 오신 분 중에, 맥가브란을 자주 언급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가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이 말하는 ‘동질성의 원리’를 따라, 교인들 가운데 금융인들만 따로 모아 하나의 그룹을 만들었더니, 그 모임이 스스로 부흥 성장하더라는 것입니다. 또 맥가브란의 ‘수용성의 원리’를 따라, 목회자가 수용성이 낮은 사람들(소위 목회자 말을 잘 안 듣는 성도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수용성이 좋은(목회자 말 잘 듣는) 성도들을 중심으로 목회를 해야, 목사가 행복하고, 교회도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 교회가 초대형교회로 성장한 것 같습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장한 면이 있지만(당시에는 교회가 천막만 쳐 놓아도 부흥), 80년대 중반부터는 교회가 이런 교회성장학의 가르침을 따라 인위적으로 성장한 면이 있습니다. 가령 교회 성장학에 “5P”라는 게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1) Power, 성령의 파워, 즉 성령운동을 강력하게 추구하는 교회. 2) Pastor, 유능한 담임목사. 훤칠하고, 박사 학위도 있고, 무엇보다 설교를 잘함. 3) People, 물심양면으로 헌신된 성도들. 4) Parking rot, 교회 건물도 중요하지만 주차장이 관건. 5) Program, 제자훈련, 열린 예배, 아버지학교, 태신자 전도, 이슬비 편지 등 교회의 유력한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우리교회는 꽝).

그러한 교회성장 운동에 발맞추어 우리 교단도 1992년부터 2012년까지 20년간, 소위 ‘만사운동’이라는 것을 전개했습니다. 20년 안에 일만 개의 교회와 4백만 명의 성도들을 만든다는 야심찬 운동이었습니다. 그 결과 목표에는 미달됐지만, 교회가 64.6% 성장하여 8,500여개, 교인 수는 43.3%가 증가하여, 280여만 명이 되었습니다. 나름 대단한 성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사운동의 중요한 정책이었던 교회 분립을 통한 교회개척은 사실상 실패로 드러났습니다. 다만 그 사이에 목회자의 숫자가 워낙 급증하여, 그들 가운데 개척한 교회 숫자가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만사운동이 마감되던 2012년에는 교세가 처음으로 감소했습니다. 이후 교세는 매년 줄어들어, 2012년부터 2017년까지 5년간 우리 교단 교회 성도들이 10만 명이 줄었습니다. 1천 명 규모의 교회 100개가 사라진 셈입니다. 총회에서 전국 교회를 대상으로 실수조사를 해 보니, 교회학교가 없는 교회, 청년부가 없는 교회가 수두룩하고, 가나안 성도의 증가로 한국교회가 총체적인 위기에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교단 총회가 부랴부랴 새로운 교회동반성장운동을 벌이게 된 배경입니다.

아쉬운 것은 당시 자료에는 한국교회의 교세가 왜 이렇게 급감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반성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기껏, 교회가 한국사회의 급격한 사회변동에 적절하게 따라가지 못한 점, 출산율 하락에 따른 교회학교의 자연감소, 다음 세대에 신앙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점 등을 그 이유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태서 한국 교회의 이미지 실추를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한국 교회가 과연,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있는지 심각하게 반성해야 옳았을 것입니다.

오늘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바울은 교회가 누구에게 언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늘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교회 안의 성도들 사이에 적용하라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단지 교회 안에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끼리 잘 지내라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신 게 아니지요. 바울 역시 그저 교회 성도들이 사이좋게 지내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게 아닙니다. 복음은 언제나 그 끝이 세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모르페 데우)라고 말합니다. 그분이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강탈하지) 아니하시고(그러나 아담은 그것을 강탈 함),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모르페 둘루, 종의 본체)를 취하시어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겸손한 마음,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 이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오늘날 과연 그러한 겸손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 그 신실함이 있는가?

오히려 종종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려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오늘날 과연 그러한 겸손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 그 신실함이 있는가? 오히려 종종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려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지 않을까요? 그것은 성경해석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에 대한 교회의 모든 해석이 100% 하나님 말씀은 아닙니다. 교회는 유한하며 실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경 해석은 더 나은 해석이 나오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또 바뀌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자신의 해석을 바꾸는 것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는 것처럼 여긴다면, 그것은 교회가 곧 하나님 노릇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한국 교회에 그런 류의 교만함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교회가 성경을 해석한 것을 근거로 남녀를 차별합니다. 오늘날 여성이 진출하지 못하는 분야는 거의 없습니다. 의사도 판사 변호사도, 정치인, 기업가 중에도 여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교회에서는 여전히 여성들이 목사/장로 되는 것을 금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5천 500만 광년이나 떨어진 블랙홀을 관측하는 이 시대에, 아직도 우주의 역사가 1만년 이내라고 믿는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역시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때는 교회가 주 5일제도 반대했습니다. 성경이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제 7일에 쉬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지금도 많은 교회가 성경말씀을 따른다며, 성소수자들을 정죄합니다. 그들에게 직분을 주지 못하게 하는 교회, 세례를 주지 못하게 하는 교회, 아예 교회 밖으로 추방시키는 교회까지 있습니다. 남북 교류를 빨갱이 정부의 북한 퍼주기라고 반대하는 교회, 타종교인들을 우상숭배자로 규정하고, 심지어 가톨릭까지 마리아 숭배행위로 몰아붙이는 교회, 여기에는 교회가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선악간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자 하는 아담의 교만이 있습니다.

그동안 교회가 이런 일들을 워낙 많이 해왔기에, 우리 사회에서 좋은 이미지를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이웃을 위해 가장 많은 봉사를 하는 종교는 불교도 가톨릭도 아닌 개신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이웃에게 겸손한 이미지, 친근한 이미지, 섬기는 이미지를 구축하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교회가 자신을 내어주기보다 오히려 챙기려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도 목사들이 퇴직금에 대해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꼼수를 부리는 것 같습니다. 국가가 내지 말라고 해도 목사들이 정당하게 내겠다고 해야 할 판인데, 국가가 종교를 탄압한다며 꼼수를 부리는 목사들을 누가 존경하겠습니까?

어떤 교회는 모든 지역주민이 찬성하는 재개발을, 교회만 반대해서 그 지역 전체의 재개발을 묶습니다. 교회가 보다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기 위해, 지역 주민들과 구청을 대상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죠. 어떤 초대형교회는 교회 행사를 위해 지역 초등학교, 중학교의 학사일정을 교회에 맞추도록 압력을 넣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정계 유력 인사들을 동원해, 불법으로 공공 도로를 점용하고, 지하철 입구를 교회와 연결하는 등, 각종 특혜를 얻어내는 교회도 있습니다. 초대형교회 담임목사가 일정한 자격을 갖추지 못하자, 노회와 신학교까지 나서서,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해준 적이 없는 급조된 자격증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스스로 능동적으로 자신의 영광을 높이기에 급급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늘 위와 땅, 그리고 땅 아래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수동태로 된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스스로 능동적으로 자신의 영광을 높이기에 급급합니다. 그 결과 각 교단별로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교회들이 즐비한 한국교회가 어느덧 만인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 큰 교회들마저 텅 비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아쉽지만 우리 교단이 교회성장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맥가브란의 할아버지가 온다 해도,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지금은 교회가 성장에 초점을 맞출 때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때입니다. 교회가 굳이 성장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모든 교회가 반드시 품고 있어야 할 DNA가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지요.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시는 겸손과, 이웃을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 우리교회부터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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