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지금은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가 되면
[곽건용] 지금은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가 되면
  • 곽건용
  • 승인 2019.04.14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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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의 설교 -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17(고린도전서 13:8-13)

‘어떤’ 하느님을 믿을까?

오늘은 작년 11월 말에 시작해서 장장 넉 달 동안 이어진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시리즈 설교를 마무리하는 날입니다. 아직까지 시리즈 설교를 여러 번 했는데 이번처럼 길게 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작년 가을 고국방문 때 순천중앙교회 홍인식 목사님이 스페인의 해방신학자 호세 마리아 마르도네스의 책을 번역했다며 제게 선물한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나님 죽이기>를 읽고 내용이 좋아서 그 책을 기반으로 해서 설교하기로 작정하고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설교하지는 않았습니다.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고 저자의 생각과 다른 경우에는 제 생각을 얘기했습니다. 책은 모두 여덟 개의 소주제를 다루는데 저는 그 중에서 ‘멀리 있는 하느님에서 가까이 있는 하느님으로’라는 소주제는 내용이 다른 소주제들과 겹치므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첫 날은 서론격의 설교를 했고 그 다음에는 한 소주제를 두 번에 걸쳐서 다뤘는데 한 소주제만은 세 번에 걸쳐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으로 마무리하는 설교를 하게 된 겁니다.

첫날 서론격의 설교에서 저는 영화 <사이다 하우스 룰스>에 나오는 “믿을 거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게 마련이니까(People believe what they want to believe).”라는 대사와 캐나다연합교회가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밝힌 목사를 사임시키지 않고 교인들의 뜻에 따라서 계속 목회하도록 허락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믿고 안 믿고 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어떤’ 하느님을 믿는가 하는 점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존재 여부를 두고 논쟁하고 다투지만 하느님은 ‘존재’라는 범주 안에 넣을 수 없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를 따지는 것은 하느님에 관해서는 의미 없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는 쉽지 않지만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면 삶 전체가 바뀔 수 있다는 얘기도 했지요.

첫 번째 소주제 ‘공포의 하느님에서 사랑의 하느님으로’에서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지만 연약하고 불안정한 존재인 인간이 갖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종교가 어떻게 악용해왔는지를 얘기했습니다. 마르도네스는 종교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이 갖고 있는 실존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듯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종교의 기원은 인간이 삶의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데서 비롯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와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선언하는 요한일서는 종교의 의미에 관해서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소주제 ‘간섭하는 하느님에서 지켜보는 하느님으로’에서는 기독교가 말하는 하느님의 ‘섭리’는 하느님이 인간사에 꼬치꼬치 이래라저래라 간섭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세상만사가 하느님이 미리 정해놓은 대로 일어난다면 우리는 인형이나 로봇과 다를 것이 없을 터이고 더 나은 삶을 위한 우리 인간의 노력도 무의미합니다. 어차피 하느님이 하시는 일인데 우리가 뭐라고 이래라저래라 하겠나 말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방법은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는 얘기를 하면서 하느님은 스스로 당신의 다리 하나와 사람의 다리 하나를 묶고 함께 달리는 ‘이인삼각’의 방법으로 인간사에 개입하신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자유롭고 뭐든 홀로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이 스스로를 묶어 사람과 나란히 걷기로 하셨습니다. 이와 동일한 얘기를 마르도네스는 ‘창조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어서 그 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결과적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희생에서 생명으로, 강제에서 자유로

세 번째 소주제 ‘희생의 하느님에서 생명의 하느님으로’에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는 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 죄를 위한 희생의 죽음으로 보는 신학은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반드시 누군가를 죽여야 죄를 용서해주는 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인류의 죄를 없애기 위한 희생양으로 해석하는 이해는 오랫동안 짐승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전통을 유지해온 유대인들에게는 낯익지만 그런 전통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고 따라서 거기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해석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과적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죽음이 됐든 뭐가 됐든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게 아니란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이 전하는 대로 세상에 생명을 주되 풍성하게 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악한 세력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써 죽음이 아닌 생명을 누리는 것이 모든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궁극적인 의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네 번째 소주제 ‘강제의 하느님에서 자유의 하느님으로’에서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자신의 뜻을 강제해서 실행하게 하는 분, 그러니까 자신의 계명을 사람에게 부과해서 싫든 좋든 지키게 만드는 분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동의하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뜻을 강요하는 분이란 얘기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순종’이라고 부드럽게 말하지만 싫든 좋은 하느님이 하라고 하니까 행한다는 의미이므로 ‘강제’라고 불러도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 생각의 밑바닥에는 ‘원죄’ 교리가 깔려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모든 사람은 타락한 죄인이므로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강제당하는 게 마땅하다는 겁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고 말하고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큰 아들 얘기를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허랑방탕하게 쓰고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동생을 환대하는 아버지에게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복종’한 자기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지 않았던 아버지가 탕자 동생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냐고 말입니다. 저는 이때 아버지의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라는 대답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가진 것이 모두 자기 것인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 뿐 아니라 아버지가 누리는 자유도 모두 자기 것인 줄 말입니다. 아버지가 누리는 자유를 우리도 누릴 자격이 있고 아버지가 갖고 있는 속성을 우리도 갖고 있는데 우리는 그걸 모르고 ‘복종’만 강조해왔던 겁니다.

다섯 번째 소주제는 ‘개인의 하느님에서 연대의 하느님으로’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 둘의 구별은 지금은 별 의미가 없고 다만 각자가 거기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그 길을 가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게 맞습니다. 저는 ‘개인’(individual)이란 개념은 근대와 더불어 등장했다고 얘기했고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이 정신>에 대해서도 얘기했으며 해방된 노예인 히브리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끌다 약속의 땅을 코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한 모세 얘기를 하면서 신앙은 어떤 일을 내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남의 눈으로도 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 가운데’(among you) 있습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마 이 설교에서 여러분은 이런 얘기들보다는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바이올린을 패대기쳐서 부숴버린 얘기가 더 기억에 남아 있을 겁니다.

그 다음 여섯 번째 소주제로 ‘폭력의 하느님에서 평화의 하느님으로’를, 일곱 번째 소주제로 ‘홀로 있는 하느님에서 함께 있는 하느님으로’에 대해 얘기했는데 이것들은 비교적 최근에 다뤘으므로 요약하지 않겠습니다.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 가진 의미는?

이번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줄곧 가졌던 생각은 ‘하느님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삶의 방향을 결정짓기도 하고 삶 전체의 의미 및 가치와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허무한 질문이기도 한 이 질문, 곧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가진 의미는 대체 무엇이냐는 겁니다. 저는 물론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가 삶의 방향과 의미, 가치를 결정짓는다고 믿는 편에 속합니다. 종교라는 것은 기나긴 인간의 진화의 과정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정신활동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우리 사람의 삶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리적 세계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보거나 듣거나 만질 수 없는, 그리고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다른 세계와 연관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얘기하지만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이므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하는 모든 생각과 말들은 시각장애자가 코끼리 만지기 식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하느님의 극히 일부분이고 그나마 손으로 더듬거리며 만지는 식이므로 하느님에 관한 모든 얘기는 주관적이고 부분적이며 간접적이고 은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시각장애자가 코끼리 전체가 어떤 모습일이 모르듯이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모릅니다. 내가 만지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고 또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알더라도 전체적으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인간은 오랫동안 하느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그렇게 고백해왔습니다. 하느님을 사람처럼 생각해왔다는 겁니다. 요즘 신학계에서는 하느님을 인격체로 여기는 생각에 문제가 많다고 해서 다른 식으로 생각하는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느님은 지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초래되는 폐해가 크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인격적인 분이란 생각을 버릴 수 없는 이유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소통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인격체로 믿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소통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상상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든지 하느님을 인격체로 은유하는 생각을 쉽게 바뀌지 않을 겁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

그런데 인격적인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생각할 때 생각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은 ‘섭리’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삶을 당신의 계획대로 이끌어 가시고 미주알고주알 꼬치꼬치 참견한다는 생각을 어떻게 떨쳐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내가 하느님에게 드리는 ‘기도’는 무엇이고 왜 기도를 하며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겁니다. 이 시리즈 마지막으로 이 얘기를 하겠습니다. 과거 오랫동안 사람은 하느님을 저 먼 하늘에서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고 감시하며 통제하고 리모컨으로 원격조종하는 분으로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와서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하느님은 저 먼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삶속에서 깊숙이 들어와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기에 멀리서도 우리네 삶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기보다는 우리 삶속에 들어와 계시기에,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네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주목을 받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는 것처럼 70억이 넘는 사람이 서로 자기 기도를 들어달라고 아우성치는데 하느님으로 하여금 내 기도를 들으시게 하려면 정성을 다해 긴 시간 매달리든지 아니면 고래고래 소리를 쳐서라도 하느님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게 아니란 얘기입니다. 하느님은 내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기도가 하느님 귀에 들리게 하려고 소리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바울도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기도는 내 안에 있는 나의 자아와 역시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노력입니다. 하느님을 나의 자아로 끌어당기든지 아니면 나의 자아가 하느님께로 다가가서 그 거리를 좁히는 일, 우리에게 더 익숙한 용어로 말하면 나와 하느님을 일치시키는 일입니다.

그럼 하느님은 내 안에만 계시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하느님에게 ‘존재’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느냐 밖에 계시느냐의 구분 역시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함으로써 동시에 하느님과 나에게 말하는 겁니다. 자주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나에게 자주 말을 건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나에게 말을 건다는 얘기가 익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가는데 그 중에 정작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 얼마나 됩니까.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는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청원기도’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청원기도는 하느님에게 뭔가를 달라고 요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청원기도를 하며 살아갑니다. 오늘도 우리는 공동기도문으로, 또는 각자 드리는 개인기도 순서에서 청원기도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가리켜 ‘기복신앙’에 매몰되어 있다고 비판합니다. 늘 뭔가를 달라고 하느님께 빈다는 겁니다. 저는 청원기도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믿습니다. 청원기도를 하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청원기도를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할 겁니다. 사람들이 기복신앙이라고 비판하는 이유는 첫째로 그렇게 청원하는 것이 물질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 탐욕에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갖고 또 가져도 끝없이 달라고 청원하기 때문이란 얘기입니다.

하지만 청원기도 그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그 기도를 하느님에게만 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한다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청원기도를 하느님과 나 자신에게 동시에 하게 되면 나는 내가 청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내가 이것을 청원하는 게 옳은지, 옳다면 누구에게 도움이 되고 복이 되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때 청원기도는 하느님을 움직이려는 시도인 동시에 나 자신을 움직이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나 자신이 이인삼각으로 함께 걷는 것이 기도이고 신앙생활을 핵심임을 새롭게 다짐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으로 장장 넉 달 동안 이어져온 ‘내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시리즈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다음 주일 종려주일과 그 다음 주일 부활주일을 지낸 다음에 또 어떤 시리즈로 여러분을 만나게 될지 저도 기대가 큽니다. 여러분도 기대를 갖고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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