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 “배운다, 고로 존재한다 (I learn, therefore I am).”
[김영웅의책과일상] “배운다, 고로 존재한다 (I learn, therefore I am).”
  • 김영웅
  • 승인 2019.04.1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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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배움에 관하여, 동녁, 2017년
강남순, 배움에 관하여, 동녁, 2017년

정착이 가져다 주는 안정감이 있다. 떠남이 일상이 된 나그네의 비애는 보장된 내일이 없다는 안정감의 결여다. 하지만 여기서 ‘안정감’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안정감이란 것은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안정할까?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독특하게 구별되는 이유를 한 문장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인간은 결코 육체적인 필요 (이를테면 의식주 문제)가 채워지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평생 욕구불만족 상태로 살아가는 비극적 운명을 지닌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을 수 있는 지구상 유일한 생명체이기도 하다. 즉, 인간은 육체적 필요 충족을 위해 피땀을 흘리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다른 생명체완 달리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은 그 너머를 생각한다. 학습하지 않아도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묻고, 삶의 의미를 찾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미래를 미리 내다보길 원한다. 

안정감은 다분히 심리적인 용어이지만, 인간이 삶에서 느끼는 안정감은 주로 육체적 필요가 충족된 결과로 나타나는 일시적인 감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안정감은 결코 안정하지 않은 셈이며, 따라서 정착민의 안정감은 인간이란 존재가 다다라야만 하는 목적지가 아닐 수도 있다. 동시에 정착민의 안정감이 결여된 나그네의 삶도 함부로 잘못되거나 빗나간 목적지라고 규정할 수도 없다. 정착민과 나그네의 차이는 결코 우열의 관계에 있지 않다. 살면서 소외를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아닐까), 정착 중에도 나그네 심정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강남순 교수가 인용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고향에서도 망명 중일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착이 가져다 주는 건 안정감뿐만이 아니다. 상투성도 있다. 어쩌면 상투성은 안정감의 뒷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인간은 쉬이 싫증을 느끼는 존재다. 폴 틸리히가 간파했듯, 인간은 죽음뿐만이 아닌 공허함과 무의미에 대해서도 불안해하는 존재다. 갈증이 해소된 이후 ‘물’이 가지는 의미는 더 이상 만족과 안정감이 아닌 잉여와 상투성이다. 정착으로 안정된 삶은 필요가 충족된 이후 잉여물들로 채워진 상투적인 삶일지도 모른다. 필요가 채워지는 시점은 곧 의미가 상실되는 시점, 그리고 상투성이 시작되는 시점과 공교롭게도 일치한다. 안정감이 일시적일지도 모르며, 그래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나그네의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일지도 모르는 이유이다. 끊임없이 의미를 찾는 존재,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존재, 그 불안함 때문에 그렇게나 지키려고 애썼던 생명까지도 스스로 포기할 수도 있는 이 역설적인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인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배움에 관하여’이지만, 배움에 대한 학문적인 의미를 풀어놓은 차갑고 딱딱한 책이 아니다. 저자 강남순 교수의 평범하고 따뜻한 일상 이야기다. 나는 여기서, 그녀의 일상을 '배움'이라는 단어로도 번역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나의 일상도, 그리고 이 글이나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의 일상도 '배움'이라는 단어와 동의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투적인 일상의 조각들에 물음표를 붙이는 순간 배움이 시작된다는, 이 놓치기 쉬운 진리를 그녀는 그녀의 일상을 통해서 잔잔하게 증명해 보인다. 신학자이자 철학자이지만, 그 타이틀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강남순 교수, 아니 ‘동료 인간’ 강남순을 나는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점 중 하나는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와 그것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인간임을 전제한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점 중 하나는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와 그것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인간임을 전제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예민한 관찰과 냉철한 분석, 그리고 그에 따른 대안을 위한 저자의 제안이 이 책을 이루고 있다. 폭력과 차별을 양산해내는 악에 가담하지 않기 위하여 – 그것이 적극적인 모습이든 자신도 모르게 참여해있는 수동적인 모습이든 – 우린 비판적 성찰을 일상화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배움의 통로이자 시작이라고 역설한다. 

평등과 연대, 배제와 증오를 넘어서는 따스한 환대, 절망을 넘어서는 희망을 위해 우린 끊임없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묻고 답해가야 한다. 익숙해진 일상의 무게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하여, 의미를 상실한 상투성에 숨막히지 않기 위하여, 제도화되고 규범화된, 그래서 불의하고 불평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 자연스럽게 각인된 편견과 고정관념을 예민하게 알아채야 하고 그것들에 저항해야 한다. 저자의 표현대로 우리 인간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형성 중인 존재이기에, 저항은 파괴와 죽음을 위함이 아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새롭게 하는 구축 작업이다. 이때 저항은 데리다의 해체 (탈구축) 개념과도 유사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린 해체해야 할 항목들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사실 그것들을 구축해놓은 사람들이나 그것들을 탈구축해야 할 사람들 모두 시대의 아들 딸들이다. 모두 공존하고 있다. 장 뤽 낭시가 말한 '존재란 함께 존재'라는 말은 비단 뜻을 같이하는 집단에만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가시적으로는 구축하려는 자와 탈구축하려는 자가 나뉘고, 저항하는 자와 저항하는 자를 저항하는 자가 나뉘지만, 우리가 해체해야 할 보다 근원적인 대상은 단순히 뜻을 같이하지 않는 반대편의 사람들이 아니다. 너무나도 쉽게 적군과 아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적군을 악마화하고 아군을 의인화해버리는 우리 안에 잠재된 폭력성일지도 모른다. 겉으로 드러난 폭력만 폭력이 아니다. 내재되어 드러나지 않은 폭력도 폭력이다. 우리가 경계하고 해체해야 할 대상은 바로 이 잠정적 억압자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에 내재된 폭력성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저자도 언제나 경계해야 할 것은 순수주의 열망을 가지고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들이라고 하면서, 특정 집단의 이상화, 낭만화, 미화 (반대편엔 '악마화'가 있을 것이다)는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가 결여된 것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특정 집단의 이상화, 낭만화, 미화 (반대편엔 '악마화'가 있을 것이다)는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가 결여된 것

한 사람은 수천 수만의 신비한 층을 가진, 본질상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 우리는 얼마나 서로에 대해 알고 소통하고 있을까? 일부분만을 보고 그 사람의 전부를 알아낸 것처럼 함부로 상대방을 대하고 있진 않을까? 함부로 타자에 대한 재판권을 휘두르거나 휘두르기를 소망하는 삶을 살고 있진 않을까? 감히 알 수 없는 타자의 존재를 단순화시키고 개념화시켜 인간성을 말살하는 암묵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있진 않을까? 

이 책 덕분에, 앞으로 구체적인 얼굴들을 배제한 거대담론에 경솔하게 빠지지 않기로 다짐하게 되었다. 변화와 정의라는 멋쩍은 구호를 부르짖었지만, 사실상 한 사람 한 사람의 대체불가능한, 개별적이고 고유한 얼굴들을 기억하지 않고, 단순히 독선적인 마음으로 나와 뜻이 반대인 사람들을 사물화시키면서, 스스로는 나 자신이 소위 진보적인 부류에 속한다고 여겨오지 않았나 반성하게 되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결코 그 어떤 변화와 정의도 구현할 수 없을 것이다. 변화와 정의는 현 주류나 집권 세력의 타도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억압 받은 분노를 동일하게 되갚아준다는 식으로, 마치 그들의 뒤를 잇는 제 2의 억압자가 바로 우리가 되는 현상이 벌어진다면, 불의와 폭력과 불평등의 일상은 무한반복될 뿐이다. 저자의 말대로 냉철하고 진지한 비판은 우리 사회를 건강하고 정의롭게 만드는 데 필요하지만, 전적인 악마화나 존재 전부를 부정하는 비아냥거림의 욕설들은 우리 사회에 파괴할 뿐일 것이다. 

한 인간은 대체불가능한 유일성을 지닌 존엄한 존재이다. 그 누구도 결코 다른 한 사람에 의해서 혐오나 배제, 차별 받을 만한 이유가 없다. 이 책을 통해 나와 타자, 그리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많이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나 하나가 조금 깨닫고 행동한다고 해서 꿈쩍도 하지 않을 세상임을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저자의 고백대로 사소한 것이 사소하지 않다는 것, 배제, 차별, 불의, 불공평에 대한 예민성을 지니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파하는 일, 작은 변화가 큰 차이를 만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일상을 살아낸다면 어떨까 (이 글도 그 일환이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열린 눈과 열린 귀로써 서로에게 배우고 전적인 환대를 베풀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 이런 낮꿈 꾸기를 멈추지 않는 수많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인 시공간. 나도 그 중 하나라는 이 묘한 뿌듯함. 많이 배웠다. 그리고 배웠더니 살아있음이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인간은 배운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참 감사하다. 이 책은 2019년 부활절을 앞둔 사순절 기간에 내게 찾아온 신선한 봄바람 같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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