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만희] 예수를 위한 잔치
[박만희] 예수를 위한 잔치
  • 박만희
  • 승인 2019.05.20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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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희 전도사의 설교 - 요한복음 12장 1~8절

좋으신 주님의 평화가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21일 부활주일까지 우리는 2주간의 사순절을 더 보내게 됩니다. 어느새 수난주간과 부활절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얼마 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눈 적이 있는데요. 그것은 예수님의 선언이었습니다. 혼잣말인지 아니면 다 들으라고 하신 말씀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것은 고집스러우면서도 단호한 결의가 느껴지는 선언이었습니다. 방향을 정해 걷겠다는 말씀일 테고, 그 길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새겨져 있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 말씀에 따라 저는 이번 사순절을 예수님의 뒤를 따라 ‘걷는 시간’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걷는 중일까요. 얼마만큼의 속도로 걷는 중일까요. 당장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를 떠나거나, 급하게 일상을 내던지고 멀리 떠날 수는 없겠습니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더딘 걸음으로 생각할 수는 있을 겁니다. 우리의 걸음이 세상의 흐름 전부를 바꿀 수는 없겠습니다만, 순응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할 수는 있겠습니다. ‘다른 길이 없지는 않아.’라고 말이죠. 우리는 다른 길을 걷는 삶을 몸소 보여주신 이가 예수라고 믿습니다. 교회는 ‘우와 그는 역시 짱이야’라고 이구동성으로 감탄하는 단체가 아니라, 한 두 사람이더라도 그를 따라 길을 나서는 사람들입니다.

한편, 우리는 기억하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거 중요합니다. 무작정 좋은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현재나 과거 따위 어찌됐든 주님이 다시 오실 미래만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기억합니다. 성찬 때마다 고백하듯 죽음을 기억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함께 그의 안에서 일어난 수많은 죽음을 기억합니다. 지난주에도 달라진 것 하나 없이 공장 기계에 끼어죽은 한 노동자를, 강원도 산불로 피해를 입은 이재민을, 우리와는 무관한 듯 보이는 4.3사건의 희생자를, 이제는 4월을 상징하게 된 ‘세월호’를 그리스도의 빵과 잔에서 기억합니다. 기억이 우리가 하는 일이고, 거기에 우리 정체성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상합니다. 나쁜 일은 빨리 잊어야 하는 거니까요.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흔히들 이야기하니까요. 근데, 우리는 기억하는 겁니다.

우리뿐만 아닙니다. 지난주 가나안 땅에 막 도착한 첫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새 땅에 도착했으니 앞만 보고 달려가면 좋을 텐데 그렇게 안하는 겁니다. 노예로 살았던 치욕스런 과거야 앞선 세대의 몫이니 다 잊어버리면 될 텐데, 유월절이라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자신들의 뿌리로 삼습니다. 물론 출애굽에는 아픔뿐만 아니라 구원이 담겨 있으니 기억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만, 그럼 축제로 기념하면 될 텐데, 기쁨이나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그 날을 기억합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을 지팡이를 짚고 먹는 겁니다. 그날 이집트를 떠나던 장면을 재현하는 겁니다. 마치 우리가 빵과 잔을 나누는 장면을 재현하듯 말입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직접 겪은 일도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자신들과 무관합니다. 출애굽기부터 여호수아까지를 한 뭉텅이로 본다면 그놈이 그놈 같지만, 두 세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죠. 앞선 세대가 탈출했다면 자신들은 도착했습니다. 앞선 세대는 노예였지만 자신들은 자유인이니까요. 그런데도 기억하는 겁니다. 과거야 내팽개치고 밝은 미래를 설계하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수치스러운 과거를 자신들에게서 잘라내고 새롭게 시작하면 될 텐데 굳이 기억하는 겁니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아픔과 구원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아,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안고 가는 겁니다. 우리는 ‘기억하며 믿는다.’고 새기며 고백하는 겁니다.

친구가 전도사로 있는 교회에서 한 청년이 물었다고 합니다. ‘왜 기억해야 하느냐’고 말이죠. 저는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그게 우리의 일이니까요.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는 게 우리의 일이니까요. 그 죽음 안에 새로운 언약과 소망이 있다고 믿는 게 우리의 믿음이니까요. 시체가 썩어간다고, 악취가 나니 이제 그만 문을 닫자고 옆 사람들이 따가운 눈초리를 던질 때,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낸 예수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제 끝났으니 문을 닫자고 말할 때, ‘그가 잔다.’고 말씀하시던 그리스도를 우리는 믿는 겁니다. 깨면 된다는 거겠죠. 죽음에서 깨어날 삶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걸음은 그렇게 믿고 걷는 걸음입니다. 사순절은 그 예수를 따라 걷는 시간입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나사로를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에 있었던 내용을 다룹니다. 본문 첫 절에 있는 ‘유월절 엿새 전’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쉽게 말해 본문은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있었던 사건을 들려줍니다. 본문 바로 앞에 있는 요한복음 11장은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을 기록합니다. 추측해보자면 한바탕 난리가 났을 겁니다. 성서에 따르면 숨이 끊어진지 나흘이나 지난 시체가 살아난 일이니까요. 마을 전체가 들썩했고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았다고 말이죠.

얼마 지나지 않아 잔치가 열렸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죽은 사람이 돌아왔으니 잔치가 문제겠습니까. 가산을 탕진해서라도 기쁨을 나누고 싶었을 겁니다. 말 그대로 모든 사람과 나누고 싶은 기쁨이었을 겁니다. 성경은 잔치를 누가 열었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나사로의 가족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열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는 있지만,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즐기면 그만이죠.

잔치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석했을 겁니다. 우선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축하하는 잔치였을 테고, 그를 살린 예수님을 높이는 축제였을 겁니다만 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잔치에 참석했을 겁니다. 나사로가 정말 멀쩡한지 확인하려는 사람, 처음부터 끝까지를 전부 의심하는 사람, 예수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를 구경하려는 사람. 다 모르겠고 잔치나 즐기자는 사람 등 갖가지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본문은 잔치가 누구를 위한 성격인지를 분명하게 합니다. 2절 초반만 읽어보겠습니다.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제가 지금과는 조금 다른 신앙 색깔을 가졌을 때 읽고 큰 은혜를 받았던 말씀입니다. ‘아, 이 잔치가 살아난 나사로가 아니라, 살린 예수를 위한 시간이었구나.’하며 큰 깨달음을 얻었던 말씀입니다. ‘우리는 틈만 나면 예배가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기 바쁜데, 그거 아니구나. 예배는 구원 받은 우리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살린 예수님을 위한 잔치구나’하며 깊은 배움을 얻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내용을 주제로 여기 있는 OO님과 함께 찬양예배를 준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때와는 조금 다른 성경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그때가 맞고 지금은 틀리든, 지금이 맞고 그때가 틀리든 어쨌든 그 잔치는 예수님을 위한 시간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을 위한다는 게 뭘까요. 한때 저는 그것을 향기로운 예배로 그 공간을 가득 채우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뒤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끼얹은 향기로운 향유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한 찬양과 예배라고 믿었습니다. 온 정성을 다한 찬양이 예수님을 위한 잔치라고 여겼습니다. 그런 걸까요? 예수님을 위한 잔치란 그런 걸까요. 정답을 말씀드릴 자신은 없습니다만, 오늘은 그때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본문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기분 좋은 잔치가 한창 일 때, 거기에 물을 끼얹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언제나 그렇듯 마리아가 문제를 일으킵니다. 잔치를 시중들던 큰 언니 마르다와는 달리, 마리아는 잔치에 없었습니다. 지난번처럼 오늘은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바깥에서부터 잔치 한 복판을 가로질러 예수께로 향합니다. 지금 벌어진 잔치는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이 예수님에게 걸어갑니다. 본문에 나오는 장면을 상상해보자면, 마리아 때문에 시간이 멈추기라도 했을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멈추게 한 시간에는 아랑곳 않고, 자기 일을 합니다.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로 발을 닦습니다. 흥은 깨졌고 잔치는 중단되었습니다. 대체 마리아는 뭘 하는 걸까요.

혹자는 마리아의 정성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이라도 닦는 겁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태도라는 겁니다. 또 혹자는 값비싼 향유가 얼마인지를 계산합니다. 당시 품질 좋은 순 나드 향유 한 근이면, 몸 노동자의 일 년치 연봉이라는 자료를 들어서, 두 렙돈을 헌금한 여인처럼 마리아도 전부를 바쳐 감사를 표현했다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흐르는 기름 값을 계산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다였죠. 유다 덕분에 우리는 그 기름이 얼마나 고급인지, 얼마짜리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계산 빠른 유다가 보기에 그 향유는 대략 삼백 데나리온쯤의 가치가 있었고, 그 정도면 몸 노동자의 일 년 품삯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고마운 사람이죠. 덕분에 우리도 이 본문을 볼 때, 그녀가 얼마나 값비싼 향유를 낭비했는지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거룩한 낭비’라는 꽤나 유명한 문구가 나온 배경이기도 합니다.

유다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유다의 문제제기는 어떤가요. 저는 맞는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동의했을 겁니다. 요한이 개입해서 해설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유다와 함께 마리아를 한심하게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다가 말하는 가격을 들었다면 더 그랬을 겁니다. 요한의 해설을 빼면 어떤가요. 요한의 해설을 빼고 나면, 유다의 말이 더욱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요. 제가 평소 주장하는 대로라면, 그 돈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을까요. 차라리 자기네가 먹고 사는데 쓰던지 말이죠.

예수님은 여기에서 마리아를 편듭니다. 모처럼만의 호사를 누리는 게 좋으셨던 걸까요. 모르긴 몰라도 평생 누려본 적 없는 귀빈대접이었을 테니말이죠. 아니면 유다 때문에 민망해져 버린 상황을 얼버무리신 걸까요. 엄숙하고 신비로운 순간이었을 텐데, 유다의 문제제기는 찬물을 확 끼얹는 불편함이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편드신 게 아닐까요. 자신도 변호할 겸 말이죠.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마리아가 한 일은 죽음을 준비하는 행위였습니다. 당시 몸에 기름을 붓는 까닭은 딱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선지자를 통해 왕으로 인정받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시신을 보관하기 위할 때입니다. 이걸 신학적으로 정리한다면, 마리아가 한 행동은 이제 곧 십자가에 죽게 될 왕을 위한 기름부음입니다. 사랑하는 당신의 죽음이, 곧 우리를 위한 왕 되심이라고 고백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증거로 예수님은 곧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테고, 또 왕으로 죽으실 테니 말입니다. 마리아의 기름부음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만, 지금 조금 더 주목하고 싶은 건 마리아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만 죽음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모두가 잔치를 즐길 때, 마리아만 예수를 위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만 예수의 말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만 그의 길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길을 가야 하겠다.’는 말씀을 그녀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도, 준비하지도 않을 때, 마리아는 그의 죽음을 준비합니다. 그녀만 예수를 위했습니다. 그녀만 잔치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재미있게도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이나 다윗에게 부은 기름이 얼마인지를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얼마나 고급 향유인지, 그게 며칠을 일하거나 굶어야 살 수 있는 기름인지를 묻지도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사무엘이 그들에게 붓는 기름의 기능을 알기 때문일 겁니다. 유다는 그 의미를 조금도 몰랐거나, 예수는 끝내 자신의 길을 무시당했습니다. ‘예수의 길은 가난한 사람을 많이 먹여 살리는 거 아니었습니까?’라는 그럴듯한 말을 하지만,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는 말을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겁니다. 오직 마리아만이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될까요. 답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요한이 파놓은, 혹은 유다가 설치해 놓은 함정에 빠진 걸지도 모릅니다. ‘삼백 데나리온’ 이라는 함정 말입니다. 어쩌면 삼백 데나리온은 이 본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마리아가 존경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녀가 비싼 걸 바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홀로 죽음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제 식대로 바꾼다면 홀로 죽음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홀로 예수를 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위한 잔치는 죽음을 준비한 마리아에 의해 향기로 가득하게 됩니다.

재미있게도 요한은 유다를 ‘도둑’이라고 부릅니다. 회계를 맡았는데 습관처럼 조금씩 돈을 빼돌렸다는 겁니다. 이 부분을 읽고 참 새삼스러웠습니다.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르고 제자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파다했을지도 모릅니다만, 제게는 좀 느닷없는 비난처럼 여겨졌습니다. 물론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며, 최악의 저주를 받는 역할을 맡게 되지만, 그가 정말 돈을 밝히는 인물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저는 가끔 합니다. 몇몇 학자들에 의하면, 유다는 ‘유대’라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유다는 유대인 전체를 가리킨다는 겁니다. 저주 받고 태어난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거죠. 쉽게 말해 우리의 모두의 일이라는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가 야금야금 훔쳤던 건 돈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길냥이를 학대하지 말고 돌보자’고 하면, ‘사람도 못 먹는데 무슨’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성폭행 당한 피해자의 심정을 헤아려야 한다고 말하면 장자연 사건이 묻힌다’고 말합니다. ‘아직도 여전히 기계에 끼어죽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강원도 산불’을 말합니다. 저는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정말로 길냥이보다 사람을 아끼는지, 고 장자연님을 위하고 추모해서 그러는 건지, 노동자보다 강원도 주민들을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항상 더 큰 일이 무엇인지 저울질하기를 즐겨하지만,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 게 아닌가. 전대에서 돈을 훔치듯 자신의 마음을 훔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늘 돈을 훔치는 자라 그렇다’는 요한의 비난은 예리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끼칩니다. 우리 역시 늘 자신의 마음을 빼돌려 어디에도 두지 않으려 하니까요.

떠들썩한 잔치를 가로질러가 유유히 자신의 일을 수행했던 마리아의 온전함이 저는 부럽습니다. 그가 칭찬 받아야 할 이유는 큰돈을 들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녀의 준비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길을 가야 하겠다’는 예수의 단호한 결의에 대한 자신의 응답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은 사순절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는 예수님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준비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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