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이택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 이택환
  • 승인 2019.04.11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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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빌 3:4~14
김동문
빌립보 유적지의 아고라 ⓒ김동문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빌립보교회 성도들 중에는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육체를 신뢰(페포이데시스, confidence, 신임, 확신)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혹시 남들보다 우월한 외모, 키, 체력 등을 자랑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뜻밖에도 이는 할례를 두고 한 말입니다. 2절에서 “몸을 상해하는 일”이 할례를 의미하고, 3절에는 아예 ‘할례파’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5절에서도 바울이 말하지요. “나는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 이처럼 오늘 말씀의 전반부는 모든 내용이 할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4절에서 육체를 신뢰하는 것, 그것은 할례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할례가 마치 포경수술과 같아서, 오히려 말하기 부끄러울 것 같은데, 무슨 자랑거리가 되고 또 신뢰할 만한 게 있다는 것일까요? 하지만 2000년 전, 기독교가 유대 땅을 넘어 이방지역으로 전파될 때라면 상황이 다르지요.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체계를 유대교(유다이즘)라고 한다면, 그 무렵 막 생겨난 기독교는 유대교와 다른 새로운 종교가 아닌, 유대교의 일부였습니다(나중에 결별). 유대교에서는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가 중요한데(구원론), 아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받은 언약백성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표지가 바로 할례였던 것이지요(창 17:14).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구원의 증표,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표지로서 할례를 신뢰하고, 신임하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할례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는 유대 전통으로서의 할례가 의미 있었겠지요. 그러나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가 필요한 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세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드러내는 공적 표지이지요. 그러므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으면 되지, 할례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말자는 것은 이미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결정된 바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백성의 증표인 할례가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었지요. 그것은 단순히 할례를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을 구약의 약속을 온전히 성취하신 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통로(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므로, 이미 검증된 통로인 할례를 함께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둘째는 사회학적 측면인데, 이방인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그가 곧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할례는 분명히 유대인을 다른 민족과 구분하는 민족적 표지이자, 구원받은 선민을 상징하는 지울 수 없는 표식이었습니다(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73-74). 그러므로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유대 인종주의지요. 바울은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을 ‘개’, ‘악을 행하는 자’, ‘손할례당’이라 불렀습니다(빌 3:2). 그들은 말만 그리스도인이지,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신뢰한 게 아니라 인간의 육체, 즉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로서 자기 몸에 행한 할례를 더 신뢰했습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누구보다 육체를 신뢰할만한 사람이 바로 나다!”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1)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처럼, 어른이 다 되어서 할례 받은 게 아니라,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 받은 정통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 순혈주의지요. 여기에는 같은 유대인이라도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할례는 유대 남자들만 받기 때문입니다. 남성우월주의입니다.

2)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 바울은 이스라엘 족속 중에서도 초대 사울왕을 배출한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바울의 유대식 이름도 사울이었지요(위대한 조상에 훌륭한 가문).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 중에는 헬라어를 쓰고, 헬라 풍속을 따르는 변질된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외국에서 몇 대를 살다보면 그럴 수 있지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바울 역시 그럴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유대인의 풍속을 엄수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민족주의자 집안).

3)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 :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를 보면, 당시 바리새인들은 말과 행동에서 온전한 자들로,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는 사람들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당대 최고의 랍비, 가말리엘에게 배운 정통 바리새인이었기에(행 22:3), 율법의 의로 흠이 없었고, 열심으로도 과거 교회를 박해하던 시절, 물불 가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열심이 특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 있어서 이 모든 것이, 일말의 도움이 되기는커녕 완전히, 그리고 전혀, 무가치하다고 말합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소위 ‘내려놓음’에 관한 말씀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자신에게 유익을 주던 모든 것, 가령, 돈과 명예, 권력, 학문과 취미, 심지어 배우자나 자식까지도 다 내려놓아야 한다고 종종 말합니다. 그것도 단순히 내려놓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심지어 배설물처럼 여겨야 한다고 설교하기도 합니다. 착각입니다.

지금 바울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적인 유대주의, 혈통주의, 남성우월주의와 같은 육체적 조건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데,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배설물처럼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런 육체적 자랑거리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생각을 싹 쓸어서 내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8절의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가 그런 뜻입니다(제미오오 : 집어 던지다/cast away).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8절에서 바울은 이런 것들을 다 손해(제미아, damage)로 여기는 이유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고상하다는 것은 품위 있다는 게 아니라, 최고 우위(훼페레코, superior)에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해 최고 우위인가?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최고 우위라는 게 아니라, 우리를 구원 받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게 하는 데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려면, 할례가 아니라,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은 또 무엇일까요?

“8b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무슨 신학 공부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어서(즉,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견된다는 것입니다(누구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신다는 수동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곧바로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다”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매우 중요하므로 두 가지만 설명해 보겠습니다. 

1)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 이는 우리가 율법을 따라 할례 받는다고 구원 얻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가진 의’란, 바울이 하나님의 의를 얻어서 지금 의인이 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바울이 이렇게 말한 셈이지요. “내가 알기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결코 인간의 할례 따위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니다!”

2)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 이 부분이 우리말 성경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와 같이 목적격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라는 소유격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디아 피스테오스 크리스투).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구원은 내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값싼 은혜), 내가 그리스도를 믿기도 전에,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값비싼 은혜).

그렇다면 신약성경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구원얻는다.”라는 표현이 나오면, 그 뒤에는 반드시 그분의 신실하심이 드러난 십자가와 부활이 언급됩니다. 과연 오늘 말씀도 그럴까요? 10-11절을 보십시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그러므로 하나님 백성 된 우리가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가 일순간에 완성할 수 있는 어떤 단기 과제가 아니라, 우리가 한 평생을 두고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우리를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부활의 권능을 입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육체를 신뢰하고 자랑하는 헛된 길에서 벗어나, 오직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며, 상처 난 곳을 어루만져주고, 갈라진 곳을 하나 되게 하며, 주위의 힘든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전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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