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 시험을 만났을 때
[장일] 시험을 만났을 때
  • 장일
  • 승인 2019.04.06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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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 목사의 야고보서 강해 설교 2 - 야고보 1:2~4
jtbc 뉴스
jtbc 뉴스(2019.03.28)

서 론

야고보서 강해 두 번째 시간입니다. 여러분 다음 주 화요일이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4월 16일 바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날입니다. 올해로 벌써 5주기를 맞지만 세월호참사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최근에도 세월호의 CCTV가 조작됐다는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이러한 기사를 접할 때마다 “세월호의 진상규명은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이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세월호 유가족 중 76명의 부모가 개신교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 중 대부분이 세월호 참사 이후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중에는 몇십 년 동안 교회를 섬겼던 분들도 계셨을 텐데,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만들었을까?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바로 목회자와 교회 공동체에게 받은 상처 때문입니다.

먼저 목회자는 유가족들의 이야기가 아닌 정부의 발표 그것도 부정확한 정보를 근거로 설교나 공식석상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교회 공동체 또한 유가족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자식들이 왜 죽었는지 진실을 밝혀달라고 요구하는 유가족에게, 교회는 “이제 그만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라”는 말만을 반복했습니다. 이에 대해 한 유가족은 “아픔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고 이들을 위로하는 것이 신앙생활 아닙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실제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을 만난 지체에게 너무 성급히 조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집사님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거예요” 물론 하나님의 뜻이 있겠죠.

그러나 이러한 조언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하신 행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분명 예수님은 곧 돌문을 열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울고 있는 마리아를 보시고 먼저 그 아픔에 공감하며 곁에서 함께 우셨습니다.

“아이가 천국 갔으니 이제 그만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라”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한 교회 공동체의 반응을 보며 저는 오늘날 교회의 영성을 생각해봤습니다. 특별히 ‘시험을 만났을 때의 영성’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험을 만난 공동체에 주는 야고보의 권면입니다. 이 권면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시험의 목적과 그 가운데 필요한 믿음의 자세를 발견하는 복 된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1. 시험의 정체

시험을 만났을 때, 첫 번째는 시험의 정체입니다.

2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신약 성경 대부분의 편지들은 공통점을 하나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머리말 뒤에 공동체를 위한 축복과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편지만 보더라도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이어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나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이 형식을 따르지 않습니다. 머리말인 1절 후에 곧바로 권면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권면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시험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시험이 야고보서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야고보서의 독자인 흩어진 교회는 시험에 당면한 상황이었습니다.

야고보는 이 시험이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흩어진 교회가 겪고 있는 시험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저는 ‘가난’이 가장 큰 시험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야고보서는 가난과 부의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흩어진 교회는 대다수가 가난한 성도들이었습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낯선 타국에서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여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핍박까지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 종교적, 경제적 핍박이 그들을 가난으로 내몬 주범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부와 번영이 주는 유혹에 늘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시험은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고, 질병,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 오는 시험들도 결코 면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큰 시험은 가난에서 오는 역경과 부와 번영에서 오는 유혹이었습니다.

요즘 자영업 하시는 분들을 만나보면 살겠다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뭐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우리 성도님들만 봐도 그렇습니다. 옷 가게를 하시는 한 권사님이 계십니다. 금남로 지하상가에서 가게를 하시는데 2~3년 전부터 극심한 불경기를 겪고 있습니다. 권사님 가게 뿐 아니라 주변 가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장사가 안돼도 너무 안되는 겁니다. 어떤 날은 손님보다 파리가 더 많을 때도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권사님 속이 어떨까요? 뭐 죽지 못해 사는 것이지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씀을 매번 암송하고 나가지만 현실의 문제 앞에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것이 우리 믿음의 현실입니다. 이처럼 가난에서 오는 역경은 우리 가까이에 있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다음은 저의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이 친구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친구의 아버지는 암으로 투병중이셨는데 경제 형편상 치료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못사시고 결국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건 이후 친구의 인생관은 급격하게 달라졌습니다. 바로 인생의 최고 가치를 돈에 두기 시작한 것입니다. “돈이 있었더라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지는 않았을텐데” 이러한 후회가 돈에 대한 욕망을 매우 크게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이때부터 친구는 오직 돈 버는 일에만 올인했습니다. 몇 년 동안 투잡까지 뛰어가면서 미친 듯이 돈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20대 후반의 나이에 외제차를 뽑고 광주의 번화가에 큰 호프집까지 계약하게 됩니다. 드디어 그토록 꿈꾸던 돈방석에 오르려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터집니다. 바로 동업자 형이 계약금을 가지고 사라진 것입니다. 전문용어로 잠수라고 부르죠. 결국 친구는 그동안 세빠지게 모았던 돈을 모두 날리게 됩니다. 이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친구는 몇 달 동안 집밖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뭐 이러한 사례들이 제 친구뿐이겠습니까? 가난에서 오는 역경도 문제지만 부와 번영에서 오는 유혹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쩌면 이 유혹이 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미정상회담이 이번 주 목요일에 열립니다. 이번 정상회담에는 여전히 많은 과제들이 쌓여있습니다. 북한 비핵화에 대한 이견조율과 교착상태에 빠진 북미간의 대화를 이끌어내야 하는 과제들이 남아있습니다. 모두가 평화를 원하지만 돌아보면 한반도는 긴장과 반목의 역사를 지나왔습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또한 늘 평안을 구하지만 실상 평안은 드물고 뭐가 더 많습니까? 시험과 시련이 더 많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끊임없는 시험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출애굽기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시고 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나요? 아니죠. 반드시 광야를 거치게 하셨습니다. 40년 광야생활은 일종의 시험기간입니다. 광야에서 만난 시련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훈련시키는 시험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베드로도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오는 불같은 시험을 어떻게 여기지 말라구요? 이상할 일 당하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매번 시험이 올 때마다 이상하게 여기며 놀라기도 합니다. 이처럼 1세기의 흩어진 교회 뿐 아니라 오늘날 교회 공동체도 동일한 시험 앞에 놓여있습니다. 아니 이미 그 시험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여전히 시험 앞에서 신앙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혼란을 겪는 분들은 봅니다. 물론 믿음이 약할 때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끊임없는 시험의 장소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이 시험의 정체와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시험의 목적

시험을 만났을 때, 두 번째는 시험의 목적입니다.

3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4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2절 후반부에서 야고보는 시험에 빠졌을 때 우리가 대처해야 할 모습을 소개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런데 여러분 앞에서 이야기한 시험들 곧 가난에서 오는 역경이나 부와 번영에서 오는 유혹이 과연 기뻐할만한 상황입니까? 결코 아니죠. 시험과 기쁨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입니다. 얼핏 들으면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순한 기쁨이 아닌 온전한 기쁨,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여길 것을 권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3절에 보면 믿음의 시련이 무엇을 낳기 때문입니까?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시련이란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시련은 이미 존재하는 믿음을 깨끗하게 하는 과정입니다. 금을 정제하는 과정 다들 아시지요? 그 모습을 떠올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시련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인내를 낳게합니다.

인내를 좀 더 살펴보도록 하죠. 인내는 비단 신앙 뿐 아니라 우리 인생에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인내 자체가 시험의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시험의 목적은 4절에 나옵니다.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개역성경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시험 가운데도 하나님을 향해 일관된 삶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저의 인생에도 인내를 가르쳐준 위대한 스승이 있습니다.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제가 갖고 있는 질병입니다. 오늘 말씀과 연결해보면 이 질병이 저에게는 믿음의 시험이기도 합니다. 2005년 서울대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으니 벌써 14년째 투병 중에 있습니다. 여러분 건강한 삶을 위한 3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소화기관에 문제가 있기에 잘 먹고 잘 싸는 일이 매우 어렵습니다. 음식을 최대한 가려서 먹지만 그럼에도 몸에서 받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밤새 복통과 설사에 시달려야 합니다.

증세가 심해지면 영양실조로 인한 탈진이 옵니다. 이럴 때는 그저 며칠씩 침대에 누워지냅니다. 여기에 고열이나 출혈이 생기면 꼼짝없이 병원 신세를 져야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면 몸 뿐 아니라 마음에도 병이 찾아옵니다. 실제로 저와 같은 희귀난치질환 환자들은 50% 이상이 우울증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질병을 단순한 병이 아닌 믿음의 시험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현재도 이 과정들을 통해 인내 곧 하나님을 향한 일관된 삶의 자세를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4절 후반부를 한번 보세요. 야고보가 이러한 인내의 삶이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든다고 이야기합니까?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온전한 사람으로 우리를 빚어간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시험을 주시는 목적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CBS
CBS (2016.04.12)

마지막으로 살펴볼 부분은 공동체적 적용입니다. 서론에 세월호 유가족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왜 교회를 떠났습니까? 목회자와 교회 공동체에게 받은 상처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지체가 시험을 만났습니다. 그것도 자녀를 잃어버린 슬픔이에요. 혼자 인내하기에는 혼자서 버텨내기에는 너무 혹독한 시험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버틸 수 있겠어요? 저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이때 필요한 게 무엇일까요? 아이가 천국에 갔으니 어서 슬픔을 잊고 현실로 돌아오라구요? 아니 인간이 무슨 컴퓨터입니까? 자녀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이러한 말을 조언이라 건네는 교회의 영성을 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교회 공동체를 지체에 비유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몸에는 머리, 가슴, 두 손과 발 이렇게 모든 지체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발가락만 다쳐도 모든 지체들이 함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건강한 공동체의 기준은 어떤 고차원적인 게 아니에요.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지체도 함께 아픈 겁니다. 김 집사님이 힘든 시험 앞에 눈물을 쏟고 있는데 사람들이 별로 관심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이미 심각하게 병이 든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야고보서 말씀은 교회 공동체가 한 자리에 모였을 때 낭독되었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성경이 없었으니까요. 여러분 초대교회가 불같은 시험을 이겨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공동체가 시험 앞에서 함께 인내하고 버티어냈어요. 서로 위로하며 격려했어요. 다른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었어요. 다른 게 비결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우리 공동체는 어떠해야 할까요? 여러분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합시다.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리아의 마음에 공감하셨던 모습. 백 마디 말보다 곁을 지켜주며 함께 울어주셨던 모습. 여러분 이 예수님의 모습을 닮는 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우리 팔로우교회도 이 온전한 믿음을 추구하는 공동체로 서기를 축복합니다.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야고보서 강해 두 번째 시간으로 ‘시험을 만났을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끊임없는 시험의 장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험의 정체와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시험의 목적도 분명하게 이해해야합니다. 믿음의 시험은 인내를 낳고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신앙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분명 시험 중에 있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때론 너무 감당하기 힘들어서 이제 그만 포기하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우리 예수님께서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함께 져주고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 공동체가 있습니다. 시험을 만나면 혼자라는 고독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우리에게는 마음을 알아주고 품을 내어주며 함께 버티어 나갈 수 있는 공동체가 있지 않습니까? 이 공동체의 능력을 우리 모두가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끝으로 이 모습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주를 닮은 온전한 그릇으로 빚어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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