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평화의 하느님: 어떤 평화?
[곽건용] 평화의 하느님: 어떤 평화?
  • 곽건용
  • 승인 2019.04.02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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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의 설교 -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15(마태 5:9, 10:12, 요한 14:27, 16:33)

다신교는 평화적이고 일신교는 폭력적인가?

오늘은 ‘우리 안에 있는 가짜 하느님 죽이기’ 시리즈 열다섯 번째이자 ‘폭력의 하느님에서 평화의 하느님으로’ 소주제 두 번째 설교가 되겠습니다. 이 소주제는 오늘로 마무리하고 다음 주일부터는 마지막 소주제인 ‘홀로 있는 하느님에서 함께 있는 하느님으로’에 대해 얘기함으로써 길고긴 시리즈를 마치겠습니다. 이젠 정말 종착역이 보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모든 인류의 절대자로 믿어지는 보편적인 신이 이해관계나 이념 때문에 벌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전쟁에서 어느 한 편을 든다는 생각이 어처구니없이 생각되어 결국은 아무 종교도 갖지 않았다는 리영희 교수 얘기에서 시작해서 여러 신의 존재를 믿는 다신교는 관용적이고 평화적인데 반해서 하나의 신만을 믿는 일신교는 배타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다신교라고 해서 모두 평화적이지는 않습니다. 그 중 한 갈래인 수호신 종교는 일신교 못지않게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수호신 종교의 폭력성은 일신교의 폭력성에 비하면 그다지 심각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현재 대표적인 일신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입니다. 그런데 이들 종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폭력과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유대교의 근간이 되는 구약성서에는 야훼 하느님과 그를 믿는 이스라엘이 저지른 폭력과 전쟁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 때문에 초대교회에서 구약성서를 기독교 성서에서 빼버리자는 주장까지 나왔겠습니까. 지금도 이 때문에 구약성서를 멀리하거나 예수님이 믿었던 하느님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정말 일신교 그 자체 안에 폭력의 씨앗에 배태되어 있나요? 정말 그렇습니까? 정말 일신교는 본성상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습니까?

지난 주일에 얘기한 대로 사실상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일신교는 야훼라는 신의 명령을 받아 히브리 노예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모세가 소개한 야훼 종교입니다. 그보다 약 한 세기 쯤 전에 이집트에 ‘아텐’이란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있었지만 불과 한 세대 만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으므로 실질적인 첫 일신교는 야훼 종교라 하겠습니다. 이 야훼 종교의 특징은 신이 여럿이 아니라 하나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물론 일신교에서 신은 하나지만 일신교인 야훼 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신의 숫자를 하나로 줄였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야훼 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노예들의 종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전의 종교는 다신교든 일신교든 모두 지배자의 종교였습니다. 지배당하는 사람도 지배자의 종교를 강요받았는데 야훼 종교는 인류 최초로 지배를 당하는 사람들의 종교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노예 해방의 종교요 해방된 노예들의 종교였습니다. 이는 인류 최초로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당하는 사람들로 나눠진 사회상을 제대로 반영하는 종교였고 그 중에서도 배타적으로 지배당하는 사람들이 믿었던 종교였습니다. 이 사실이 야훼 종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데 이상하게 종교학자들은 야훼 종교가 일신교임은 강조하면서도 이 사실은 강조하지 않습니다.

구약성서의 야훼 종교에는 이런 현실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야훼 종교에는 옳고 그름의 구분이 뚜렷합니다. 진짜 신과 가짜 신의 구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우상’은 곧 거짓신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배자의 신이란 겁니다. 구약성서가 ‘우상’을 얘기할 때 오늘날 불교 사찰에 있는 불상 같은 것을 떠올리면 안 됩니다. 형상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강요하는 종교는 모두 우상이고 가짜 신입니다. 구약성서에서의 종교 갈등은 진짜 신, 곧 피지배자의 신인 야훼와 가짜 신, 곧 지배자의 신인 우상과의 갈등입니다. 야훼 종교는 정의와 불의의 구분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정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의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그림이 있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왼쪽 그림에서 키가 작은 사람은 똑같은 발판에 올라서면 경기를 볼 수 없습니다. 이른바 출발점에서의 평등이고 기회의 평등입니다. 하지만 키가 작은 사람도 경기를 볼 수 있게 하려면 그에게는 두 개의 발판이 필요합니다. 그걸 제공해주는 것이 구약성서의 정의입니다. 출발점에서의 평등이나 기회의 평등이 정의가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는 것이 정의라는 겁니다. 예언자를 통해 알려진 야훼의 정의가 바로 이것입니다.

 

야훼는 대량학살을 저지른 신인가?

이제는 지난 주일에 예고한대로 구약성서에 전해지는 전쟁과 대량학살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야훼 하느님은 전쟁의 신으로서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주장에 저는 동의합니다. 맞습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야훼 하느님은 전쟁과 절대 무관하지 않습니다. 야훼를 전쟁 신(warrior god)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시대의 신은 예외 없이 모두 전쟁의 신이었습니다. 그때는 전쟁이 일상이었고 전쟁을 통해 땅을 차지하는 게 유일한 생존의 방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야훼가 전쟁 신인 것은 당시의 사회상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지금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라크의 무슬림들이 알라에게 미국을 심판해달라고 기도할 때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을 악의 축이라고 부르며 폭격하는 것처럼, 야훼 신을 믿는 이스라엘은 바알을 믿는 가나안 사람들과 땅을 두고 전쟁을 벌였고 그들 각자는 자기가 믿는 신에게 전쟁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빌었던 겁니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이스라엘은 바알 신을 가짜라고 믿었던 데 반해서 가나안 사람들은 야훼를 가짜라고 믿지는 않고 단지 이스라엘 족속의 신으로 믿었다는 정도입니다. 요약하면, 야훼 하느님을 전쟁의 신으로 믿었던 것은 당시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평화의 신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니었고 또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반드시 이겨야 했으니 그 시대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을 전쟁의 신이라고 믿었던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 다음으로 ‘대량학살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우선 전제할 점은 제가 이와 관련해서 성서나 하느님을 옹호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고 다만 현재까지 성서학과 고고학의 연구에 기초해서 얘기하겠다는 점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현재까지 고고학과 역사학의 연구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는 대량학살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호수아서가 전하는 것 같은 가나안 종족에 대한 학살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그 시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현재까지‘라고 말할 까닭은 고고학자들이 땅을 파헤친 것보다는 아직 파헤치지 않은 곳이 더 많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연구결과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성서, 특히 여호수아서는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으니까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데 그 사건을 전하는 구절들을 잘 읽어보면 성서의 서술 안에도 서로 들어맞지 않는 대목들이 눈에 띱니다. 얼른 눈에 띠는 구절들만 보면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들을 다 몰살시킨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잘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그들을 다 몰살했다고 말했는데 뒤에 가보면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는 다 죽였다고 해놓고는 사사기에 들어가면 생존해 있는 가나안 사람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신을 추종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학자들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성서에 아말렉이란 족속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 같은 종족인데 그 까닭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왔을 때 다른 종족들은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는데 유독 아말렉 족속만은 이들을 공격해서 전투가 벌어졌고 거기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울 시대에 이들과 전쟁이 벌어져서 사울의 군대는 이들을 몰살했다고 했습니다. 왕 한 사람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 왕도 사무엘이 죽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아말렉 족속이 또 등장해서 또 싸웁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앞에서는 그들을 몰살했다고 분명히 말해놓고 뒤에서 이들이 또 등장하니,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입니까.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구약성서에 전해지는 대량학살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 뿐 아니라 성서학자들도 대량학살을 실제로 벌어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걸 주저하게 된 겁니다.

성서학자들은 구약성서의 대량학살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았는데 나중에 이스라엘이 바빌론제국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리로 포로로 잡혀간 다음에 이들은 왜 자기들이 이런 처지가 됐을까를 반성했다는 겁니다. 그때 그들은 자기들이 야훼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가나안 종족들이 믿은 바알 신을 따랐기 때문에 멸망당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때 바알 신을 믿는 가나안 종족들을 다 몰아내거나 멸절시켰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그들은 과거 역사를 기록했을 때 실제로 벌어진 것과는 달리 가나안 종족들을 몰살했다고 적었다는 겁니다. 이 주장이 100%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저는 그럴듯한 주장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믿은 평화의 하느님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 나오는 평화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 몇 구절을 읽었습니다. 흔히 예수님을 평화의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부를 여지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에 대해서 여러 번 얘기하신 바가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되는 구절도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직접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계시록을 보면 거기에는 재림한 예수님이 전 우주적으로 심판을 내리고 우주적으로 살육을 저지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심판의 하느님, 신약성서의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말하면 저는 ‘요즘 요한계시록 읽어본 적 있는가?’라고 물어봅니다. 거기는 전혀 다른 예수님이 등장하니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을 것입니까?

복잡하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이고 우리 모두는 시각장애자가 코끼리를 만지는 식으로 하느님을 알고 경험한다고 여러 번 얘기했습니다. 우리 사람의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말은 모두 부분적이고 주관적이며 은유적이라고도 얘기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기둥 같은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 ‘하느님은 전쟁의 신이다.’라고 믿고 있고 또 다른 사람은 부드러운 귀를 만지고 ‘하느님은 평화의 신이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디를 만지느냐에 따라 코끼리가 어떤 동물인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듯이 각각의 사람이 하느님을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믿음이 달라집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쩌다 다리를 만지고는 하느님은 전쟁의 하느님이라고 믿으면서 때로는 그런 신앙이 자기에게 맞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 됩니까? 또 어쩌다 귀를 만지고는 하느님은 평화의 하느님이라고 믿으면서 ‘그래도 나는 평화의 하느님을 믿으니까 다행이지 뭐야...’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면 그걸로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만진 부분이 내 생각과 다르다면,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른 부분을 더듬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찾아나가는 겁니다.

저는 자기 마음에 맞는 모습을 선택하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하느님을 선택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직관적이고 순간적이며 우연한 만남의 결과가 아니라 끝없는 실수와 후회와 회심과 또 다른 선택의 결과라는 얘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하느님을 믿을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아니, 실제로 우리는 모두 어떤 하느님을 믿을지 선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를 선택하듯이, 어떤 교회를 다닐지 선택하는 것처럼 실제로 어떤 하느님을 믿을지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살다 보면 선택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종교 없이 살다가 종교를 갖게 되듯이, 반대로 종교를 갖고 살다가 그걸 버리듯이, 한 교회를 다니다가 ‘이게 아니다’ 싶어서 다른 교회를 다니듯이,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선택하듯이 우리는 매 순간 매사에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이고 우리가 ‘어떤’ 하느님을 믿는가도 거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선택할 수 있고 또 선택해야 한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25년 동안 설교를 해오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돌아봤습니다. 그렇게 많은 얘기들 중에 과연 건질만한 얘기가 얼마나 될까, 교인들 생각은 그만두고라도 나 자신이 건질만하다고 생각하는 얘기, 기억에 남아 있는 얘기는 뭘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러자 떠오른 얘기가 있습니다. 제가 얘기해놓고도 ‘내가 이런 얘기를 했다니!’ 하고 스스로도 기특하게 여긴 말은 ‘부활은 믿어지는 게 아니라 믿기로 선택하는 것이다.’란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이 제가 한 말 중에 가장 잘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 결코 흔한 일은 아닙니다. 사람이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는데 그 말을 믿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는 부활을 믿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하게 매달리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그 어떤 응답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영감이 바로 이것입니다. 부활을 믿어지는 게 아니라 믿기도 ‘작정’하고 믿겠다고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부활절 때마다 여러분에게 여러 번 이 얘기를 해왔습니다. 부활이 믿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부활을 믿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매달리지 말고, 부활을 믿기로 선택하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선택하고 부활의 삶을 살면 부활은 믿어진다고 말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고정되어 있는, 절대 변하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크신 분이고 무한하게 깊은 분입니다. 그분에게는 모든 게 가능합니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고정불변한 게 아니라 여전히 ‘되어감’(becoming)입니다. 에버하르트 융엘은 ‘하느님의 존재는 되어감에 있다.’(God’s Being Is in Becoming)이라고 했습니다. 융엘은 그런 제목의 책을 썼는데 그 책의 주제는 다름 아닌 ‘삼위일체론’입니다. 다음 주일부터 다루려고 하는 바로 그 주제 말입니다.

저는 하느님은 평화의 하느님이라고 믿기로 선택했습니다. 물론 성서에는 그와 반대되는 하느님의 모습도 그려져 있습니다. 성서에는 전쟁과 폭력의 하느님 모습도 존재하고 평화의 하느님 모습도 존재합니다. 저는 둘 중에 후자인 평화의 하느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선택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제 믿음과 반대되는 얘기를 성서를 근거로 주장해도 저는 지금의 제 믿음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끝까지 그렇게 밀고 나가겠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살다보면 신앙도 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화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변하지 않을 겁니다. 만일 이 믿음을 버린다면 저는 ‘변절’했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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