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하나의 비유, 세 관점
[이택환] 하나의 비유, 세 관점
  • 이택환
  • 승인 2019.03.31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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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눅 15:11-32

오늘 누가복음 15장 본문은 ‘탕자의 비유’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은 주후 400년 경, 성 제롬(히에로니무스)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 붙여진 명칭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교회 밖에서도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내용을 따로 소개가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등장하는 세 사람의 핵심인물 가운데, 누구를 주인공으로 보느냐에 따라,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탕자의 비유지요.

 

Rembrandt van Rijn(1606-1669),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1668-1669)

1.

먼저 이 탕자의 비유의 관점에서 보면, 주인공 둘째 아들의 부정적 측면이 크게 부각됩니다. 그는 사실상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유산의 처분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나 가능한데, 그는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유산을 청구해서, 외국에 나가 허랑방탕한 일에 모두 다 탕진합니다. ‘허랑방탕’이란 우리 말 사전에 의하면, “언행이 허황되고 착실하지 못하며, 주색에 빠져 행실이 추저분하다”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는 단지 거짓말하고 주색에 빠진 정도가 아니라, “구원의 삶에 합당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아소토스/아소티아, unsavedness). 탕자는 이방 땅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지가 됩니다. 그는 유대인 공동체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동족들을 볼 낯이 없었겠지요. 그래서 더욱 이방인들을 의지하는데, 그에게 주어진 일은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를 치는 일이었고, 그 대가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쥐엄나무 열매는 가난한 사람들의 구황작물이자, 동물 사료로 사용된 콩 모양의 식물이라고 합니다. 그나마도 흉년이 들어 구할 수 없게 되었지요. 이제 탕자는 허랑방탕한 죄인일 뿐 아니라, 돼지를 치는 부정한자요, 게다가 살길이 막막한 심히 가련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생깁니다. 탕자가 스스로 회개하고,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탕자의 비유”의 교훈은 사람이 그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스스로 회개하고 아버지, 즉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18절에 나오는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탕자의 고백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하늘은 곧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유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백혈병에 걸려 죽는 순간까지 크리스천 지인들의 권유를 거부하고, 신앙을 결단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이어령 교수는 가족이 질병으로 고통당할 때 신앙을 결단했습니다. 탕자도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단합니다.

그런데 탕자가 따로 있을까요? 최근 공분을 사고 있는 장관 후보자들을 보면 2000년도에 인사청문회가 도입된 이후로 지금까지 멀쩡한 사람이 과연 누가 있었나 싶습니다. 사실 장관 후보자들을 힐난하는 청문위원도 똑 같은 사람들로 보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기회만 있었다면 언제든지 그들처럼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병역회피, 탈세, 표절 등을 따라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우리도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우리도 탕자처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2.

한편 오늘 말씀을 우리가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로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주인공을 탕자가 아닌 아버지로 보는 것이지요. 실제로 오늘 말씀은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두 아들을 가진 “어떤 사람” 곧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비유 전반부엔 둘째 아들이 등장하고 첫째 아들은 나오지 않습니다. 또 후반부엔 첫째 아들이 등장하고 둘째 아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비유에서 두 아들을 연결하는 사람은 오직 아버지뿐입니다. 아무리 탕자가 돌아왔다고 해도 아버지의 사랑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탕자의 귀환은 불가능하고, 귀환해도 아무 감동 없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탕자의 귀향 집으로 돌아가는 멀고도 가까운 길, 포이에마, 2009년
헨리 나우웬, 탕자의 귀향 집으로 돌아가는 멀고도 가까운 길, 포이에마, 2009년

이런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 헨리 나웬의 ‘탕자의 귀향’입니다. 그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 미술관에 있는 렘브란트의 성화, “탕자의 귀향”을 감상하다가 영감을 얻어 그 책을 썼습니다. 나웬은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려는 결심을 하게 된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깊이 묵상합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가 유산을 탕진하고 이방 땅에서 돼지를 치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었지요. 그는 자신의 비참함 속에서 문득 자신은 돼지가 아닌 인간이며, 그것도 자기 아버지의 귀한 아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나웬은 존귀함을 상실한 인간이 어떻게 다시 이전의 존귀함을 회복할 수 있을까를 묻습니다.

사람이 돈을 많이 벌면 존귀해질까요? 오히려 더 타락하지는 않을까요? 학위를 받으면 더 존귀해질까요? 더 교만해지지는 않을까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더 존귀해질까요? 오히려 갑질하는 자가 되지는 않을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워낙 이런 저런 부작용을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웬은 사람이 존귀해질 때가 언제인가? 자신이 비참함 속에 있을지라도,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라고 말합니다. 비참한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회복과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구원받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고,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을 때, 그러한 받아들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받아들여짐이라는 것이 종종 박탈감과 상처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아무리 가족과 이웃, 친구가 있고, 좋은 직장에서 승승장구한다 해도, 삶이 외로운 이유는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곧 한계를 지닌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을 완벽히 제공해 주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는 주인공 아버지를 통해, 우리를 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탕자를 돌아오게 한 원동력이 탕자의 의지라기보다. 사실은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탕자의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외면하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줍니다. 실제로 주변에 그런 어머니는 적지 않아요. 하지만 동양이나 서양이나,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하고, 허랑방탕하게 지내다 알거지가 되어 돌아 온 아들을, 조건 없이 받아주는 아버지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그런 아들을 그대로 받아주시는 자비하신 아버지시라는 것이지요.

 

3.

끝으로, 이 비유를 “화가 난 큰 아들의 비유”로 보면 어떨까요? 탕자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 첫째아들을 주인공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실은 25절 이후는 마치 사족처럼 불필요해보입니다. 왜냐하면 눅 15장 앞부분의 <잃은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를 봐도, 잃어버린 양과 은전을 찾은 사람이 이웃과 함께 기뻐하는 이야기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비유 역시, 허랑방탕한 아들이 자비로운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 온 집안이 잔치를 벌인 이야기로 끝나는 게 일관성이 있습니다. 여기에 갑자기 분노한 형이 등장하고, 아버지가 그를 달래는 내용이 추가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세 번째 입장은 바로 본문의 이 사족과 같이 비틀어 놓은 부분에서, 비유의 핵심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눅 15장에 나오는 세 비유가 모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1-3절,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세리는 로마를 위해 동족을 팔아먹는 매국노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방인과 늘 접촉하기 때문에 부정한 자로 취급받았습니다. 또한 죄인들은 너무나도 가난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거나, 또는 율법에 무지한 자들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 및 죄인들과 일체 교제하지 않았고, 식탁에 같이 앉는 법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단지 율법 규정을 지키는 자가 회개한 자가 아니라, 예수님께 나아오는 모든 자가 회개한 자였습니다. 예수님이 곧 율법의 주인이시기 때문이지요. 15장 1절에, 당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율법으로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기꺼이 맞아주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 식사가 장차 있을 하나님 나라의 천국잔치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양을 다시 찾아도 이웃과 함께 기뻐합니다(잃은 양의 비유). 잃어버린 은전을 찾아도 마찬가지지요(잃어버린 은전의 비유). 하물며 양보다 귀하고, 은전보다 귀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왔다면, 큰 잔치를 벌이는 것이 마땅하지요(탕자의 비유). 그래서 이 비유 속의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오자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났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었다며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당신께 나아온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 잔치를 벌일 때,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유 속의 큰 아들처럼 분노하고 있었지요. 그것이 과연 온당하냐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아서 죄인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진짜 죄인은 예수님께 나아간 세리와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오늘날의 교회 공동체가 무엇을 진정으로 기뻐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 성도들이 성공하고, 잘 되고, 명예를 얻는 것? 물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하나님 나라에서 잔치가 벌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잃어버린 자녀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때, 실족한 자녀가 예수님 앞으로 나아올 때 벌어집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상, 그로 인해 고통하는 세상을 향해 우리가 자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 온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차별 없이 먹고 마시는 하나님 나라 일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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