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거룩한 분노를 가진 사람
[김동환] 거룩한 분노를 가진 사람
  • 김동환
  • 승인 2019.03.26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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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목사의 설교 - 렘 7:1~7
미켈란젤로, 시스틴성당 천정화

1. 화를 낼 일이 있었나요?

지난 금요일에 하루는 6학년 담임으로 들어갔습니다. 출장 가신 선생님을 대신해서 아이들과 하루를 보냈는데요, 한 시간 수업하고 헤어지는 것도 좋지만, 아이들을 오래 만나는 것도 좋더라고요! 그중에 미술 수업도 있었는데, 제가 그렇게 싫어하던 미술을 저도 재밌게 가르치게 되어 신기했습니다. 수업 중에 딱 한번 화를 낼 일이 있었어요. 정확히는 화난 척한 거지만요, 아이들 두 명이 서로 싸우려고 해서 어쩔 수없이 혼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저는 가능하면 화를 내지 않고 가르치려 하지만, 혼을 내는 게 그 아이에게 필요한 상황들이 있긴 하거든요. 딱 봐도 둘이 친한 친구 같아 보였는데 서로 씩씩거리면서 싸우는 거예요. 그래서 크게 화내고 말리고는, 마음이 풀리면 서로 사과하라고 하고 수업을 했어요. 사과를 먼저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멋진 사람이라고, 아이들에게 열변을 토했는데 효과가 있었을진 모르겠습니다. 사순절에 화를 내면 안 되는데 말이죠?

여러분은 한 주간 지내면서 화를 낼 일이 있었나요? 당연히 많았겠죠? 자신의 마음을 매너 있게 잘 표현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안 그러면 자기 화에 자기가 다치니까요. 주로 어떤 일에 화가 났었나요? 그리고 자기의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들이 있다면 예배 후에 나눔 시간에 이야기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도 분노가 담겨있어요. 그런데 좀 거룩한 분노죠. 사적인 분노가 아니에요, 친구랑 말다툼해서 오는 화가 아니라,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 가져오는 분노예요. 하나님의 분노에 공감한 예레미야 예언자의 분노. 그래서 거룩한 분노라는 말을 써보았습니다.

 

2. 분노를 쏟아내는 예언자

몇 주전에 이사야서 본문을 다룰 때 예언자에 대해 배웠습니다. 예언자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었죠? 말씀을 맡아서 옮기는 사람, 맡길 예, 말씀 언, 해서 예언자였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주로 왕이나 제사장, 공동체의 리더십에게 전해서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움직일 수 있도록 조율하는 사람이지요. 예레미야서의 특징으로 예언자를 보충 설명해볼 수 있겠어요. 하나님의 분노에 마음이 공감되는 사람.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에 몸과 마음이 반응하는 사람이 예언자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내 ‘화’를 컨트롤하기도 어려운데 말이죠. 거기다 하나님의 분노까지? 분명 자기의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그래서 개인적인 화에서는 약간 자유로워서 여유가 있어야 하나님의 분노에도 마음을 쏟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 본문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솔로몬 이후 둘로 쪼개진 이스라엘, 그중에 북쪽은 이미 멸망당했고, 이제 남쪽 유다만 남았습니다. 남유다 공동체의 중심에 성전이 있지요. 남유다 공동체는 북쪽의 이스라엘에 무너진 것을 봤음에도 하나도 삶의 태도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정의를 버리고, 힘없는 외국인, 나그네, 고아, 과부를 돕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고, 죄 없는 사람에게 오히려 죄를 있다고 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신으로 모시는 행동들을 한 거예요.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비뚤어진 삶을 살아가지만 사람들은 성전으로 모여듭니다. 그러고는 이 화려한 성전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다, 이렇게 말하고 다닙니다. 10절에 보면 우리가 이곳에 왔으니 구원을 받았다고 좋아하지요, 그것을 보고 하나님은 가증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담겨있는 거예요.

이 분노를 예레미야는 성전 앞에 서서 예배하러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쏟아내고 있습니다. 1인 시위를 하는 거예요. 나쁜 짓은 다해놓고, 교회 와서 우리는 구원받았다, 여기 하나님이 계시다! 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돌아서자, 하나님께 돌아가자, 헛짓거리 그만하고 정신 차리자! 고 외치는 거예요. 예레미야 7장을 그래서 성전설 교장이라고 해요. 예레미야가 성전 앞에서 사람들에게 외친 내용이 정리되어 있어서 그래요. 이 성전 설교에 관한 사건, 그러니까 사람들의 반응, 예레미야와의 대화는 6장이나 8장에 나와있는 게 아니라 26장에 나와있어요. 예레미야의 말씀선포가 앞에, 사건 이야기는 뒤쪽에 정리되어있는 게 예레미야서의 특징이거든요.

 

3. 분노로 반응하는 사람들

이렇게 분노의 1인 시위를 한 예레미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26장 8절 9절을 읽어드립니다.

[ 8 이와 같이 예레미야가 주님의 명대로, 모든 백성에게 주님의 모든 말씀을 선포하니,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너는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다. 9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을 빌려, 이 성전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멸망하여 여기에 아무도 살 수 없게 된다고 예언하느냐?" 그러면서 온 백성이, 주님의 성전 안에 있는 예레미야를 치려고,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

네, 예레미야를 죽이려 해요. 다행히 예레미야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서 살아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이 장면과 유사한 장면이 떠오르는 게 있지 않나요? 회당에서 말씀을 읽고 죽임을 당할 뻔한 사건.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읽지요? 18절, 19절입니다.

[ 18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19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희년의 메시지, 그러니까 50년에 한 번은 모든 재산을 처음으로 세팅하고, 노예를 풀어주고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메시지. 다른 율법은 지키면서 실제 공동체에 필요한 일은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책망하는 메시지를 전하자 그것을 듣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600년 전의 유대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거죠,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계속 저런 메시지를 선포하고 다니니까 예레미야도 고향사람들에게 쫓김을 당하게 되었어요. 아나돗의 사람들이 예레미아를 어떻게 죽일까 논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예레미야가 이런 말을 해요.

[ 19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해치려고 "저 나무를, 열매가 달린 그대로 찍어 버리자. 사람 사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 하면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줄을 전혀 몰랐습니다.  20 그러나 만군의 주님, 주님은 의로운 재판관이시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저의 억울한 사정을 주님께 아뢰었으니, 주님께서 제 원수를 그들에게 갚아 주십시오. 제가 그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21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나돗 사람들을 두고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너의 목숨을 노려서 이르기를 '너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아라.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계속하다가는 우리 손에 죽을 줄 알아라' 한다. (예레미야 11:19~21) ]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이것도 그리 낯설지 않죠? 예수님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표현하잖아요? 모르겠어요, 요한도 스스로가 죽임 당할 것을 알았을지, 또 예수님도 사람들의 악함 때문에 죽임 당할 것이 눈에 보였는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600년 전에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함으로 고난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예수님 또한 그 길을 걸어갈 것이 눈에 보였던 것 같아요.

 

4. 원죄

교리적으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기독교인이면 낯설지 않을 말이고요, 교회 밖의 사람이면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어요, 물론 뉴스를 많이 보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와 닿을 것 같고요. 교리적으로 인간은 죄인이다, 이렇게 외우는 것보다는 예레미야서를 공부하고 읽고 묵상하는 게 훨씬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 싶어요. 머리로 암기하는 게 아니거든요. 물론 예레미야를 읽지 않아도 이미 살면서 그게 체감된 분들도 계시겠지만요, 아직 여러분은 대부분 이십대니까요!

예레미야서는 저도 설교를 해본 기억이 거의 없어요. 한번 한 것 같긴 한데 잘 기억이 나진 않아요, 성경공부로는 한번 해봤고요. 왜 그러냐면, 그만큼 인기가 없는 말씀이라 그래요. 성경에서 가장 두꺼운 책중의 하나지만, 인기는 없어요. 예언자 중에 거의 유일하게 기적을 행하지 않는 예언자거든요. 그냥 예언자의 순수 결정체와 같다고 보면 되어요. 오로지 말씀 선포, 그리고 그 선포로 인한 고난을 감당하는 사람. 매번 감옥에만 왔다 갔다 해요. 교회 앞에서 ‘여러분, 이건 교회가 아닙니다. 이렇게 예배 드리는게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사람들이 죽이려고 했는데, 좀 더 심한 메시지를 전했어요. 아무리 하나님의 분노를 전해도 사람들이 변하질 않으니 예레미야의 선포도 더 세졌거든요.

바벨론에게 나라가 망해서 포로로 끌려갈 것이고, 70년 후에야 돌아올 것이다고 선포했어요. 이딴 식으로 가면 결국 망한다는 말인 거죠.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당연히 안 좋죠.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예언보다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이고, 유다를 살리실 것이다는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에 반응했어요.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에 열광하며 성전에 모이는 거예요. 예루살렘은 그렇게 분노와 슬픔 속에서 감옥에 갇히고 사람들을 피해 숨어 다니고, 그러면서 살아요. 하나님께 슬픔을 토해내면서 말이죠, 나를 왜 태어나게 했는지, 그렇게 절망하면서 살아요.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결혼도 하지 않고, 결혼식도 가지 않고, 초상집도 가지 않아요. 완전한 혼자의 길을 걸어요. 이 백성이 심판받을 것을 전해야 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인기가 없어요. 당시에도 없었고요, 지금도 인기가 없어요. 저도 예레미야의 말씀을 전해야 할 부담을 가지고 책을 보는데, 정말 어느 구절을 나누어야 할지 난감하더라고요.

세상에 어느 종교의 경전에 ‘예배드리러 모이는 사람들에게 그러지 말라!’는 메시지가 있을까요?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 연약한 사람을 돌보지 않고, 성전에, 교회 모여서 우리 구원받았다고 좋아하지 말라는 메시지 자체가 경전인 종교가 또 있을까요? 세상에 이렇게 자기반성적인 종교가 어디 있을까요? 예레미야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공동체가 ‘대형화’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목회자들은 왜 ‘믿으면 복 받는다’는 메시지만 하고 있을까요?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그렇겠죠,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니까 그렇겠죠. 거짓 예언자는 늘 있는 법이고, 또 그런 메시지가 반응해서 몰려도는 사람들도 늘 있는 것 같아요.


5. 교회의 존재 이유

우리가 교회에 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학적으로 재정비해서 묻는다면, 우리가 교회 공동체가 되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혼자서 예수님의 길을 걷기엔 우리 안의 죄 때문에, 욕망 때문에, 우상을 만드는 능력 때문에 잘못되기 십상이기 때문에요.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고, 서로 힘을 줄 때 힘을 주고, 책망을 해야 할 때는 책망을 하며, 위로할 때는 위로하며 십자가의 길을 각자 걸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공동체, 교회가 되어가야는 거죠. 우리끼리 구원받았다 찬양하고, 예배를 몇 시간 드리면 하나님께서 내 사업을 잘되게 하실 것을 소원하고, 이렇게 샤머니즘적으로 가면, 무수한 예언자들을 죽인 성경에 나오는 악한 이스라엘 공동체 사람들과 다를 바 없지 않겠어요? 그렇게 새벽에 일어나서 교회를 가고, 봉사를 하고, 찬양을 하며, 수련회를 하고, 친구를 만나는데, 그 근원적인 동기가 무엇인가요? 예레미야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에게 묻게 되어있어요. 정말 내 중심이 바로 서 있는지 말이에요.

처음에는 동료 목회자들에게 연대에 관한 희망을 많이 이야기했어요. 작고 건강한 공동체를 많이 만들어서 연대하자고. 물론 그 꿈은 지금도 변하진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겠다는 생각을 점점해요. 정의를 꿈꾸고 새로운 모임을 꿈꾸는 이들이 많지만, 정말 한걸음 내딛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절망도 좀 있고요, 저도 그랬지만, 버티고 버티다가 조금씩 타협하면서 변해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어요. 이 시대에 과연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제 눈에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가지고 또 종교 장사를 하는 사람들밖에 안 보여요. 공평과 정의를 외치면서 인기를 얻고, 뒤에서는 아무런 행동도, 아니 오히려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밖에 안 보여요. 공평과 정의는 말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홀로 그 길을 걸어간 예레미야 예언자에 대한 존경심이 저절로 생기는 것 같아요. 그야말로 거룩한 ‘왕따’ 네요. 그분은 어떤 힘으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었을까… 예레미야의 길을 천천히, 조금씩 걷다 보면 만나는 누군가가 있을 거예요. 연대는 그때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 고독한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홀로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어가다 보면, 같은 방향을 걷는 사람들이 보일 거라고 생각해요. 멀리서나마 보여도 저는 위로가 될 것 같아요. 힘이 될 것 같아요.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예레미야 예언자가 걸어가신 그 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 욕망에 사로잡힌 종교지도자들의 길도 아닌, 구원에 대한 욕심에 눈이 가려진 대중들의 길도 아닌.  십자가의 길. 오히려 욕심과 반대되는 그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이번 한 주간의 사순절은 이 질문을 묵상해보며 지내는 건 어떨까요? 기도하겠습니다.

 

김동환 목사는, 길섶교회를 섬기며, 평일에는 초등학교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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